논단

 

아! 아프간, 아프가니스탄

도돌이표 역사 30년

 

 

이옥순 李玉順

한국아세아학연구소 부소장, 인도근대사. 저서로 『여성적인 동양의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등이 있음.

 

 

테러리즘은 손에 든 폭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있다.

─오쇼 라즈니스

 

 

코끼리 사격, 테러 사격

 

드디어(!) 2001년 10월 7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뉴욕의 세계무역쎈터를 쓰레기더미로 만든 9월 11일의 테러에 대한 보복이었다. 내 어머니가 갑자기 발병하여 의식불명이다가 돌아가신 길지 않은 그 20여일 동안, 세상의 많은 이들이 ‘21세기의 첫 전쟁’ ‘악에 대한 투쟁’을 기다렸다. 무역쎈터처럼 주저앉은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려 하루빨리 초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라고 노골적으로 보복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고, ‘언제 공격할 것인지 관심이 증폭된다’ ‘공격목표가 초미의 관심사’라는 표제를 달고 ‘군사작전 씨나리오’를 흘리며 미국정부에 은근하게 강공(强攻)을 주문하는 언론도 있었다. 라디오방송이 반복하여 들려주는 국가(國歌), 불티나게 팔리는 성조기로 상징되는 미국의 애국주의도 군사공격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부시 대통령은 취임 초에 언명한 ‘힘에 의한 대외정책’을 실천했다.

상중(喪中)이라 한층 죽음에 민감한 나는 그러한 수사(修辭)와 그 결과인 불꽃놀이 같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장면을 지켜보면서 죠지 오웰(George Orwell)의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를 떠올렸다. 죽어 넘어진 잿빛 코끼리의 모습이 무너진 무역쎈터의 잔해와 겹쳐져 어른거렸다. 1936년에 발표된 「코끼리를 쏘다」는 식민지에서 남성다운 힘과 위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강한 지배자로 남아야 하는 백인의 곤혹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미얀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는 영국인 주인공은 발광한 코끼리가 시장을 휘젓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소총을 들고 출동한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집에서 기르는 코끼리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닫지만, 모여든 수천명 군중은 백인 경찰관이 코끼리를 쏘길 기대한다. 그 집단적 의지의 압력에 굴복한 경찰관은 구경꾼들에게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무해한 코끼리에게 총을 겨눈다.

나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파괴하는 오웰의 그 경찰관 너머로 지난 50년 동안 연마한 강대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강자로 행동해야 하는 미국의 딜레머를 본다. 수십년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이 ‘성난 코끼리’가 아님을 미국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일과 식량을 동시에 투하하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통해 중세적 타자 ‘악’을 사격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걸 만방에 증명해야 하는 완력의 포로였다. 백인은 가면(mask)을 쓰고 있고, 그들의 얼굴은 거기에 맞게 자란다고 대영제국의 공동(空洞)을 간파한 죠지 오웰의 통찰은 오늘날의 제국인 미국에도 유효하다.

그랬다. 아프가니스탄은 미사일공격에 딱 맞는 ‘성난 코끼리’가 아니었다. 미국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알 카에다(Al-Qaeda) 조직이 있는 곳을 향해 ‘무한한 정의’를 외칠 때, 그 땅에는 인구의 절반인 아동과 또다른 절반인 여성, 원조에 의지하는 700여만명의 인구가 1천만개의 지뢰와 동거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프간인은 빈 라덴이나 그를 비호하는 탈레반(Taleban)을 지지하거나 지도자로 뽑지 않았지만, 그 ‘무죄’는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 변경지대의 삶은 고달프다. 매일 영원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늘 위험이 감돌고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19세기 한 영국인의 기록은 21세기 아프간인들의 생생한 하소연으로 변했다.

베트남에서 ‘베트콩’으로부터 마을을 구하려고 마을 전체를 불태운 미군의 방식은 이번에도 애용되었다. 소수의 ‘악’을 위해 희생되는 다수는 무고한 아프간 민중이지만, 누구도 공습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과 피해자에 대한 억압의 상동성은 상상의 영역에 넘겨지고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 분노의 존재론적 현실은 묻혀졌다. TV를 보는 사람들은 악을 징벌하는 ‘선한’ 미국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타자와는 멀어졌다. 아프간전쟁에 아프간인은 없다! 그러나 방어능력이 없는 대상을 두고 미국식의 정의를 주장하는 그 힘의 행사는 승리처럼 보이는 패배를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리했으나 패배한 자들의 기록인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30년 역사를 돌아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왕’이 되려는 자들

 

19세기의 ‘미국’인 대영제국을 찬송하며 ‘백인의 짐’을 설파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왕이 되려고 하는 자」(The Man Who Would be King)라는 소설에서 서로 싸우는 아프간인으로부터 왕국을 뺏으려는 백인을 그렸다. 아프간인들은 군사기술을 전해주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인을 신처럼 받들지만 근대화가 정도를 넘자 왕이 되려는 백인을 살해한다. 동시대 영국인이 쓴 다른 작품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늘 불안정하고 통치하기 어려운 땅으로 묘사된다. 그곳에 사는 아프간인은 “담요를 짜거나 논밭을 경작하며 자식을 걱정하는” 지루한 일상보다 전쟁을 선호하고 ‘소총을 훔치는 전문가’이지만, ‘유부녀의 애인’으로 모험과 아슬아슬한 생활을 즐기는 전사다운 부족으로 등장한다.

러시아의 남하를 의식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삼으려던 19세기 영국의 상상력을 자극한 ‘남자다운 남자들’의 땅 아프가니스탄에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왕’이 되길 소망하는 수많은 자들이 등장했다. 20세기의 그들은 ‘전지전능한 서구!’라는 키플링 아류의 슬로건을 신봉하는 영국·러시아·미국 등의 서구인이거나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