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유담 金裕潭

1983년 부산 출생.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탬버린』, 장편소설 『이완의 자세』 등이 있음.

neverend1130@hanmail.net

 

 

 

안(安)

 

 

엄마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A병원

큰집 오빠가 보내온 문자메시지였다. 갑자기 날아든 큰엄마의 부고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발신자인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사촌 올케언니를 주소록에서 검색했다. 오빠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안 행사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받아둔 기억이 났다. 큰엄마는 새아기와 윤미 모두 같은 서울에 있으니 자주 보고 연락하고 지내면 되겠다고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큰엄마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후로 언니와 연락한 적은 없었다.

새언니는 그때 내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눈치였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그런데 누구시라고요?”

“언니, 저 윤미요. 기환오빠 작은집 사촌동생이요.”

“아, 네. 아가씨.”

“큰엄마 어떻게 되신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진짜 돌아가신 거예요?”

“네, 맞아요. 그저께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받고 오빠가 급하게 내려갔어요.”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언니와는 달리 나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호흡이 가빠지고 말이 빨라졌다.

“위독이요? 가, 갑자기요? 제가 한달 전에 통화했을 때만 해도 길게 말씀도 하시고, 괜찮으셨는데요.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제가 한번 내려간다고도 했는데,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러게요. 갑자기 그렇게 되신 것 같아요. 뇌졸중이 왔다는데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뇌졸중요? 언제요? 쓰러지신 건가요? 한달 전까지만 해도 진짜 멀쩡하셨거든요. 언니는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였어요?”

새언니는 대답 없이 잠깐 머뭇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목소리를 깔며 내게 되물었다.

“아가씨, 제가 시어머님이랑 통화한 내역까지 아가씨한테 보고드려야 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렇게 되셨다니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제가 의사도 아닌데 갑자기 악화된 연유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 면회가 안 됐잖아요. 오빠도 그저께 연락받고 내려갔는데 코로나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제 오후에 겨우 얼굴 뵈었대요. 방호복 입고서라도 임종 지킨 게 다행이죠. 저도 지금 준비해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장례식장에서 봬요.”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임종, 장례식 같은 단어를 내뱉는 언니의 말투가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이라 통화를 하는 동안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격한 감정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몰려왔다. 큰엄마는 나에게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 나가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휴가를 낸 후 A시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의 전화가 아니었더라면 한참을 더 울었을 것이다.

“큰엄마 소식 들었지? 너 그렇게 울고 있을 줄 알았다. 나 죽을 땐 안 울어도 큰엄마 죽었다는 소식엔 세상이 무너지지?”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큰엄마 어떡해? 너무 불쌍해.”

나는 큰엄마라는 말을 뱉자마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복 없는 양반……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울어. 여기 와서 실컷 울 텐데 미리 힘 뺄 일 뭐 있어. 공서방도 같이 오니? 지금 옆에 있어?”

“아니, 나 혼자 갈 거야. 요즘 우리 따로 지내.”

“결혼이 애들 장난이니? 무른다고 그게 물러질 일이냐고.”

“엄마, 그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니가 늘 그런 식이지. 엄마 말은 무시하고 너만 잘났잖니.”

사실 엄마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엄마 기준에서 한참 모자란 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상위권의 성적을 받아와도 올백이 아니면, 전교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엄마 앞에서 나는 늘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아들 없이 딸만 하나 낳은 엄마는 내가 아들보다 잘난 딸이 되길 바랐다. 여자라서 차별받거나 제약받는 세상이 아니라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말해놓고도 내가 성에 차지 않는 점수를 받아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여자가 자기 앞가림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의대나 약대, 꼭 전문직이어야 해. 아무도 너를 만만하게 볼 수 없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자도, 아니 여자일수록 능력이 있어야 해.”

이과 적성이 아니라 의대나 약대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해도 엄마는 교차지원 가능 학교 목록을 들이밀며 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네 인생은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는 의대나 약대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가 정해준 곳까지는 아니라도 내가 원하는 학교에 갈 정도의 성적은 거두었다. 서울 소재의 사립대 사회학과에 원서를 내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차라리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지방 교대에 가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너는 그동안 엄마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넘긴 거니? 무조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한다니까.”

나는 결국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왔다. 등록금을 내주면서도 엄마는 내게 격려가 아닌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이제라도 전문직이나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은 글러 먹은 거라고,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나중에는 결국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였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많은 말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여 있었다. 그 고인 말들은 쉽게 흘러나가지도 않고 썩은 물처럼 출렁거렸다.

엄마는 A시에서 20년 넘게 수학전문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P시에서 일본 기업을 주거래처로 하는 해운회사를 운영했던 아버지의 사업이 고꾸라진 직후, 엄마와 나 둘이서만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A시로 왔다. 처음에 엄마는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만 A시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버틸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혼 전 수도권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근무했던 엄마는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 후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고작 적성 문제 따위로 정년이 보장된 학교를 뛰쳐나온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엄마는 큰아버지의 소개로 A시에 있는 중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큰집 근처로 나를 데리고 이사 왔다. 여섯살 난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학교에 나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나를 돌본 것은 엄마의 시어머니가 아닌 손위 동서, 그러니까 나의 큰엄마였다.

2년 후 아버지가 일본에서 빈털터리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앞으로 A시를 쉽게 떠날 수 없음을 자명하게 깨달았다. 그녀가 기간제로 근무 중인 학교에서는 아이까지 딸린 기혼의 여교사를 정식으로 채용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계약 종료 후 엄마는 학원을 차렸다. 그 당시만 해도 A시에는 제대로 된 수학전문학원이 없었다. 엄마는 사범대 졸업장과 교사 경력을 내세워 학생들을 모집했다. 아버지는 학원 봉고차를 몰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하교 후 큰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큰집은 어린 내 눈에는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넓고 큰 집이었다. 방 두칸짜리 연립주택이었던 우리 집과 달리 방이 네칸에 마루도 널찍한 단독주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거주하는 가족 수에 비해 너무 비좁은 곳이었다. 당시 큰집에는 할머니, 큰아버지 부부,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명의 사촌오빠,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막내삼촌까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식구들의 끼니와 빨래를 챙기고 집 안 청소를 하는 것은 오로지 큰엄마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작은집도 챙겨야 했다. 큰집 사람들은 우리를 작은집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큰엄마를 큰애, 우리 엄마를 작은애라고 부르며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큰집이 작은집을 돌보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큰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집 조카를 먹이고 씻기며 돌봤고, 작은집 식구들의 저녁식사까지 챙겨야 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해산한 막내고모까지 갓난아기를 데리고 와 몸조리를 했다. 추운 겨울, 기저귀를 하얗게 삶아 빤 후 언 손을 불면서 빨랫줄에 널던 큰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항상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이느라 가스불 앞에 오래 서서 땀을 흘리던 큰엄마의 얼굴을, 다리를 벌리고 앉아 붉은색 고무대야에 한가득 깍두기를 담그던 큰엄마의 앉음새를, 스테인리스 들통에 뜨거운 물을 끓여서 내 머리를 감겨주고 목욕을 시켜주던 손길도 기억한다. 손발톱을 깎아주며 혹시나 생채기가 생기지나 않을까 집중하던 눈빛도.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걸까.

 

큰엄마에게 나를 맡겨놓고도 엄마는 별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큰집에 올 때마다 남편 잘못 만나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돈은 안 벌어 와도 괜찮으니 학원에 빚쟁이 찾아오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딴청을 피웠고, 큰엄마가 엄마를 달랬다. 서방님도 잘해보려고 그런 거라고, 동서가 조금 참고 기다려주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며 큰엄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집에 돌아와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큰엄마 때문에 늘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된다며, 형님에게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그런 재주라면 엄마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나야말로 큰엄마가 아닌 엄마 손에서 컸다면 미치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것이다. 엄마는 늘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했지만, 나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작은 인터넷 언론사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겨우 그런 델 다니려고 그 고생을 했냐며 나를 타박했고, 공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빨리 결혼하려 하느냐고, 경력을 쌓아 메이저 언론사로 이직한다더니 역시 너는 빈말만 요란하다며 엄마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본다면 공은 내게 과분한 신랑감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아까워 죽겠다고 했다. 딸 결혼에 보태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괜한 어깃장을 놓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얘, 내가 수학 선생이야. 나는 계산기 안 두드려봤겠니. 어떤 결혼이든 그건 여자한테 손해야, 이 맹추야.”

내 결혼식 날 엄마는 식장 입구에 침울한 얼굴로 서서 손님들을 맞다가 예식이 시작하자마자 혼주석에 앉아 화장이 다 번지도록 울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기구한 사연이 있어 보일 정도로 서럽게 울었기 때문에 나는 결혼식 내내 굳은 얼굴로 양쪽 혼주석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봐야 했다.

“엄마 그만 좀 울어, 제발.”

본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찍기 전 엄마에게 눈짓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니 발로 지옥불 걸어 들어가는 거니 나중에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마.”

내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춘 채 끝까지 독설을 내뱉는 엄마의 말에 그간 묵혀왔던 설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따가워지려는 그 순간 내 옆으로 큰엄마가 다가와 등을 토닥이며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드레스를 입은 채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미야, 윽수로 이쁘네. 이렇게 이쁘니 사랑받고 살겠다. 표정이 와 그라노? 신부는 웃어야 된다.”

큰엄마가 두툼한 손으로 부케를 들고 있는 내 왼팔과 손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옅은 웃음을 보일 때까지.

 

*

 

공과 결혼하면서 나는 12년간의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방이 아닌 집에서 살게 됐다. 공이 부모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뉴타운의 28평대 아파트는 내가 살아본 집 중에서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공이 자신의 명의로 된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결혼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없었더라면 공과 사귄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셋집이라도 마련할 돈을 모을 때까지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사이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관계가 지지부진해졌을 수도 있다. 공을 만나기 전 겪었던 몇번의 지난 연애가 그랬듯이.

공과는 우연한 계기에 술자리에서 만났다. 문화부 선배가 자신이 GV행사 사회를 보는 독립영화 예매가 너무 저조하다며 와서 자리를 채워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영화관에 찾아간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관은 한산했다. GV까지 마쳤을 때 관객석에는 나와 공을 포함해 다섯명 남짓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감독이 끝까지 남아준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원한다면 다 같이 뒤풀이에 가자는 제안을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과 합석을 하게 됐다. 공과 나는 서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사회자인 박기자와 선후배 사이라는 말이 나오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기자분이셨어요?”

“네. 왜요?”

“저는 그냥 저처럼 일반인인 줄. 기자처럼 안 보이세요.”

“기자도 일반인인데요.”

그날 나는 공과 명함을 교환했다. 공은 생리대와 휴지를 만들어 파는 제지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엔 씨네필이었고, 지금은 ‘다양성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는 것을 취미로 삼은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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