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
애도의 수사학에서 기쁨의 정치학으로
새로운 젠더질서를 향하여
김현미 金賢美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일상의 여성학』 『‘한류’와 아시아의 대중문화』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이상 공저)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공편) 등이 있음. hmkim2@yonsei.ac.kr
1. 들어가는 말
요즘 여성들이
인권운동이다 뭐다 해서 차별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같은 여성상위사회에
남성이 차별을 당하면 당했지
무슨 여성이 차별을 당한다고 그래요?
도무지 성차별다운 게 있어야지
안 그래요?
서태지의 7집 음반에 수록된 「Nothing」 전문이다.1 작년에 불거진 ‘된장녀’ 논쟁과 여성 연예인들을 겨냥한 악플의 홍수에 이어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여성부 폐지 10만 서명운동’까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성전쟁’(sex war)이 해를 넘겨 벌어지고 있다. ‘여성세력화’라는 사회적 흐름을 역차별·남성배제·남성차별로 곡해하는 일부 한국 남성들의 ‘반동’(backlash)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차별을 논하는 일은 이제 식상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성정치학’의 지형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다. 저출산 위기를 야기하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 이성애적 핵가족 제도의 존속을 위협하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성적 욕망을 실천하는 여성’, 눈치없이 모든 분야에서 ‘남성보다 월등한 능력을 과시하는 여성’ 등 가부장제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 각종 고시의 합격자 중 여성의 비율이 급상승하고 있고, 여성 총리와 당대표가 탄생하고 있으며, 여기저기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신화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2007년 새해를 맞이한 지금, 여성학자인 나는 여전히 한국사회 젠더질서의 재편성을 열망한다. 젠더질서란 여성, 남성 또는 여성성이나 남성성과 연관된 사회·문화·정치·경제·종교 등의 제 측면이 이분법적 우열의 관계로 구성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젠더질서의 재편성은 고정화되고 본질화된 기존의 남녀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성별과 상관없이 좀더 유동적이며 개별화된 자아를 구성할 수 있는 일상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이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권력, 상징, 가치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사회의 젠더질서는 일관된 ‘진보’의 과정을 겪는다기보다는 한걸음의 진보와 한걸음의 후퇴 과정을 통해 매우 지난하게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호주제 폐지와 ‘젠더’의 정책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출현,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성/남성들의 등장 등 진보적인 변화를 목격했다. 그러나 IMF사태 이후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면서 여성의 경제력은 영구적으로 무력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소수 여성들의 성공신화가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자원 분배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간다. 오히려 ‘된장녀’ 같은 호명을 통해 허영심 많고 소비주의의 노예가 된 젊은 여성에 대한 집단적 미움이 설득력을 얻는 세상이 되고 있다. 여성, 남성 모두 의사소통적·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높아지고 있으나, 여성을 쉽게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관행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대하다.
젠더는 가족·연애·성 같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부터 정치·경제·종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영역에 걸쳐 정체성을 구성해내는 주요한 기제이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야말로 민족주의만큼이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그러므로 관습화된 젠더질서에 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심리적 불안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심리적 불안이나 불편이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질 때, 사회적 ‘타협’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지기에는 현재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분노의 수준이 너무 높다. 종신고용의 신화가 사라지고 생계부양자로서의 신분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남성들은 당연하게 누려왔던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상실감으로 괴로워한다. 부인과의 친밀성을 구축할 여유도 없이 덩그러니 집으로 보내진 중년 남성들의 외로움은 사회적 연민을 얻기에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여풍’ 이미지 시대에 영구 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자리매김된 보통 여성들은 가난, 불안, 모욕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를 것인가와 직장을 다닐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여성들의 갈등은 절박하고 끝이 없다. 근대적 성별분업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에서 ‘출산파업’이 그나마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우리나라의 여성과 남성 모두는 나름의 이유로 현재의 젠더질서에 불만이 많다. 고착된 젠더질서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삶의 양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변화 못지않게 일상문화의 변화도 급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성역할 이분법에 기반을 두었던 근대적 젠더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고 ‘개인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삶이란 무엇인가를 가늠하고자 한다. 진보적 삶이란 개인의 삶을 왜곡하는 다층적인 권력관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기존의 삶을 ‘의미있고’‘즐거운’ 형태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이다. 현재의 혼란과 변화 들을 거부하는 반동적인 흐름에 동참하기보다는 이를 더 나은 삶의 형태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존의 젠더관계가 생산해온 삶의 왜곡과 무력감을 진단하고, 유연한 젠더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진단하고자 한다.
2. 은퇴남편증후군
“남편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발진이 돋고 위통이 생겼어요.”
“우리 세대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2006년 11월 영국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
- 서태지는 다음곡 「Victim」에서 ‘여자’란 이유로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당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에 떠도는 ‘여성세력화’라는 이미지 이면에 여아 낙태, 여성 몸에 대한 폭력 등 성별화된 폭력이 만연하는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