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2006

양피지에 기록된 폭력의 역사

 

 

나희덕  羅喜德

시인, 조선대 교수 rhd66@hanmail.net

 

 

쁘리모레비재일조선인으로서 소수자와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대변해온 서경식(徐京植)의 저서들은 다양한 범주와 형식을 지니면서도 일관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미술작품을 다룬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청춘의 사신』에서도, 소년기의 독서편력을 보여준 『소년의 눈물』에서도, 심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실존적 예술 읽기에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들과 불행한 가족사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어른거린다.

근작들에 오면 그의 문제의식이 좀더 뚜렷한 전언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사적인 고백에서 공적인 발화로 확장되어가는 한편 현대사에 대한 비극적 전망은 강화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디아스포라 기행』이 런던, 광주, 카쎌, 잘츠부르크 등을 여행하면서 추방당한 자들의 삶을 되짚어간 기록이라면, 『난민과 국민 사이』는 근대체제의 문제나 일본의 우경화 등 일본과 한국사회에 대한 사유를 비판적으로 개진한 책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삶과 죽음의 궤적을 추적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プリ-モ.レ-ヴィへの旅)』(박광현 옮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딸리아 또리노에서 태어난 쁘리모 레비는 파시스트정부가 공포한 인종법에 의해‘불순물’로 분류되기 전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의식도 별로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화학도였다. 그러나 점차 파시즘에 저항하는 의식을 갖게 된 그는 유격대에 합류했다가 체포되었고, 아우슈비츠에서 지내는 동안 더 확고한 유대인이‘되어갔다’.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온 레비는 자신이 경험한 폭력의 역사를 증언해야 한다는 책무감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썼다. 그리고 화학자의 회고록답게 주기율표 중 21개의 원소명에 붙여진 이야기들로 구성된 『주기율표』(돌베개 2007)도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다. 쁘리모 레비 사후 20주년을 맞아 번역된 이 두권과 함께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트라이앵글의 세 변처럼 서로 잇대어져 있어서 쁘리모 레비의 삶과 아우슈비츠에 대한 관심을 중층적으로 조명해준다.

저자가 쁘리모 레비의 증언에 주목하고 그 폭력의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데에는 디아스포라로서의 동질감 외에도 증언자로서의 연대감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소년의 눈물』 한국어판 서문)이라고 믿는 서경식의 글쓰기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 남긴 침묵과 상처를 읽으면서 그 위에 자신의 개인적 상흔을 겹쳐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그에게 있어서‘읽다’와‘쓰다’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서마다 선택된 대상이나 원텍스트는 각기 다르지만 거기에는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피식민지인 또는 추방당한 소수자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그것은 거듭 쓴 양피지처럼 수많은 상처와 얼룩 위에, 그리고 다중적 언어와 문화적 기반 위에 형성된 것이다.‘양피지 위의 글쓰기’란 원래 여성적 글쓰기가 지닌 이중적 목소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왔지만, 이는 성적 차별에 의한 타자들에 국한된 용어만은 아니다. 인종이나 민족을 매개로 생겨나는 피식민적 주체들의 글쓰기 또한 양피지 위에 기록된 다중적 증언일 수밖에 없다. 이 책 역시 유대인 쁘리모 레비의 삶과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삶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차하거나 결합된 또 하나의‘양피지’다.

흔히 증언문학의 힘은 적나라한 폭로와 증오의 감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하면서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이것이 인간인가』 269~70면)을 사용했다.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증언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진정한 의미의 심판도 가능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기율표』에서는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풍부한 문학적 비유와 서사를 통해 유대인 특유의 낙천적인 유머와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런 점들이 독자로 하여금 끔찍한 증언의 목격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로 나아가게 해준다.

문화적 감각을 통해 정신의 존엄을 지켜내려는 의지는 쁘리모 레비에게 수용소의 공포와 허기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준 힘이었다. 수용소에서‘내일’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에 가깝다. “소각로의 굴뚝을 통해서”만 담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것이 인간인가』 111면)이라고 절규하게 만드는 곳.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레비를 지켜준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물적 의지가 아니라 사물화에 맞서 자신이 인간임을 각성시켜주는 행위였다. 쁘리모 레비는 틈만 나면 동료수인에게 단떼의 『신곡』을 암송해 들려주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오늘의 수프’보다는 오히려 최소한으로나마‘문명의 형식’을 남겨두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경식은 그것을 “과거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주고 “자신의 마음이 아직 기능하고 있음을 확신”(155면)시켜주는 일이었다고 하면서 쁘리모 레비야말로 고난의 항해를 이기고 돌아온‘오디쎄우스’(156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아 적극적인 증언자로서 살아가던 쁘리모 레비가 생환한 지 40년이 지난 어느날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서경식은 그의 자살까지도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270면)으로 보고 있다. 일찍이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많은 생존자가 자살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죄의식’과‘수치’의 감각을 든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에서 촉발된 자살이 “동물이 아닌 인간의 행위”(174면)라는 점, 또한 “삶의 허위를 거두어들인다는”(173면) 점에서 자살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았다. 이런 인식이 잠재해 있다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외부적 상황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즈음에 쁘리모 레비가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을 비판했다가 유대인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던 것, 독일에서‘역사가 논쟁’을 통해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정주의 입장이 대두되었던 것 등도 그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요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예외적 증언자의 삶 못지않게 천착한 것은 유럽 근대문명이 노정해온 총체적 위기다. 그런 점에서‘아우슈비츠’란 우연한 폭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지탱되어온 유럽 근대문명의 자가중독이며 자기파탄”(191면)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야만적인 역사에 대한 무감각이야말로 그 중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문제는‘저편’에 대한 증인이나 증언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이편’의 의도된 무관심과 방관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것이 인간인가』의 출간이 거절당하고 간신히 초판 2500부를 찍은 채 잊혀진 것도 이런 풍토를 잘 말해준다(이 책이 다시 빛을 본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면서였다). 증언된 내용보다 더 참담한 것은 침묵의 역사화가 아무 반향도 없이 묻혀버렸다는 데 있다.

저자가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 느끼는 착잡함 또한 폭력의 기억 자체가 위협당하는‘망각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실감에서 비롯된다. 자신을‘탄광의 카나리아’로 비유한 적이 있듯이, 그의 메씨지는 절박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삽입되는 개인적 기억이나 가족사의 언급이 때로 감상적인 회고의 반복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가해자로서 독일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논리가 좀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양피지 속의 두 얼굴, 서양근대사 속의 쁘리모 레비와 동양근대사 속의 서경식의 삶은 이미 명료하게 분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 그 겹쳐진 얼굴은 우리에게 은폐된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면서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인간의 척도’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