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어둠의 정원과 밤의 문장들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세계

 

 

이철주 李哲周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그림자 필경사: 김소연의 시세계」 등이 있음.

vertigo8558@gmail.com

 

1.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파울 첼란(Paul Celan)의 한 시구를 제목으로 인용한 책1에서,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사사끼 아따루(佐々木中)는 작품을 정보로 환원해 읽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란 곧 명령이다. 놓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그저 열심히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제공하는 정보는 본질적으로 명령과 다르지 않다. 그는 이러한 강박관념에 눈이 멀어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으는 두 전형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꼽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비평가나, ‘한가지’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전문가나, 필터를 끼워 정보로 환원된 무해하고 안전한 명령들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비평이라는 행위 일체와 전문가들의 학술적 논의 전체를 싸잡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가 정보화시대에 굳이 힘주어 문학에서의 ‘정보화’를 비판하는 것은 읽는 행위 자체에 깃들어 있는 본질적 ‘위험함’ 내지는 읽은 대로 살지 않을 수 없는 문학의 불가역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비평과 연구의 무용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명령들에 기도를 바치는 두 손을 자르고, 책 자체의 혁명적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물론 비평은 “단지 스스로를 폐기처분하는 것에 불과한 자기투영적 형식, 다시 말해 텍스트의 생명에 겸허한 자세로 순응하는 것”2이 아니며, “텍스트의 실존적 사실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즉각적인 응답”3도 아니다. 비평은 시대에 따른 문학의 지형도를 그리고 문학에 던져지는 사회적 요청들에 응답하며 문학이라는 담론의 구성적 외부로 기능한다. 작품들을 선별하고 카테고리화하며 아직은 읽을 수 없는 형상들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낸다. 작품들에 내재된 미지의 가능성을 담론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작품의 정보화 역시 발생하기도 하는데, 다만 조심할 점은 이렇게 얻어낸 정보란 오직 비평 속에서만 작동하는, 비평이 붙인 네이밍이라는 사실이다. 작품과 정보의 경계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을 멈출 때 작품이 지닌 섬세한 호흡과 에너지는 작품의 주된 특징만을 명명하는 비평의 담론들에 휘발되어 자체의 위험함을 잃고 유순하게 길들여진 정보가 되고 만다.

물론 텍스트 자체가 비평의 담론과 코드에 기대어 생산됨으로써 작품을 정보화하여 바라보는 일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혁신적인 실험으로 이야기되지만 미학 담론 내부에서는 이미 익숙히 봐온 빈번한 각주나 서브컬처의 항목들을 비롯해 파편화된 문장이나 문화 담론에서 주로 거론되어온 저항전략들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해서, 비평이 평가하고 해석하기에 용이한 단서들을 작품이 직접 내세우고 있다고 해서 특권적 환대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시의 경향을 진단하고 문제적 지점들을 논의하는 문예지 지면에서 이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좀더 면밀한 읽기에 근거하지 않고 평가되는 것이 아쉽게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맥락에 따라 신용목과 김중일의 시를 꼼꼼히 읽어내고자 한다. 하필 이 두 시인을 고른 까닭은 20년 가까운 기간4 동안 이들의 시가 보여준 단단하고도 깊이있는 시세계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단 초부터 이들이 획득한 분명하고도 개성적인 스타일로 인해 오히려 작품이 충분히 입체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다. 2000년대 초 데뷔 무렵에는 두 시인이 미학적 대척점에 서 있다고 평가받았지만, 2010년대를 통과한 지금 이들의 시 풍경은 그렇게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서정적 성찰과 응시를 미학적 관념성과 뒤섞고(신용목), 미학적 모험을 애도와 성찰의 시간 속으로 구부러뜨리며(김중일) 시세계를 단단하고도 풍성하게 다듬었다. 이는 이들의 시를 두고 흔히 언급되는 용산참사와 세월호라는 외부 현실의 문제로 간단하게 치환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시적 변화가 분명한 외적 계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잠재되어 있던 한 경향의 결과라고 보고 그 내적 동력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서정시인의 ‘관념성’과 미래파 시인의 ‘설화성’

 

신용목은 등단 초기부터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이미지와 언어의 조탁에 바탕한 정제된 형식미, 그리고 현실 인식과 상상력의 팽팽한 긴장”5을 갖춤으로써 “서정시의 근본적 세계관과 본질적 조건에 충실”6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소위 미래파 시인들과는 선명한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일부 논자들은 신용목의 시가 서정시의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해왔다. “2000년대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현실의 실감이 상당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같은 서정시끼리 대별하여 보자면 이상할 정도로 관념적인 어떤 세계”라는 박상수의 지적7이나,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금 여기’의 삶에서 발원하는 서정이라기보다는, 시인이 만들어낸 ‘관념’ 덩어리를 미학적 구조물로 형상화했다는 인상을 풍”긴다는 고인환의 지적8은 주목할 만한데, 다만 이 ‘관념성’에 대한 해석을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신용목의 시세계에서 이 불균질한 관념성을 “단숨에 읽히지 않는” “혼돈된 것의 이미지”들로 보고 그 출현을 『아무 날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12) 이후로 보는 의견도 주목할 만하지만9 선뜻 이해되지 않는 관념적 세계는 그의 초기 시에서도 종종 살펴볼 수 있다. 신용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