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정지아 소설집 『행복』, 창비 2004

어떤 세월과의 교신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myosu02@hanmail.net

 

 

행복

정지아(鄭智我) 소설집 『행복』의 중심인물들은 거개가 현재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유폐된 채 고여 있다. 그들의 현재는 이미 오래 전에 소진되어버린 미래, 그 폐사지(廢寺地) 위에 버려져 있다. 혹 그 적요한 폐사지에 영혼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시원한 난타와 청명한 가을하늘의 갑작스런 열림(「행복」,30면)이 아득한 희망이나 위안의 행복한 기원(起源)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그들은 거기에 다시 가닿지 못한다. 「행복」의 화자는 말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놓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서조차 어떤 희망이나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32면) 「미스터 존」의 화자가 들려주는 진술도 있다. “나는 행위하지도 욕망하지도 사고하지도 않고 다만 부유할 따름이므로, 이곳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낯설다. 그것들은 나의 기억이 되지 않는다.”(82면) 그밖에도 많은 인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행복’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에서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빠르겠다.

물론 계속해서 “말라붙은 우물의 깊은 바닥”을 보는 일 따위에 무심해져버린 「그리스 광장」의 화자가 “나는 집에서 길을 잃었다”(136면)고 말하고, 「승리의 날개」에서 “구멍 뚫린 내 마음의 바닥”(169면)이 되풀이 이야기될 때, 우리는 이 내면의 어둠이 실존적 성찰의 자리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은 삶의 충일한 의미를 가로막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모순과 피폐를 음화로 지니고 있다. 또 거기에는 미미하기에 간곡한 열림의 모색과 발견도 있다. 그러나 그 전체에서 삶의 활력이나 전망(딱히 역사적 전망이 아니어도 좋다)과는 심하게 단절된 바닥의 시선이 집요하달 정도로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질문이 솟는다. 이 시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 질문의 입구와 출구에 표제작 「행복」이 있다. 아버지의 희수를 맞아 준비한 동해안 여행. 고등학교 교사인 여성화자 ‘나’의 일인칭시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이 함께한 단출한 가족여행을 기술하고 있는 「행복」에서 소설적 긴장과 감동은 일차적으로 이 여행의 숨은 동반자가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시간이라는 데서 온다.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이었고 박정희정권 때 사상범으로 십여년간 복역한 아버지, 남부군 출신의 어머니. 작가의 첫장편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이 곧장 떠오르는 대목이지만, 「행복」은 그 역사의 존재감에 기대기보다는 비정한 시간의 흐름을 승인하면서 성숙한 소설적 거리를 지켜내기 위해 애쓴다. 그 소설적 노력은 예컨대, 부재하는 행복의 징표로서의 가족사진에 대한 화자의 메마른 시선을 일방적으로 전경화하지 않고 일상의 자잘한 희락(喜樂)을 지키고 모아내려는 남편의 평범하지만 실다운 태도에 그것을 되비추고 조회하는 쉽지 않은 균형 같은 데 섬세하게 살아 있다. 부모님의 생애 역시 역사의 무게나 고난의 심도를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대신, 답답할 정도로 강퍅과 완고를 드러내는 여로의 에피소드들을 조금씩 쌓아가며 혁명의 젊음과 생물학적 늙음이 인간적 위엄과 모종의 비애로 착잡하게 교차하는 지점을 힘들여 찾아낸다. 해서는 그 착잡을 받아적고 있는 화자인 딸의 시선은 시종 흔들리며 질문과 회의를 쏟아낸다. 그리하여 그것은 행복의 거소로서의 가족의 의미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면서 거기에 겹쳐진 지난한 역사적 도전과 좌절, 그리고 그 모두를 껴안고 승패 없는 인간의 깊이에 이른 늙은 부모의 초상을 통해 오늘의 삶을 그 전체에서 묻고 뒤흔드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지점에서 「행복」은 끈질기지 못했다. 그 끈질기지 못함은 여로의 끝에서 부모님의 생애를 “배롱나무 전설”이나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마라톤”으로 조급하게 전유하고 그에 비겨 “도대체 내게는 그런 소망이 있기나 한 것인지”(66면) 빠르게 자문하고 마는 대목에서 특히 안타까운 국면을 드러낸다. 이러한 성마른 타협은 전체 여로의 진득한 풍경과도 어울리지 않거니와 사태의 복잡한 연관을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그 포착하기 힘든 움직임의 진실을, 고통스럽지만 현실의 모순 속에 남겨두는 진정한 소설적 질문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상투적 비유에 투항하는 사유의 중단이기 쉽다. 배롱나무 전설이나 추상적 유토피아를 이해의 가운데 두는 순간, 부모님의 생애를 채워온 시간의 역사성은 한껏 뒤로 물러나고 아득한 마음의 지평만이 남을 뿐이다. 수다한 굴곡은 있었지만 ‘후평 후퇴’ 이후에도 역사의 진전은 있었고, 부모님 역시 침침한 눈과 귀일망정 신문이며 뉴스를 놓지 않은 채 그 이후의 세월을 살아냈고, 여전히 살고 있다. 그것은 가령,“혁명가답게 넘헌티 신세 안 지고 똑바로 사는 것도 통일운동에 일조허는 것이여”(61면) 같은 아버지의 일갈에서 특히 생생하다. 혹은 동일 인물임에 분명한 「민들레 화분」의 늙은 아버지가 시골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겪는 자존심의 수난과 그 의연한 처리에 더욱 뚜렷하다. 이는 ‘지나간 미래’로 현재를 끝없이 유보해나가는 유토피아의 책략이나 배롱나무 전설의 그것처럼 소망 그 자체의 절대적인 무게로 무화시킬 수 없는 현실의 아름다움이자 위엄이다.‘행복’에 대한 화자의 오래된 이물감을 이해하면서도 화자의 내면에 드리운 어둠의 농도가 조금은 걷혔으면 싶은 것도 그래서다. 교사가 된 첫해 가을, 문예반 학생들과 함께 맞닥뜨린 진전사 폐사지의 그 맑은 풍경은 화자의 자조―“그러나 그 한순간의 경험이 아이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고, 나 역시 조금 색다른 선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31면)―처럼 그렇게 미미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운포나 후평이 그러한 것처럼, 언젠가 산동네 골목에서 내민 남편의 넓고 따뜻한 등이 그러한 것처럼 유보할 수 없는 행복의 현재여야 한다. 그 지속과 펼침의 당연한 좌절과 시련을 위계 없는 등거리의 시점에서 포착하는 순간, ‘가족사진’의 참된 역사성이 추구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기실 “어머니를 끝내 버티게 해준 그 무언가를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65면)고 안타깝게 토로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자 혹은 화자의 세대가 어머니의 시간에 대해 갖춰야 하는 역사의 예의를 생각한다면 아직은 더 유보해두어야 할 숙제인지도 모른다. 머나먼 이국땅, 시간의 열외 지대에 웅크린 채 정보기관에서 겪었던 자기모멸의 기억을 휘발시키며 살아가는 「미스터 존」의 주인공이 마침내 하숙집 주인과의 희미한 교신에 이르기까지 서로간 삼엄한 예의와 배려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승리의 날개」나 「고욤나무」에서 드러나는 작은 열림의 순간들이 저마다의 심해(深海)에 대한 오랜 긍정의 수고를 요구했던 것처럼, 「행복」은 다만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세월과의 교신에 이르기 위한 조심스런 첫걸음이며 지극한 낮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작가 정지아에게는. 『빨치산의 딸』은 이제 씌어지기 시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