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
최근 시에서 ‘노동’은 어떻게 존재/부재하는가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가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민중’의 사라짐, 자본주의의 역습
그 많던 민중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방 한 칸’(김사인)과 인간다운 세상을 열망하며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이성부 「벼」), 진보하는 역사의 주체였던 민중들은. 80년대에 민중은 개별자의 총합 이상의 거대한 실체였고, 역사의 진정한 추동력이었으며, 간단히 기표화될 수 없는 살아있는 실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민중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그 전모를 낱낱이 실사(實寫)하고자 한 고은(高銀)의 「만인보」 기획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역사의 판관은 민중이 이념의 시대에 명멸한 강력한 신념과 상상의 공동체였음을 선포했다. 짧은 시간에 민중은 지나간 과거의 회색빛 풍문이 되었다. 총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독재정권이 아닌, ‘민중’에 대한 시차(視差/時差)와 회의가 민중을 공중분해한 것이다. 대신 그 자리는 시민, 대중, 다중, 소비자, 네티즌, 겨우 존재하는 파편화된 개인들—범주가 착종된, 불확실한 집단/주체(?)들—로 채워졌다. 더불어 민중에 의해 추동되어야 할 발전적인 역사의 사건들은 대중이 주연하는 달콤하고 무시간적인 상업적 ‘이벤트’로 대체되었다. 이벤트의 진짜 주체는 자본이며, 사상 유례없이 강력해진 자본주의의 체계다. 그 속에서 상업전략과 정치·사회·문화 정책, 조작된 현실원칙의 작동과 창조적인 예술활동, 상품과 작품의 실현과정 사이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역사의 종언, (근대)문학의 종언, 근대적 주체의 파산, 동일성의 서정적 주체의 퇴조 등 일련의 ‘최후의 담론’이 인문학의 영토에서 번성한 것은, 80년대가 그토록 타파하고자 한 계급적·구조적 모순의 모체(母體)인 자본주의가 행한 역습의 와중에서였다.
현실사회주의를 패퇴시킨 자본주의의 역습의 와중에서 ‘민중’은 해방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마치 마술과도 같이. 그러나 사라진 것은 민중의 낱낱의 실체가 아닌, 민중의 명칭과 이념이었다. 민중의 구성원들, 즉 계층과 노동조건과 삶의 방식에 따라 통합되고 분류된 수많은 개별자들은 현존했고, 이들의 삶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합리 역시 형태를 달리하며 심화되었다. 이 기묘한 역사적 재배치에 대한 문학의 대응방식은 매우 온유한 것이었다. ‘민중’이 특정시대의 한 ‘현상’으로 공인되기 시작하자, 민중문학은 순순히 자신의 미래를 반납했다. 결과는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었고, 인과관계의 적절성은 의심되지 않았다. 그후 십여년이 흐른 지금, 그렇다면 소위 ‘포스트 민중문학’ 시대의 임무의 하나는 새로운 혹은 다른 방식으로 민중문학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데 있을까? 답은 ‘예 그리고 아니오’이다. 민중문학이 갖는 현재성을 인식하고 독려하는 차원에서는 ‘예’이며, 민중문학이 누린 과거의 권위를 예우하는 차원에서는 ‘아니오’이다.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주체의 속성과 존재방식이 민중의 시대와는 달라진 상황에 있다. 현실의 변화 속도와 주체의 변전(變轉) 양상이 주체를 구(求/究/救)하려는 노력을 앞서거나 무력화할 때(지금이 그러한 상황인데), 그 속에서 정립된 주체는 또 하나의 허구와 상상(그것도 과거형의)의 산물이 되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중문학의 곤경을 포함해 자본의 회로에 포위된 문학의 현실을 돌파하는(‘주체’를 구하는 일에서도) 가능하고 생산적인 방법은 미확인의 ‘주체’보다 확인 가능한 ‘사건’과 ‘행위’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된다.
촛점의 하나는 자본의 회로 속에서 주체를 (비)주체로 만드는 중요한 사건/행위인 ‘노동’이다.1 민중문학의 현재성을 논할 자리도 ‘민중’이라는 요령부득의 주체보다 ‘노동’이라는 지속되는 행위를 중심에 둘 때 좀더 넉넉해지게 된다. 21세기에도 노동은 인간과 삶의 변함없는 토대이며, 이로 인해 ‘민중’이라는 이념의 주체는 폐기될 수 있어도 ‘노동자’라는 행위의 주체는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의 정체성과 노동환경, 노동의 성격 등은 전 시대와는 많은 차이를 갖게 되었다. 정보화시대의 비물질노동을 연구하는 라짜라또(M. Lazzarato)에 의하면, 오늘의 세계에서 “세계, 노동자들, 소비자들 및 써비스들은 사건(이벤트)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사건들에 의해 산출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영혼까지 생산한다는 말은 더이상 수사나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본의 물질적이고 규격화된 이벤트에 맞서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과 사물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사건/행위는 여전히 ‘노동’이다〔들뢰즈가 한사람이 지닌 존재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라고 정의한 ‘정동(情動, affectus)’의 개념에 기초해,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사회적 주체성과 삶능력(biopower)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 ‘정동적 노동’, 라짜라또가 주체성과 경제적 가치를
- 또다른 방법은 주체에게 일어나는 실시간의 사건, 즉 혼돈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며 ‘얼굴’을 바꾸는 주체의 변전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다. 이는 무정형/미정형의 복수와 미완의 주체로 거듭나면서 무의식까지를 가로지르는 내면의 모험이자 감각적·미학적 투쟁의 길이 된다. 최근 각광받는 젊은 시인들, 황병승, 김행숙, 이민하, 김근, 김민정, 장석원 등의 지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이 감각을 자산으로 삼는 까닭은, 주체의 변형과정에서 주체가 주체로서 최후까지 소유하는 것이 감각이며 최초로 발산하는 것 역시 감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감각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라짜라또는 현대사회에서 표현되고 실효화되는 주체성들, 즉 감각적인 것의 창조와 실현은 경제적 생산에 선행하며, 현재 지구적 규모로 수행되는 경제 전쟁은 사실상 ‘미학적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젊은 시인들이 생산하는 낯선 감각과 미학은 자본주의의 ‘미학적 전쟁’에 대한 참전 혹은 응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와 주체성을 스스로 확보하고자 하는 이 의연한 개인들은 ‘감각과 미학의 1인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파편화·개인화·감각화·미학화한 ‘포스트 민중시대’의 개별자들은 집단의 이념과 멀어진 곳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