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신경숙

신경숙 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리진』 『바이올렛』 『외딴방』, 소설집 『종소리』 『감자 먹는 사람들』 『풍금이 있던 자리』 등이 있음.

 

 

장편연재 1

엄마를 부탁해

 

 


│연재를 시작하며│

 

몇해 전에 지금은 타계한 화가의 작업실에 가본 적이 있다.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생겼지만 그분이 작업실로 사용했을 땐 텅 빈 벌판이었다고 한다. 외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환기창만 몇개 뚫려 있을 뿐 창문 하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이 아주 높아 답답하진 않았다. 튼튼한 무쇠난로가 중앙에 우직하게 버티고 있을 뿐 기본적인 공간 분리도 되어 있지 않았다. 컨베이어만 없지 공장이나 창고 같았다. 딱딱한 의자 두세개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불편해 앉고 싶지 않았다. 초봄이었는데 냉기가 휘돌아서 나도 모르게 옷을 추슬렀다. 자제분이 무쇠난로에 구워주는 떡을 선 채로 받아 먹으며 동행한 분의 얘기를 들으니 생전의 그분은 작업실에 편한 것은 일절 두지 않았다 한다. 자신을 텅 빈 벌판에 홀로 세우고 편한 의자 하나 제공하지 않았던 마음이 짚어져서 경건해졌던 순간이 생각난다.

어머니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6년 전이다. 특이한 이야기를 쓰려는 것도 아닌데 시작을 했다가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멈추고 다시 시작하기를 몇차례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접어두고 다른 장편을 썼다. 글을 쓰다가 멈추고 다른 글 속으로 건너가자니 캄캄한 어둠속에 누군가를 혼자 두고 온 기분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6년 전에 시작해두었던 것을 펼쳤다. 이어 쓸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두 계절 동안 진전이 없었다.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했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토록 어머니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어려웠던 것은 내가 은연중 나의 글쓰기를 통해 이 시대의 어머니상을 그려보려고 했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이 생기니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던 그 힘은 글을 쓰게 하기는커녕 나를 좌초시켰다. 다시 쓰기로 하면서 이전에 써두었던 것을, 그에 관한 자료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로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마음을 내다버렸다. 그러고 나니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나도 모르게 되었다. 다시 첫 문장에 다가가기 위한 싸움을 해야 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지우지 못한 글을 이어가다 다시 지웠다. 그러다가 어느날‘어머니’를‘엄마’로 고쳐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엄마로 고치고 나니 바로 첫 문장이 이루어졌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 첫 문장이 나를 이 길의 끝에 무사히 데려다주기를, 그곳에 우리가 잃어버린 엄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온전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1장 또다른 여인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오빠 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 궁리 끝에 전단지를 만들어 엄마를 잃어버린 장소 근처에 돌리기로 했다. 일단 전단지 모델 초안을 짜보기로 했다. 옛날 방식이다.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실종신고를 내는 것, 주변을 뒤지는 것, 아무나 붙잡고 이런 사람 보았느냐 묻는 것,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던 남동생이 인터넷에 엄마를 잃어버리게 된 동기와 잃어버린 장소와 엄마의 사진을 올리고 비슷한 분을 보게 되면 연락을 해달라고 게시하는 것. 엄마가 갈 만한 곳이라도 찾아다니고 싶었으나 이 도시에서 엄마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 문안 작성은 네가 해라, 오빠가 너를 지명했다. 글을 쓰는 사람. 너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귀밑이 붉어졌다. 과연 네가 구사하는 어느 문장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

 

1938년 7월 24일생이라고 엄마의 생년월일을 적는데 아버지가 엄마는 1936년생이라고 했다. 주민등록상에만 38년으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36년생이라는 것이다. 너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진 그 시절엔 다 그렇게 했다고 했다. 태어나서 백일을 못 넘기고 죽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삼년 키워본 다음 호적에 올렸다는 것이다. 38이라는 숫자를 36이라고 고쳐 적으려는데 오빠가 신상명세서이니 38년생으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이건 우리가 만드는 전단지이고 여기가 동사무소나 구청도 아닌데 사실보다는 등록된 것을 적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너는 묵묵히 36이라 적었던 숫자를 다시 38로 고쳤다. 그러면 7월 24일이라는 엄마의 생일은 제대로 된 것일까? 생각하면서.

 

너의 엄마는 몇해 전부터 내 생일은 따로 지내지 마라, 했다. 아버지의 생일이 엄마의 생일 한달 전이었다. 예전엔 생일이나 다른 기념할 일이 생기면 너를 비롯한 도시의 식구들이J시의 엄마 집으로 이동하곤 했다. 다 모이면 직계만 스물둘이었다. 엄마는 식구들이 모이는 왁자한 상태를 좋아했다. 식구들이 모이게 되면 며칠 전에 새 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끊어오고, 치약과 칫솔 들을 준비했다. 돌아갈 때 한병씩 나눠주려고 참기름을 짜고 참깨 들깨를 따로 볶아 찧었다. 가족들을 기다릴 즈음의 너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나 시장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할 때면 단연 활기를 띠었고 은근히 자부심이 배어나는 몸짓과 말투를 사용했다. 헛간에는 엄마가 철따라 담가놓은 매실즙이며 산딸기즙이 담긴 크고 작은 유리병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식구들에게 퍼줄 황세기젓이며 멸치속젓이며 조개젓갈들이 엄마의 항아리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양파가 좋다는 말이 들리면 양파즙을 만들어서, 겨울을 앞두고는 감초를 넣은 늙은호박 즙을 짜서, 도시의 식구들에게 보냈다. 너의 엄마의 집은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되는 공장과도 같았다. 장이 담가지고 청국장이 발효되고 쌀이 찧어지는. 언제부턴가 도시 식구들이J시에 가는 일보다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엄마의 생일도 도시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걸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움직임이 단출하긴 했다. 급기야 엄마는 내 생일은 아버지와 함께 쇠자, 했다. 한여름이라 날도 더운데다 이틀 사이로 지내야 하는 여름 제사가 두번이나 되는데 그 틈에 언제 두 생일을 다 챙기겠느냐고 했다. 처음에 너의 가족들은 엄마가 그리 주장해도 그게 무슨 소리냐며 엄마가 도시에 오지 않으려고 하면 몇몇이라도 시골집에 내려가 엄마의 생일을 챙기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생일에 엄마의 선물까지 함께 사기 시작했고 엄마 생일 당일은 슬그머니 지나가게 되었다. 식구들의 숫자대로 양말을 사기 좋아했던 엄마의 장롱 속엔 가져가지 않은 양말들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름: 박소녀

생년월일: 1938년 7월 24일생(만 69세)

용모: 흰머리가 많이 섞인 짧은 퍼머머리, 광대뼈 튀어나옴. 하늘색 셔츠에 흰 자켓을 입고 베이지색 주름치마를 입었음.

잃어버린 장소: 지하철 서울역

 

엄마의 사진을 어느 걸 쓰느냐를 두고 의견들이 갈라졌다. 최근 사진을 붙여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했지만 누구도 엄마의 최근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너는 언제부턴가 엄마가 사진 찍는 걸 매우 싫어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엄마는 어느 틈에 빠져나가,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면 엄마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칠순 때 찍은 가족사진 속의 엄마의 얼굴이 사진으로 남은 가장 최근 모습이었다. 그때의 엄마는 물빛 한복을 입고 미장원에 가 업스타일로 머리를 손질하고 입술에 붉은 빛이 도는 루즈를 바른,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사진 속의 엄마는 실종되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그 사진을 따로 확대해 붙여본들 사람들이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것이 네 남동생의 의견이었다. 인터넷에 엄마의 그 사진을 올렸더니 어머님이 예쁘시네요, 길을 잃어버릴 분 같지 않은데요,라는 댓글이 올라온다고 했다. 너희는 각자 엄마의 다른 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오빠는 너에게 문구를 더 보충해보라고 했다. 네가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보다 호소력 있는 문구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호소력 있는 문구. 어머니를 찾아주세요,라고 쓰니 너무 평범하다고 했다. 어머니를 찾습니다,라고 쓰니 그게 그거고 어머니라는 말이 너무 정중하니 엄마,로 바꿔보라고 했다. 우리 엄마를 찾습니다,라고 쓰니 어린애스럽다고 했다. 윗분을 보면 꼭 연락 바랍니다,라고 쓰자 오빠가 넌 대체 작가라는 사람이 그런 말밖에 쓸 수 없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빠가 원하는 호소력 있는 문구가 무엇인지 너는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호소력이 따로 있어? 사례를 한다고 쓰는 것이 호소력이야, 둘째오빠가 말했다. 사례를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쓰자 사례를 섭섭지 않게? 이번엔 올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수를 적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 그럼 얼마를 적을까요?

- 백만원?

- 그건 너무 작아요.

- 삼백만원?

- 그것도 작은 것 같은데?

- 그럼 오백만원.

오백만원 앞에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너는 오백만원의 사례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오빠가 사례금: 오백만원이라고 고치라고 했다. 남동생이 오백만원이라는 글자를 다른 글자보다 키우라고 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엄마의 사진을 찾아보고 적당한 게 있으면 바로 너의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전단지의 문안을 더 보충해서 인쇄하는 일은 네가, 그것을 각자에게 배송하는 일은 남동생이 맡기로 했다. 전단지 나눠주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로 구할 수도 있어, 네가 말하자, 그건 우리가 해야지, 오빠가 말을 받았다. 평일엔 각자 일을 하는 사이 틈틈이, 주말엔 모두 다함께. 그렇게 언제 엄마를 찾아? 네가 투덜거리자, 오빠는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있어, 이건 가만있을 수 없으니까 하는 일이다,고 했다. 해볼 수 있는 일 뭐? 신문광고. 신문광고가 해볼 수 있는 일의 다야? 그럼 어떻게 할까? 내일부터 모두 일을 그만두고 이 동네 저 동네 무조건 헤매고 다닐까? 그렇게 해서 엄말 찾을 수 있다고 보장만 되면 그리 해보겠다. 너는 오빠와의 실랑이를 그만두었다. 지금까지의 습성. 오빠니까 오빠가 어떻게 해봐라!고 늘 미루는 마음이었던 습성이 이런 상황에도 작동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의 가족들은 오빠 집에 아버지를 두고 서둘러 헤어졌다. 헤어지지 않으면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줄곧 그래왔다. 엄마의 실종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상의하러 모였다가 너의 가족들은 예기치 않게 지난날 서로가 엄마에게 했던 잘못된 행동들을 들춰내었다. 순간순간 모면하듯 봉합해왔던 일들이 툭툭 불거지고 결국은 소리를 지르고 담배를 피우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얘길 처음 듣자마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구들 중에서 서울역에 마중 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 그런 너는?

나? 너는 입을 다물었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조차 나흘 후에나 알았으니까. 너의 가족들은 서로에게 엄마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으며 스스로들 상처를 입었다.

 

오빠의 집에서 나온 너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너의 엄마가 사라진 지하철 서울역에서 내렸다. 엄마를 잃어버린 반대편 자리로 가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네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엄마 손을 놓친 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네 어깨를 앞에서 뒤에서 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의 엄마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던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갔을 것이다. 네가 도시로 가기 위해 엄마 곁을 떠나기 며칠 전 엄마는 너의 손을 잡고 시장통 옷가게로 갔다. 네가 아무 장식이 없는 민짜 원피스를 고르자 엄마는 어깨와 치마끝단에 프릴이 달린 것을 네 앞에 내밀었다. 이거 어떠냐! 너는 에이…… 하며 밀쳤다. 왜? 입어보렴. 그때만 해도 젊었던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릴 달린 원피스와 엄마가 머리에 쓰고 있는 때 전 수건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대조적이었다. 유치해요. 내 말에 엄마는 그러냐? 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지 자꾸만 원피스를 앞뒤로 살폈다. 내가 너라믄 이걸 입어보겠구만. 유치하다고 말한 게 미안해서 그건 엄마 취향도 아니잖아, 했을 때 너의 엄마는 아니다, 엄만 이런 옷이 좋아, 입을 수 없었을 뿐이다, 했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은 어디까지일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엄마가 곁에 있을 땐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들이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통에 너는 엄마 소식을 들은 후 지금까지 어떤 생각에도 일분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기억 끝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후회들. 그때 그 옷을 입어라도 볼걸, 너는 어쩌면 너의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지도 모를 자리에 무릎을 접고 앉아보았다. 기어이 네가 원하는 민짜 원피스를 고른 며칠 후에 너는 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너를 서울에 데려다주러 온 엄마는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빌딩도 무찌를 듯한 걸음걸이로, 오가는 인파 속에서도 너의 손을 꼭 잡고 광장을 걸어가 시계탑 밑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그 엄마가 길을 잃다니. 지하철이 들어오는 불빛이 보이자 사람들이 몰려들다가 앉아 있는 네가 걸리적거리는지 힐끔거렸다.

 

너의 엄마가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았던 그때 너는 중국에 있었다. 북경에서 열린 북페어에 동료 작가들과 함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너의 엄마를 지하철 서울역에서 잃어버린 그 시간은 네가 북페어전의 한 부스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네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 아버지는 왜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탔어요! 지하철만 안 탔어도!

아버지는 기차역이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어 굳이 택시를 타러 나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모든 일은, 특히 나쁜 일은 발생하고 나면 되짚어지는 게 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싶은 것. 가족들은 왜 다른 때와 달리 아버지 엄마가 둘이서 오빠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을 따랐을까. 가족 중 누군가 서울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로 아버지나 엄마를 마중 나가는 것은 늘 당연한 일이었는데. 도시에서 어딘가로 이동할 때면 가족들의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던 아버지는 왜 그때 지하철을 탈 생각을 했을까. 너의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타려고 했다고 했다. 너의 아버지가 지하철을 타고 보니 엄마가 없었다고 했다. 하필 번잡한 토요일 오후였다. 너의 엄마는 인파에 떠밀려 아버지 손을 놓쳤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지하철이 출발해버린 것이다. 엄마의 가방은 아버지가 들고 있었으므로 너의 엄마가 빈손으로 지하철역에 혼자 남았을 때 너는 북페어 전시장을 나와서 천안문광장으로 가고 있었다. 북경엔 세번째 걸음인데도 천안문광장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버스 안에서 승용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곳이었다. 안내를 맡은 학생은 저녁때까지 시간이 남으니 천안문광장에 가보겠느냐고 했고 너의 일행들은 그에 따랐다. 네가 택시를 타고 자금성 앞에서 내렸을 때, 지하철 서울역에 혼자 남은 너의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자금성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너의 일행은 되나왔다. 북경은 온 도시가 공사중이었다. 이듬해에 있는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금성도 일부분만 개방되고 공사중인데다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늙은 푸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자금성에 돌아와 궁 안을 구경하는 어린 관광객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옥좌에 숨겨놓은 귀뚜라미 상자를 꺼내 보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뚜껑을 여니 그때까지도 살아 있던, 푸이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귀뚜라미. 네가 천안문광장으로 건너가려고 했던 그때에 너의 엄마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인파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까. 누군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자금성과 천안문광장을 이어주는 길도 공사중이었다. 광장은 바로 앞에 보였지만,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고 통과한 뒤에야 그곳에 서게 되었다. 너의 엄마가 지하도 안에서 뭔가 체념한 듯 주저앉았을 때, 네가 천안문광장 하늘 위에 떠 있는 연들을 보고 있었을 때, 어쩌면 너의 엄마는 네 이름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천안문의 철문이 열리고 일개 분대는 될 듯한 공안원들이 다리를 높이 들며 행진해서 오색홍기를 내리는 하강식을 구경하고 있을 때, 너의 엄마는 지하철 서울역 구내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던 듯하다. 그때의 너의 엄마를 보았다는 역 구내 사람들의 증언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들은 너의 엄마로 추정되는 한 늙은 여인이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걸, 간혹 주저앉아 있는 걸, 에스컬레이터 앞에 하염없이 서 있던 걸 보았다고 했다. 너의 엄마인 듯한 한 늙은 여인이 오래 역에 앉아 있다가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는 걸 봤다는 이도 있었다. 너의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밤에 너는 일행들과 밤택시를 타고 북경의 휘황한 먹자거리에 나가 붉은 불빛 아래서 오십육도쯤 되는 중국술을 맛보며 붉은 기름에 볶은 뜨거운 게요리를 먹고 있었던 거다.

 

너의 아버지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엄마와 헤어졌던 지하철 서울역으로 다시 가보았으나 너의 엄마는 없었다고 했다.

- 아무리 지하철을 못 탔기로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어요? 안내판이 다 붙어 있는데. 어머닌 전화 걸 줄도 모르시나? 공중전화로 전화 한통만 걸면 되는데.

올케는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고 아들 집을 찾지도 못하느냐며 엄마에게 다른 일이 생긴 거라고 했다. 다른 일? 그것은 엄마를 어떻게든 예전의 엄마로 여기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엄마는 길을 잃을 수 있어, 네 말에 올케는 눈을 빤히 떴다. 언니도 알잖아, 엄마가 어떤 상탠지? 올케가 나는 모르는데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알았다. 엄마가 어떤 상탠지. 엄마가 이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엄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너는 언제 알았을까.

 

네가 처음 쓴 편지는 엄마가 도시로 나간 오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받아적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너의 오빠는 우리가 태어난 마을이 속해 있는 소읍에서 정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년 동안 혼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 뒤에 발령을 받아 도시로 나갔다. 자신이 낳은 자식과 엄마의 첫 작별이었다. 전화가 없던 그때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도시로 간 오빠는 편찰지에 큼직큼직한 글씨로 엄마에게 편지를 써보내곤 했다. 너의 엄마는 오빠의 편지가 도착하는 날을 귀신같이 알았다. 그 마을엔 오전 11시쯤 우편배달부가 커다란 가방을 자전거 앞에 매달고 오곤 했다. 오빠의 편지가 오는 날엔 엄마는 밭에 있다가도 도랑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집에 들어와 우체부가 전해주는 오빠의 편지를 직접 받곤 했다. 그러고는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너를 뒷마루로 데리고 가서 오빠의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큰 소리로 읽어보라, 했다. 집을 떠난 너의 오빠의 편지는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되었다. 편지 쓰기의 방식을 교과서에서 배운 듯이 너의 오빠는 시골집의 안부를 묻고 도시에 있는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번 당숙모에게 갖다주면 당숙모가 빨아준다고 씌어 있었다. 엄마가 당숙모에게 간곡히 당부한 일이었다. 밥은 잘 사먹고 있고, 동사무소의 숙직실에서 당번을 서주는 일로 숙소도 얻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오빠는 이 도시에 나오니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고 썼다. 꼭 성공해서 언젠가는 엄마를 편하게 해줄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스무살이던 오빠는 능청스럽고 늠름하게도 그러니 어머님, 제 걱정은 마시고 아무쪼록 어머님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라고도 썼다. 오빠의 편지를 큰 소리로 읽다가 네가 편찰지 너머로 엄마를 넘겨다 보면 너의 엄마는 뒤란의 토란대나 장항아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편지를 읽어주는 너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너의 엄마의 귀는 토끼 귀처럼 쫑긋 세워져 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후면 너의 엄마는 너에게 엄마가 부르는 말을 편찰지에 적으라고 했다. 엄마가 불러주는 첫마디는 형철이에게였다. 형철은 너의 첫째오빠의 이름이었다. 너는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형철이에게라고, 오빠 이름을 적었다. 엄마가 마침표를 찍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이름 뒤에 점 하나를 찍었다. 엄마가 형철아라고 부르면 너는 형철아!라고 적었다. 할 말을 잊은 듯이 엄마가 형철아 부른 뒤에 침묵을 지키면 너는 쏟아지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긴 뒤 볼펜을 든 채로 귀를 쫑긋 세우고 편찰지를 들여다보며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씨가 차졌구나,라고 불러주면 너는 날씨가 차가워졌구나,라고 썼다. 형철이에게라고 불러준 뒤 엄마의 다음 말은 날씨에 관한 것이었다. 여긴 봄이 와서 꽃이 피었구나. 여름이 시작되어 논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추수철이라 논두둑에 콩이 가득이다. 엄마가 사투리를 쓰지 않을 때는 오빠에게 전할 말을 불러줄 때뿐이었다. 아무쪼록 여기 걱정은 말고 네 한몸 건사 잘하길 바란다. 어미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형철이에게로 시작되었던 너의 엄마의 말은 네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서 어미가 미안하다,로 감정의 급물살을 탔다. 네가 편찰지에 또박또박 엄마의 말을 받아적을 때 너의 엄마의 손등엔 굵은 눈물이 툭, 떨어지곤 했다. 너의 엄마가 불러주는 마지막 말은 늘 똑같았다. 아무쪼록 밥은 굶지 말고 다니거라. 엄마가.

 

너는 그 집의 넷째아이였으므로 네 위의 세 형제들이 집을 떠날 때마다 엄마가 겪는 작별의 슬픔과 고통과 염려를 지켜보았다. 첫째오빠를 보내고선 너의 엄마는 장독대의 장항아리를 새벽마다 닦았다. 우물이 앞마당에 있어서 물을 길어오기만도 힘든 일이었는데 뒤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항아리들을 하나하나 다 닦았다. 뚜껑도 열어 앞뒤로 윤이 나도록 닦았다. 행주질을 하는 너의 엄마의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손은 연신 찬물에 행주를 담갔다가 꺼내고 비틀어 짜고 항아리 사이를 오가느라 바쁜데 너의 엄마 입에서는 어느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가 흘러나왔다. 그때 네가 엄마! 하고 부르면 뒤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