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엄마’의 시대적 진실을 찾아서

『엄마를 부탁해』론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근대극복의 이정표들』, 역서로 『지식의 불확실성』 『근대화의 신기루』(공역)등이 있음. jatw19@moiza.chonnam.ac.kr

 

 

1. 들어가며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를 읽고 오랜만에 신경숙(申京淑)의 1990년대 작품들을 다시 살피면서 그에게‘소설’이란, 결국 한 인간이 살면서 맺어지거나 끊어진 숱한 인연들을 기억하며 복기(復棋)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인 한, 기억과 복기의 과정에서 사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상당수 작품이 『외딴방』(전2권, 문학동네 1995)처럼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자주 놓이는 것은-당연하리라는 생각도 새삼 했다. 피붙이 또는 살붙이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운명적 만남과 그런 만남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진실이 소설이 다루는 본래 영역 가운데 하나라면 신경숙이야말로 그 공동체의 영역을 정성스레 지키고 가꾸는 우리시대의 드문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러나 지금은 가부장적 가족체제는 형해(形骸)만 남았으되 그것을 대체할 바람직한 가족모델은 거의 전무한 시대다. 조부·조모와 오순도순 사는 3대 가족은 이젠 마치 원형 복원이 불가능해진 고분(古墳)처럼 보인다. 첫 소설집 『겨울우화』(고려원 1990)의 해설에서 정효구는 “신경숙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적 관계는 지극히 전통적이며 한국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적은바(307면), 그렇다면 “가족들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때마다 그 집의 재래식 부엌으로 들어”가곤 했던(『외딴방』 2권 170면) 어머니가 비로소 그‘실체’를 드러낸 『엄마를 부탁해』야말로 적어도 그런 맥락에서는 전통적·한국적·전근대적이라는 형용어가 딱 어울리는, 이를테면 탈가족화시대의1‘반시대적인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이는 개인이라는 이름이 모든 집합적 가치와 대등해지고 심지어 그보다 우월해진 우리시대의 개인주의 정서를 『엄마를 부탁해』가 거스르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엄마를 부탁해』가 그러한 정서를 거스르기만 하는가도 앞으로 더 생각해보겠지만 신경숙의 소설세계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팎에 스민 시대의 현실이 부각된 지는 사실 오래이다. 장편만 기준으로 해도 『외딴방』을 비롯해 1970년대와 80년대의 억압적 정치현실이 기억 뒤편에 자리잡은 순결한 청춘들의 비극적 애증을 기록한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나 가족의 파괴적인 해체로 인해 사회로 내몰린 개인들의 금지된 욕망과 내밀한 상처를 보듬는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 망국이라는 역사의 비극에 휘말린 한 무희(舞姬)의 정신적 궤적을 상상적으로 재현한 『리진』(문학동네 2007) 등이 그렇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서사적 고향이랄 수 있는 가족으로 회귀한 셈이다. 그간 신경숙의 작품을 애독해온 독자라면 이 회귀가 갑작스런 것도 아닐뿐더러 도시화된 자아에 대한 되돌아봄의 성격을 늘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런 회귀와 되돌아봄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신경숙 소설세계의 진전을 뜻하는 것인가도 물어봄직하다.

 

 

2. ‘되돌아온 감옥’ 대 ‘순수-증여의 실천적 전위’?

 

2008년 11월에 출간된 이후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소설시장의 현황에 비추어보면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고 자체도 상당히 이례적이지만 1985년에 등단한 신경숙 자신의 적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독자의 관심을 이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받은 예는 없었지 싶다. 알다시피 전지구적 경제위기가 가시화된 시점에 나온 『엄마를 부탁해』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나선 한 가족의 애끊는 이야기다. 얼핏 이와 유사한 가족서사로는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몬 1997년 외환위기 때‘아버지 씬드롬’을 일으킨 김정현의 『아버지』 같은 소설도 생각나는데, 『엄마를 부탁해』의 출간으로 목하‘어머니 씬드롬’이다.

1997년 당시에도 그랬지만 『엄마를 부탁해』라는‘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 평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해석틀은 일종의 문학사회학적인 것이다. 어떤 작품이 당대 독자들에게서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다면 독자들의 현실과 작품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연관짓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문학사회학적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다문화가정을 비롯한‘나홀로 가족’, 가령 씽글맘, 기러기아빠, 독거노인 등 2000년대 한국의 무시 못할 가족형식에서 『엄마를 부탁해』가 발휘하는 대중적 호소력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도 그렇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안전망이 극히 부실한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구성원을 보살피는 자의 대명사는 여전히 어머니인바, 『엄마를 부탁해』가 조명되는 것은 대개는 바로 그런 맥락이다. 실제로 몇몇 문학기자들은 신경숙을 비롯해 공지영, 하성란, 조경란, 서하진 등의 최근 작품을 한데 묶어‘가족서사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그리움과 정겨움이 묻어나는‘엄마’가 경기불황의 해결사로”2 뜨는 현상을 모성을 중심으로 쟁점화한 바 있다.

그런 식으로 형성된 쟁점을 평단에서 여성주의의 방향으로 더 키운 논자는 강유정(姜由楨)이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엄마는 현존하는 핍진한 70대 여성이라기보다는‘진정한 엄마’로 상상된 이미지에 가깝다. (…) 잃어버린 것을 증명하는 실체 그것이 바로 신화가 아니었던가? 잃어버린 무엇,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인 모성, 신화로서의 모성적 공간은 그러한 가치들이 가능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직접 내통한다. 우리는 실종된‘엄마’그리고 엄마의 신화적 가치를 추억하며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잊는다. 부재한 엄마에 대한 애도가 위기에 처한 가족에게 신화적 구원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되돌아온 감옥, 모성적 신화의 실체인 셈이다.3

 

비판의 신랄함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경숙의 신작(『엄마를 부탁해』-인용자)을 놓고 통속소설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비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의 부활이라기보다는 몰락을 의미한다”라고 말한 조영일을 들어야겠지만,4‘엄마’를 상상적 허구로 단정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사실상 현실을 호도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한 강유정의 신랄함도 따지고 보면 그에 못지않다.5 강유정은 근년에 나온 다양한 경향의 가족서사들에 가족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런 서사를 경제불황과 고용위기 시대에 나타나는 값싼 위안으로의 퇴행현상으로 단정한 것이다.

이 장편이 주는 감동 자체의 성격을 분석하고 감동을 영감보다 열등한 것으로 격하한 고봉준(高奉準)의 논지도 강유정의 평문과 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감동 대 영감의 구도를 설정한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특정한 정서의 습관적인 재생산에서 기인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그런 습관적인 재생산의 산물인 “‘상식/통념’을 부정”하면서도 “창조를 동반하는”것이다. 현재 작단의 가족서사가 전자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그가 문제삼는 것은 소설을 감동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타성이다.6 그는 “왜 항상 가족은 이해되고 소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이해와 소통을 지향하는 가족이야기의 대중적 호소력을 창조적 성찰(〓영감)과는 거리가 먼 독자의 감상적인 몰입이 낳은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의 평문은 『엄마를 부탁해』가 독자의 각성을 방해하는‘대중문학’일 뿐임을 주장한 셈이다.

비평의 생명이‘비판’에 있다고는 하지만 자의적인 도식을 설정하여 거기에 작품을 짜맞추고 재단하는 읽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상식/ 통념’을 부정”하고‘창조’를 동반한다는 영감의 요소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엄마를 부탁해』가 대중에게 안겨주는-감상(感傷)으로서의 감염이 아닌-성찰의 감동을 맛본 독자라면 감동을‘영감’과 구분하면서 전자를 “특정한 정서의 습관적인 재생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습관적인 정서’의 산물이 아닐까 반문할 법하다. 위반과 차이, 전복을 말해야만 겨우 반응하고 그외의 모든 것을 보수로 치부하는 관성 말이다. 마찬가지로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를 “지금 존재하는 사실적 어머니가 아니라 합의된 기억 속에 간직된 상상적 이미지”라고 규정하면서 ‘엄마〓신화적 모성〓되돌아온 감옥’이라는 등식을 설정한 강유정의 논지 역시 작품에 대한 일면적 지적일 뿐이다.

어쨌든 첨예한 사안들이 즐비한 여성주의 담론에서도 모성은 으뜸가는 화두인데,[7. 이에 관한 다각도의 논의는 특히 Adrienne Rich, Of Woman Born: Motherhood as

  1. 한 젊은 시인은‘가족’을 이렇게 노래했다. “밖에선 /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 집에만 가져가면 / 꽃들이 / 화분이 / 다 죽었다” 진은영 「가족」,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2. 김미영 「그대 이름은 엄마, 엄마, 엄마」,『한겨레21』 2009.3.6.
  3. 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문학』 2009년 봄호 325~26면.
  4. 조영일 『한국문학과 그 적들』, 도서출판 b 2009, 277면.
  5. 강유정 유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목소리로써 일단 반박할 만하다. 신수정이 “이 소설 속의 엄마가 현실 속의 엄마 같지 않다고요. 파란 슬리퍼를 신고 발에 피를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대목도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엄마의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어 거의 성녀같이 여겨지는 대목도 있었다는 거예요”라고 지적하자 신경숙은 이렇게 답변했다. “파란 슬리퍼를 신고 발에 피를 흘리면서 돌아다니게 하는 게 과하다구? 이 소설에선 중요한 상징일 뿐이지만 현실은 더할걸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내다버리는 사람들이 숱한 게 현실이지. 현실이 더 과해요.” 신경숙·신수정 대담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문학동네』 2009년 봄호 120~21면.
  6. 고봉준 「감동의 문학과 영감의 문학」, 『문학수첩』 2009년 봄호, 특히 32~3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