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여성의 돌봄에서 공동체의 돌봄으로
최근 소설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김주원 金周源
2021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aimhere@naver.com
1. ‘여성서사’의 부상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은 여성의 교육과 경제적 독립을 주장한 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예술가의 창작에 관한 중요한 논설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울프는 왜 여성 예술가에게는 기억할 만한 전통이 없는가 묻는다.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나 제인 오스틴(Jane Austen) 같은 소수의 선배들이 있지만 여성 예술가의 모델은 너무나 부족했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며 ‘주디스’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내지만 그녀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주디스에게 셰익스피어와 같은 재능이 있더라도 그녀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때 이른 결혼으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돈’은 중요하다. 그것은 자립의 기초이며 예술가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울프의 말대로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 그러나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소환된 울프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울프는 여성 소설가들의 창작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울프가 보기에 소설은 여성들의 장르였다. 소설은 희곡이나 시에 비해 전문교육이 필요하지 않으며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기 수월했다. 다른 전통적인 장르들이 이미 굳어지고 결정된 형태였던 데 비해 소설은 유연하고 새로운 장르였기 때문에 여성은 소설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아버지를 병간호했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나 글을 쓰다 말고 감자 싹을 잘라야 했던 샬럿 브론테 등 울프의 선배들은 집을 벗어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여성 작가들은 응접실에서 여러 사람들을 관찰하며 인물을 분석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여성 예술가들을 옹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울프는 예술에서 남성도 여성적인 것을, 여성도 남성적인 것을 다루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을 고려하면 두개의 성(性)도 부족한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해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해가 편을 가르거나 제한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androgynous)이라는 말에 잘 나타난다.1 시인 콜리지(S. T. Coleridge)의 그 말을 빌려 울프는 어느 한 성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성을, 나아가 사물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여성의 능력과 재능을 말살하는 사회를 여러 차원에서 비판한 울프였지만 동시에 그는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중심사회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원한도 문제적이라고 보았다. 권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지나치게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도 온전한 진실함이나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 예술가에게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울프는 여성 작가들이 이런 종류의 갈등에서 힘이 소진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증오와 분노 속에서 예술적 재능이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울프는 경험을 온전히 충실하게 표현하려면 마음 전체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인 편향성이 있으면 당장은 빛나 보이더라도 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여성의 글쓰기가 지닌 잠재성과 개성을 한껏 고무하면서 남자와 여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리얼리티를 찾고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문학에서 여성 독자들의 영향력, 그리고 여성 작가들의 약진은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은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고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들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대중문화 현상으로서 버디무비나 브로맨스(Bromance)에 반격하여 여성서사나 워맨스(Womance)가 장르화되고 이를 소비하는 여성들은 새로운 젠더 감수성으로 ‘느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때 ‘여성서사’라는 용어는 엄밀한 학술적 규정이라기보다 주로 여성들의 삶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특징과 가치들을 긍정하는 의미가 강하다.2 “여성 서사는 그 기호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함을 예리하게 다각화하고 있”3다는 진단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서사의 다양성뿐 아니라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곤란함도 포함하고 있다.
최근 여성서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가족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일 것이다.4 여성서사는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모성이나 정상가족의 모델을 수정하거나 재검토하고 있으며 “다양하게 재구성되고 새롭게 명명되는 가족의 모습”5을 그리고 있다. 이 여성서사는 우선 기존 한국문학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암묵적인 반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남성 인물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눈에 띄는 현상이다. 여성서사가 남성 인물들에 할당하는 서사는 그다지 풍요로운 편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인물 구도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며 어느 한 성의 리얼리티만을 전경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최설희 옮김, 앤의서재 2022, 208면. ↩
- 선우은실 「세계적 위기의 공통감각 위에서 읽는 질병 시대의 여성 서사」, 『작가들』 2020년 가을호; 이나라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참조. ↩
- 김미정 「여성 서사의 자긍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79면. ↩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최은영의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은행나무 2022,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 정주아 「우연이자 필연인 가족의 역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1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