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윤흥길 尹興吉

1942년 전북 정읍 출생.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장편 『묵시의 바다』 『낫』 등이 있음. heunggily@hotmail.com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때와 곳9

 

 

1

 

이야기에 굳이 제목을 달자면 그런 모양새가 된다고 홍성만은 뜨악해하는 동창생들에게 말했다. 성인영화 제목을 연상케 한다는 중론이 돌았다. 어쩐지 음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밤에 이루어지다니, 도대체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란 게 남녀간의 그짓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요즘에는 레스또랑 같은 데서도 밤중에 남녀가 요상한 짓거리를 하느냐고, 참으로 말세라고 넌지시 홍성만의 직업을 빗대어 깐족이는 작자도 있었다. 도야지 눈에는 모두 도야지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까지 인용해가며 홍성만은 엉뚱한 상상력을 휘두르는 동창생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아무튼 홍성만의 뜬금없는 발언에서 비롯된 때아닌 설왕설래는 파장머리의 어물전같이 축 늘어진 분위기를 다시금 빳빳이 개비하는 데 일조했다. 성인영화 제목 운운은 연방 하품을 꺼가며 어서 이야기판이 마감되기를 고대하던 부류에게 각성제 구실을 했다. 음탕한 느낌 운운은 모깃불 곁에서 매캐한 연기도 아랑곳없이 자울자울 졸거나 아예 양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부류에게 기상나팔 같은 효과를 끼얹었다. 고급 레스또랑을 경영하는 마누라 덕에 호강에 잣죽 쑤는 팔자로 변신한 홍성만으로서는 그처럼 저한테 집중되는 좌중의 비상한 관심이 그다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바싹 다가앉는 시늉을 하는 동창생들을 보고 그는 한바탕 낄낄거렸다.

“옛날 같으면 손자를 봐도 벌써 두셋은 봤을 늙다리들이 시도때도없이 색을 밝혀쌓는 그 못된 버르장머리는 여전히들 못 놨구만.”

 

 

2

 

자아, 엿이 왔어요, 엿이 왔어. 말만 잘허면 공짜로 줘요, 공짜로. 엿들 사. 둘이 먹다가 싯이 죽어도 책음 못 지는 엿들 사. 맛 좋고 꾸리 같은 호박엿, 강냉이엿, 찹쌀엿, 가락엿, 갱엿……

이른 아침부터 느닷없는 엿장수 타령이 휑뎅그렁한 창고건물 안을 한바탕 들었다 놓았다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엿장수 봉자 아버지는 말하자면 선생인 셈이었다. 제자뻘 되는 신참 엿장수들을 모아놓고 시방 소리를 가르치는 참이었다. 선생이 찰캉찰캉 가윗소리 장단에 맞추어 구성진 가락으로 선창을 하면 젊은 제자들은 막걸리를 한 말쯤 퍼마신 듯 낯꽃을 시뻘겋게 붉히고 제비새끼처럼 주둥이를 짝짝 벌려가며 생짜로 목소리를 쥐어짜느라 두 눈알이 툭툭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제자들은 빈손에 보이지 않는 엿장수 가위를 쥐고는 장단을 맞추어 보이지 않는 엿가래를 자르는 시늉에 고부라졌다.

“어이, 거그 꺽새!”

가르침을 멈추고 봉자 아버지는 키가 장대같이 큰 젊은이를 지목했다.

“꾸리 같은, 고 대목 새칠로 혀봐!”

“꾸울 같은……”

“새칠로! 꾸리 같은!”

“꾸르 같은……”

꺽새가 매우 자신없는 목소리로 틀린 발음을 되풀이하자 부앗살이 머리 꼭뒤까지 뻗친 봉자 아버지가 왁살스레 크고 무거운 엿장수 가위를 휘두르며 뎅겅 목이라도 자를 기세로 위협했다.

“앓느니 죽겄다, 앓느니 차라리 죽겄어! 고따우 덜떨어진 소리 솜씨로 어디 엿 한가락이나 팔어 먹고살겄냐?”

엿장수 소질을 제대로 못 타고난 꺽새는 성격도 좋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히잇 웃었다. 꿀 같다는 말을 왜 반드시 꾸리 같다고 발음해야 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엿들 사. 개똥이도 쇠똥이도 얼른 와서 엿들 사. 뭣이든지 다 갖고 와 엿들 사. 고무신짝 운둥화짝 지까다비 떨어러러진 것, 내오간에 쌈허다가 요강단지 찌그르르러진 것, 고부간에 쌈허다가 머리끄뎅이 뜯으드드낀 것, 동서찌리 쌈허다가 인두자락 뿌르르르러진 것, 시아바지 방구질에 모시바지 삼베바지 빵꾸꾸꾸난 것……

자다 깬 조무래기들이 식전부터 봉자네 거처 앞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눈곱자기를 뜯으면서 그 희한한 수업광경을 감탄어린 눈초리로 구경했다. 창고 안 주민들 가운데서도 봉자 아버지는 가장 인기있는 축에 속했다. 우선 엿장수 타령 그 자체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팔고 남은 잔챙이엿들을 조무래기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 때문이었다. 엿의 분배기준은 전적으로 봉자와의 친분관계가 좌우했다. 그래서 창고 아이들은 낮곁이면 봉자를 그악스레 뒤쫓아다니며, 과자장시 똥구녁은 바삭바삭, 뚜부장시 똥구녁은 물컹물컹, 지름장시 똥구녁은 미끌미끌, 엿장시 똥구녁은 찐득찐득, 하고 입을 모아 놀려대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봉자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서로 앞다투어 알랑방귀를 뀌어대곤 했다.

하루치의 수업을 끝낸 신참 엿장수들을 이끌고 봉자 아버지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시내 엿도가로 향했다. 어중이떠중이 끌어들여 대장노릇에 고부라진 남편의 등덜미를 겨냥하고 봉자 어머니는 연방 주먹총질을 가했다.

“엿장시 맘대로 헌담시나 저러콤 잘난 화상이 뭣 땜시 즈그 집 한칸은 맘대로 못 장만허는고!”

조무래기들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와는 딴판으로 봉자 아버지는 정작 자기 마누라한테 전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를 빼고는 창고 안 사내들 대부분이 봉자 아버지와 엇비슷한 처지였다. 졸지에 집을 잃은 아낙네들이 남정네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처자식들이 두 다리 쭉 뻗고 안심하고 살아갈 집칸의 있고 없음이었다.

아침밥들을 짓느라 창고 안에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연기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부터 채운 다음 점점 밑으로 내려와 노인들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기침소리를 짜냈다. 풍로에 주로 코크스를 태워 밥을 짓는데, 불량 코크스에 섞인 조개탄이 항상 말썽이었다. 그리고 풍로를 창고 밖에 내다놓고 불을 피우기로 한 약속을 번번이 어기는 몇몇 얌체들 때문에 주민 전체가 날이날마다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오소리 잡듯 조석으로 사람을 잡는 조개탄 연기는 시커먼 그을음을 거느린 채 기분 잡치는 기름 타는 냄새를 펑펑 풍기며 창고 안을 떠돌다가 두어 시간템이나 지나서야 마지못해 겨우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아낙네들은 식전부터 아버지가 없는 길재네 거처에 모여 부지런히 푸념들을 주고받았다. 집을 철거당한 지 벌써 여러 달 지났는데도 아낙네들은 모였다 하면 만날 똑같은 타령이었다. 이런 설움 저런 설움 쌔고쌘 세상이지만, 뭐니뭐니해도 기중 큰 설움은 집 없는 설움이라는 것이었다. 두 눈 번히 뜨고 내 집이 무지막지하게 철거되는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 충격에서 모두들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길재 어머니의 태도가 가장 극성스러워서, 남편을 나라에 바친 불쌍한 여편네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거냐고 울부짖곤 했다. 뜨내기들끼리 오보록이 모여사는 창고 안에서 길재네는 전몰장병 유가족으로 통했지만, 길재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었다.

신경질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내 이름을 연거푸 불러댔다. 해찰 작작 하고 빨리 밥먹고 학교 갈 준비나 하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어머니의 그런 태도였다. 어머니 말마따나 집도 절도 다 없어진 판국에 대관절 학교 따위는 다녀서 뭣에 쓰겠다는 건가. 일요일 아침에도 학교에 가느냐고 나는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갑자기 머쓱해진 낯꽃으로 어머니는 어물어물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창고살이가 시작된 뒤부터 어머니는 혹시라도 자식들이 부모를 우습게 여길까봐 아버지를 두남두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한때 운수가 사나워서 직장 잃고 집까지 잃었을 뿐이지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양반이고 선비다. 창고 안 다른 남자들과는 감히 비교가 안되는 훌륭한 분이다. 그러니 뼈대 있는 집안 후손으로서 너희들도 근본이 의심쩍은 창고애들하고는 절대로 어울리지 마라. 어머니는 같은 내용을 자식들에게 수도 없이 신칙할뿐더러 우선 어머니 자신부터 창고 아낙네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것으로 모범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대있는 내가 노상 좋아라 어울리는 친구들은 근본이 의심쩍은 바로 그 창고아이들이었다.

전쟁 직후 도시의 빈터마다 비집고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무허가 판잣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청에서 갑자기 강제철거에 나섰다. 어느날 철거반이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건장한 사내들이 미처 가재도구를 끄집어낼 겨를도 안 주고 판잣집을 허물기 시작했다. 쇠갈고리로 루핑이 덮인 허술한 지붕을 마구 찍어내리고 쇠망치로 흙벽을 마구 쳐 구멍을 뚫었다. 기둥이 자빠지고 집채가 폭삭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집채가 서 있던 자리에서 싯누런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가을 한낮의 일이었다.

시 당국은 철거민을 위한 거처로 전신전화국 자재창고 두 채 중 위채를 새로 제공했다. 아래채는 이미 피난민들에 의해 일찌감치 점거돼 있는 상태였다. 웬만한 운동장 푼수는 족히 되는, 대낮에도 유령이 등장함직한, 휑하니 크고 넓은 건물에서 수십가구의 철거민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북창동에 속해 있는 건물이지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명한 철인동 사창가가 자리잡고 있어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말끝마다 뼈대와 근본을 들먹이기 시작한 것도 그 험악하기 그지없는 주변환경 때문이었다. 철거민의 대다수는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었다. 우리는 피난민도 아니면서 피난민들 틈새에 끼여 예정에 없던 창고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겨우살이 준비가 당장 시급했다. 주로 가난뱅이들을 겨냥하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닥칠 혹독한 추위에 대비해서 창고 주민들은 커다란 집 내부에 또다른 작은 집들을 다닥다닥 이어짓는 작업부터 서둘렀다. 각 가구마다 자기네 구역을 정한 다음 널빤지가 깔린 마룻바닥 위에 볏짚을 두툼히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가마니장을 덮어 제법 푹신한 공간을 마련했다. 다다미 비슷한 바닥이 확보되자 두꺼운 회포대 종이를 여러 겹 발라 이웃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침으로써 벽 아닌 벽을 만들었다. 그마저도 형편이 여의치 못한 가구에서는 무너진 판잣집에서 챙겨 내온 갖가지 가재도구들을 경계선에 아무렇게나 쌓아올려 담 아닌 담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문에 창고 안에서는 모든 소리가 훤히 다 들리고 모든 움직임이 훤히 다 잡혔다. 뉘 집에 이 빠진 그릇이 몇개고 뉘 집에 달창난 숟가락이 몇개인지 뜨르르 다 꿸 지경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될 사사로운 비밀이란 게 애당초 존재할 여지조차 없었다.

수단껏 추위에 대비한 덕분에 그렇듯 허술하고 괴상야릇한 살림구조 속에서도 얼어죽은 목숨 하나 없이 그럭저럭 무사히 첫번째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고뿔이 들고 손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은 좀 했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으로 새봄을 맞이할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침밥을 먹기 무섭게 한바탕 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치고는 참 더럽고 냄새나는 전쟁이었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도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으레 걸쪄서 창고 앞 마당가에 세워진 세 칸짜리 변소는 식전부터 항상 만원이었다. 아침마다 변소 앞에는 기다란 줄이 세 가닥 늘어서곤 했다. 몸을 배배 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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