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계속 학습되는 혁명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명예교수. 저서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사회인문학의 길』 등이 있음. baik2385@hanmail.net

 

 

1. 새롭게 묻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촛불의 시대정신은 3·1운동 인식에 어떤 새로운 빛을 투영할 것인가?

‘촛불혁명’으로 열린 새로운 정치공간과 남북화해의 움직임은 3·1운동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촉발한다. 때마침 올해로 100주년을 맞아 좀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대두되고 있다. 촛불혁명이라는 또다른 역사적 전환을 경험하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3·1혁명’이라는 용어까지 부각되면서 3·1운동(이하 3·1)이라는 익숙한 용법에 안주해온 기존 역사인식의 틀을 새롭게 점검해보기를 요구한다.1

3·1은 1920년대부터 사회역사적 변화 속에서 부단히 재의미화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분단상황이 고착되면서 남북 간에 달리 기억되었고, 남한 내부에서도 3·1의 의미부여를 둘러싸고 종종 기억투쟁을 겪어왔다. 박근혜정부 시기 건국절 문제를 둘러싸고 3·1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벌어진 논쟁이 기억에 생생하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중국의 5·4운동(이하 5·4)도 그간 재기억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란을 겪어왔다. 5·4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역사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실문제이다. 지금 대두되는 3·1의 새로운 의미화 방식—‘3·1혁명’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제안까지 나오는 움직임—역시 사회적·정치적 상황 변화에 반응한 것임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새로운 기억화가 얼마나 공유영역(commons)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필자는 이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3·1의 세계사적 의의 내지 문명전환의 의미를 검토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학계에서 그간 3·1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이 중국의 5·4를 비롯한 동시대 다른 민족운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해석이 ‘시간의 선도성’에 얽매인 것이고 ‘세계사적 의의’는 약소민족의 ‘동시성’(simultaneity)이라는 관점에서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도 나왔다.2 3·1과 5·4의 관계를 ‘역사적 동시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3

필자는 동시성이라는 시각을 적극 받아들여 3·1의 세계사적 의미를 해석하되, 3·1을 동시성을 지닌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개별성도 아울러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연동하는 동아시아’라는 시각에서 3·1을 다시 보려고 한다. 연동은 “서로 깊이 연관된 동아시아가 다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공간(곧 구조)을 서술하는 동시에 주체적인 연대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다.4 여기에 좀 덧붙이자면 연동은 구조적 연관과 행위주체의 상호참조를 의미하는데, 후자의 경우 운동뿐만 아니라 사상·제도 영역에 두루 걸쳐 나타난다. 세계체제에 접속되면서도 제국 일본, 반(半)식민지 중국, 식민지 한국 세 나라가 그 위계구조에서 다른 위치를 점한 채 상호작용하는 동아시아적 양상에 좀더 주목할 것이다. 서구 열강의 대리역인 일본제국의 팽창이 두 나라의 (반)식민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삼국의 사건을 일일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고, 반식민지였던 중국의 반일 민족운동인 5·4를 발견적 장치로 삼아 반식민지와 식민지라는 차이가 갖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5 3·1을 조명하려고 한다.

이 점을 중시하는 것은 ‘문명화’를 앞세운 제국주의가 조성한 (반)식민지 근대의 복잡성을 꿰뚫어 보고 거기 내재된 근대극복의 계기를 찾기 위해서이다. 이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동시수행을 의미하는 ‘이중과제론’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6 이를 통해 볼 때 중국은 1911년 공화혁명에 성공했으나 8년 만에 5·4가 일어나고, 한국은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당한 지 9년 만에 3·1이 일어나는 과정의 같고 다름이 지니는 구조적 의미가 좀더 또렷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이중과제론의 시각에서 3·1의 세계사적 의의 내지 문명전환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이 작업이 3·1을 새롭게 조명하는 하나의 방법적 모색이 되기를,7 그리고 촛불혁명의 역사적 근거를 다지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지난 100년, 특히 한국의 100년의 역사를 다시 보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2. 1919년, 새로운 시대의 도래: 개조와 해방의 큰 흐름

 

한중일 세 나라의 근대이행 경로는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십년간에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해 열강의 분할지배의 위협을 당함으로써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에 따라 세계체제의 반주변부로, 러일전쟁을 거치며 중심부로 상승했다. 이렇듯 분기가 형성된 관건은 조선이다.

그런데 중국은 반식민지라는 조건이 허용한 상대적인 자율성의 공간을 활용해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했다. 얼핏 보면 근대적응에 성공한 듯하나, 그것이 공화의 ‘형식’을 갖춘 데 그쳐 그 ‘실질’을 채우려는 5·4가 일어났다.8

이에 비해 조선은 1년 앞서 이미 일본제국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식민당국은 ‘문명화’ 정책을 시행한다 했으나, 재원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서구의 시선을 의식해 너무 조급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무단통치, 즉 헌병·경찰·관리를 매개로 총독부의 폭력적인 지배질서를 민중생활 일체에 관철하는 식민지 근대화 방식을 택한 것이다.9 지방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독특한 자치적 성격과 전통적인 중앙의 민에 대한 간접 규제 대신 향촌의 자율성을 해체하고 직접 규제를 강행함으로써 반감을 샀다. 또한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주세·가옥세· 연초세·영업세·인지세 같은 조세를 신설하고 번잡한 신고서 양식을 채택하면서 식민지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교육·행정·사법에서의 일상적인 차별이나 공동묘지령, 뽕나무 강제 재배, 화전 단속, 간척사업에의 부역동원 같은 미시적 통제정책에도 시달렸다. 게다가 물가의 살인적 급등 및 콜레라와 장티푸스, 스페인독감 같은 전염병의 창궐도 가세해, ‘폭발력을 내장’한 지경에 있었다. 문명화의 정당성에 현저한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강제병합된 지 겨우 9년 만에 3·1이라는 전민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난 것을 적개심과 반항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먼저 1919년을 ‘인류의 신기원, 해방의 신기운’으로 읽은 시대적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을 그렇게 인식하게 만든 시대적 사건은 다름 아닌 1차대전이었다. 비록 전쟁 자체는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정의와 인도 중심의 ‘신사회 건설’로 귀결되고 있다는 인식이 세계 전체에 확산되어 ‘개조’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신문이나 전보 같은 근대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에 가깝게 ‘경험’된” 세계대전은 “세계의 ‘세계성’을 자각하게 하고 ‘동시대성’의 감각을 형성하게 만든 사건”이었다.10 조선인은 세계대전을 통해 서구문명, 문명개화에 대한 개항 이래의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희망적 관점에서 일본을 포함한 현 세계질서의 근본적 개편과 개조를 전망하며, 그러한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민족의 미래를 꿈꾸기에 이르렀다.11 세계적 차원에서 동시대인에게 획기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특정 사건들이 발생한 ‘지구적 순간’(global moment)12을 공유하며 문명전환의 새 시대를 맞는 느낌을 처음으로 가졌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깊이 생각해볼 것은 조선인들이 세계에 대한 동시대적 감각을 가지면서도 조선이 그것과 어긋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적 전환에 (빠리강화회의에 공식 대표를 파견할 수 있던 중국과 달리) 식민지 조선이 참여할 여지가 있는가에 대한 초조감은 당시 조선인들의 사유와 실천에 중요 변수로 작용하였다.13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 본지의 이 특집도 그러하거니와, 이기훈 엮음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창비 2019)도 이러한 시대 요구에 대응한 것이다.
  2. 한승훈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의 불완전한 정립과 균열」, 『역사와 현실』 108호(2018) 238~39면.
  3. 임형택 「1919년 동아시아, 3·1운동과 5·4운동: 동아시아 근대 읽기의 방법론적 서설」, 박헌호·류준필 엮음 『1919년 3월 1일에 묻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35면.
  4. 졸저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318면.
  5. 식민지가 어느 한 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아 주권을 상실한 것이라면, 반식민지는 직접 지배를 받지 않으나 불평등조약과 세력권의 분할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열강들에 의해 주권이 제약받는 것을 의미한다.
  6. 이중과제론은 근대다운 특성을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긍정적 가치로 보는 태도(예컨대 근대주의)나 폐기해야 하는 낡은 유산으로 보는 태도(탈근대주의)의 이분법의 덫을 넘어서려는 창의적 이론이다. 이에 힘입어 ‘침략과 저항’의 단선적 역사 이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송호근 외 『시민사회의 기획과 도전』(민음사 2016) 및 백낙청 외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창비 2018) 참조.
  7. 70주년을 맞은 역사학계는 민중사관에 입각해 3·1을 해석한 총결산을 출간한 바 있다(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 민족해방운동 연구』, 청년사 1989).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탈민족·탈근대 인식틀이 역사와 문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3·1 연구에도 큰 변화가 이뤄졌다. 흔히 ‘문화사적 전환’이라 지칭되는 것인데, 민중의 개별화되고 다성적인 주체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고, 생활세계나 그것을 전승하거나 재현하는 매체 및 형식 등 주관적 측면이 주로 다뤄졌다(허영란 「한국 근대사 연구의 “문화사적 전환”: 역사 대중화, 식민지 근대성, 경험세계의 역사화」, 『민족문화연구』 53호, 2010, 92~93면). 필자는 이러한 조류가 3·1의 이해를 다채롭게 만든 성과를 활용하면서도, 식민주의의 규정성 그리고 재래의 운동과 사상 경험의 재구성에 둔감한 구조적 인식의 결여를 경계한다.
  8. 신해혁명과 5·4를 제1,2차 공화혁명의 연속체로 보는 해석은 민두기 『중국의 공화혁명』(지식산업사 1999) 참조(특히 결론).
  9. 권태억 「1910년대 일제의 ’문명화’ 통치와 한국인들의 인식: 3·1운동의 ‘거족성’ 원인 규명을 위한 하나의 시론」, 『한국문화』 61권(2013) 357~59면.
  10. 차승기 「폐허의 사상: ‘세계 전쟁’과 식민지 조선, 혹은 ‘부재 의식’에 대하여」,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411면.
  11. 이태훈 「1910~20년대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소개양상과 논의지형」, 『사학연구』 105호(2012) 213면.
  12. Sebastian Conrad and Dominic Sachsenmaier, Competing Visions of World Order: Global Moments and Movements, 1880s-1930s, Palgrave Macmillan 2007, 9, 13면.
  13. 차승기, 앞의 글 4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