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으로 『매향』이 있음. jst0808@chollian.net

 

 

연이 생각

 

 

좀 독했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독하다는 표현엔 썩 자신감이 없다. 나는 종종 연이(淵伊)─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나, 망자가 된 마당에 실명을 거론하는 게 아무래도 육신을 못 썩게 하는 일만큼 가혹하리라 싶어 그저 ‘연이’라 부른다─에게 독종이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가 자진을 한 마당에 도대체 어떤 삶을 두고 독하다고 해야 하는지 지금으로선 모호해졌다. 때때로 죽음보다 못하게 여겨지는 삶에 맞서 살아남는 일이 독한 것인지, 스스로 생을 버리는 행위가 보통의 용기로는 어림없는 짓이라면 그야말로 독종이 아닌지, 생각이 연이의 죽음에 이르면 더없이 혼란스러워진다.

연이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짧은 생을 접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7년은 죽은 자를 잊기에는 턱없이 짧은 세월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망각의 집념이 강한 존재가 또 사람이어서 누군가를 열두 번도 더 잊을 만한 시간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아름답지 못한 죽음에 대한 우리의 망각의 집념은 얼마나 맹렬하던가.

따지고 보면 그의 죽음 이후에도 나는 잘 살아왔다. 앞으로 그에 대한 추억을 상실한다 해도 난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난 마당에 그의 삶과 죽음을 들춘단 말인가? 말과는 달리, 행여 나는 그녀의 죽음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여 그 덫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그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라고 꽤 애를 쓰며 살아왔다. 나는 그가 생이 버거워서 도망쳐버린 아이쯤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무슨 강박증 같은 심리에 시달려왔다. 일테면 나는 무모하게도 그의 죽음이 한때 거리에서 쓰러져간 숱한 젊은이들의 죽음과 나란히 놓여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저 1991년 무렵, 소위 그 전염병처럼 번지던 죽음의 행렬의 마지막으로 기억되길 원했으며, 나아가 열사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저 80년대적인 죽음들에 대한 어떤 마지막 상징쯤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연이를 추억하는 행위가 결국은 한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우겠다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혐의를 씌워도 나는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나는 연이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의도를 꽤나 진지하게 마음속에서 키워온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 앞에 어떤 비석을 세우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열사라니, 당치도 않다. 그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그 나이에 할 법한 고민을 안고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나약한 젊은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누군가 열사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시대에 대한 지독한 희화화이기 십상이고, 한편 연이에게는 더없는 모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몇년을 나는 이상스럽게도 상주(喪主)가 된 기분에 젖어 지냈다. 하루하루가 상중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에 대해 갖는 지나친 엄숙주의라 해도 좋고, 죽은 이들에 대한 알량한 부채의식이래도 상관없다. 이제 전부나 전무의 상태가 존재하리란 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죽음의 시절을 채 빠져나오지 못한 데에는 연이의 죽음이 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일상을 잃은 상주에게 망자를 향한 슬픔과 고통만이 있겠는가? 상주의 일상은 도피한 자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다. 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책감 따위는 안 가져도 되는, 일탈이나 혹은 도피를 꾀한 자의 은근한 안락함이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이름으로 얻어지는 휴가이다. 그래서 일탈과 도피의 일면을 의식하는 순간 상주는 스스로 못 견딜 만큼 황폐해진다. 그럼에랴 제 스스로 죽음의 그늘로 도망가버린 자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나는 더 황폐해지기 전에 아무도 입혀준 적이 없는 이 상복을 벗고 빨리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내 일상이란 게 있었는가?

졸업과 함께 들어간 직장에서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달을 채 못 버티고 나와야 했다. 1997년 봄이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싸서 회사 문을 나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회사 앞에 황망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터무니없게도 가죽가방은 버튼이 채워지지 않을 만큼 불룩했다. 회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병원에서 챙겨볼 만한 서류들을 다 담아 나온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실직자가 된 신세에 감히 직장인의 일상을 꿈꾼 것이다. 나는 퇴근 후 동료들과 드나들던 회사 옆 당구장 건물로 향했다. 당구장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나는 그동안 참기라도 한 듯 찔찔 눈물을 짰다.

B형 간염으로 치솟은 GOT, GPT 하는 간기능 수치를 다스리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열흘 만에 퇴원하여, 담당의사의 권유대로 행여나 간염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형성될까 싶어 확률이 낮은 인터페론 치료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세 차례씩 냉장고에서 인터페론 주사제를 꺼내 손수 팔뚝이나 다리 정강이의 근육을 찾아 주사해야 했다. 약을 투여한 날은 몸살 기운과 흡사한 전신결림, 미열, 구토증 그리고 무력감으로 종일 누워 지냈다. 약기운이 잦아들어 운신할 만해진 이튿날은 폐병환자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파트 단지의 근린공원으로 볕을 쬐러 갔고, 그 이튿날 다시 바늘자국이 없는 근육을 찾아 주사를 놓았다. 독한 약기운 탓인지, 아니면 그런 생활의 연속이 낳은 심리상태 때문인지 나는 스스로 목숨을 놓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몸을 한없이 가라앉히는 약의 후유증은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견딜 만해졌지만, 자살 충동만은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보려고, 아니 그런 목적도 상실한 채 손수 제 몸에 주삿바늘을 꽂고 약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날을 살아내고 있었다. 생존이 결코 의식적인 활동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런 몸의 반응일 뿐이란 사실도 새삼스러웠지만, 생명현상 자체가 그토록 치욕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실감한 날들이었다.

하루는 상경한 친척 어른을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가야 했다. 서울은 바야흐로 황사의 계절이었다. 매연과 섞여 하늘을 뿌옇게 뒤덮은 황사는 마음속까지 밀려들어 일식의 대낮처럼 어떤 불안과 불쾌감마저 던져주었다. 간간이 바람이 있었지만 하늘 깊숙이까지 고인 그 불투명한 공기는 씻겨나가지 않고 더욱 농밀해져갔다. 그날은 약을 거른 날이었음에도 오랜만의 장거리 외출 탓인지 나는 미열에 멀미 기운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기치 않은 한 전시회와 맞닥뜨리면서 내 마음은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랫줄처럼 철줄이 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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