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열광과 환멸을 넘어서

 

 

지난호에서 ‘희망의 6월’로 전진하자는 다짐을 했던 차에 우리는 또다른 6월을 맞이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세대와 성별, 지역을 초월하여 온 나라를 뒤덮었던 열기는 실로 감격적인 축제의 경험이었다. 물론 이 국제축구경기가 명실상부한 지구촌의 축제가 되기에는 나라 안팎의 그늘이 여전히 너무 많고 그것들이 ‘대〜한민국’의 함성 속에 쉽게 묻혀진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깨워진 신명과 공감을 냉소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 저변에 우리 사회의 역동적인 기운과 더불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스며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이번 월드컵 행사는 엄혹한 냉전 속에서도 한국사회가 일구어온 민주화의 도정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또하나의 성취로 기억될 만하다.

하지만 월드컵 막바지의 서해교전과 그것이 불러온 국내외의 파장은 다시 한번 우리 사회가 처한 냉엄한 정황을 일깨워주었다. 무고한 남북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죽어간 현실에서 수구언론과 보수야당은 기세등등하게 남북대결을 부추기고, 6·13지방선거와 8·8재보선의 지리멸렬은 정치권 전반에 대한 환멸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해교전이 남북화해의 대세에 별 영향을 못 끼쳤다는 것은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를 실감케 하는 중대한 사실이다. 전쟁 불안심리도 공안통치의 유혹도 감지되지 않은 채 오히려 9·11 이후 주춤했던 대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되어 북한의 아시안게임 참가, 경수로 건설사업의 착공 등 전화위복의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전해지는 북한의 경제개혁도 위기를 일시 모면하려는 단발적 조치라기보다는 일단 큰 흐름의 궤도에 들어선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미·일의 대북 강경론이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 체제 단속에 나섬직한 북한의 최고지도부가 이러한 방향을 선택한 것은 북한주민은 물론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체를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단되는 듯 이어지고, 갑갑하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이 남북화해에 어떤 큰 흐름이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길이 탄탄대로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남북관계가 어느정도 풀린다 하더라도 이 과정은 양 사회 내부의 이해집단과 복잡하게 연계되어 체제내 갈등과 분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인내를 가지고 대세의 흐름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내부개혁의 불씨를 지피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 절실하다.

현 정권 막바지에 들어 한층 어지러운 정치의 난맥상에 대해서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지만, 그럼에도 남북화해를 포함한 민주화의 도정에서 일단 한 고비는 넘었다는 인식도 함께해야 마땅할 것이다. 가령 최근의 장상 총리서리 인준 논란에서도 드러나듯, 그간 체제의 온갖 부당한 기득권에 더해 도덕적 우위마저 누려왔던 사회지도층의 행태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에서 체념이 아니라 이런저런 형태의 저항이 표출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노무현 돌풍도 현재는 현저히 사그라든 것처럼 보이지만 이 바람의 근저에 깔려 있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는 결코 일과성으로 그칠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동요하는 낡은 지배체제와 그 틈새를 어떻게 지혜롭고 끈질기게 공략해 대중의 저력과 신명이 드러날 마당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불안한 세계사적 현실 가운데서도 한국사회 안팎에 대두하고 있는 새로운 기운과 발랄함을 담은 공동체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때이다.

 

이번호 특집은 90년대 이후 변모하는 우리 문화지형 전반을 점검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최원식·김홍준·김종엽이 참여한 정담(鼎談)은 월드컵의 폭발적 열기를 가능케 한 사회문화적 변모를 되짚어보면서 그후를 어떻게 추스를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정담은 변화하는 문화지형에서 드러나는 대중적 열망에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음을 주목하고 민족문화의 진로와 맞닿는 접점을 모색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민족문화의 기운이 약화되고 소비적인 대중문화가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였다면, 이제 스스로 갱신해가는 민족문화가 대중과 만나 역동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은 한층 긴요하다.

사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이런저런 문화론의 급작스런 부상에는 다소 요란스러운 점이 있었는데, 우리 학계에 수용된 서구 문화론의 이론적 점검을 통해 공과를 따져보는 송승철의 글은 이런 점에서 되새겨봄직하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론이 오히려 창조적 문화실천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의 비판적 성찰은 일단 시의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성(性)문화의 변화를 짚는 이남희의 글 역시 주목을 끈다. 90년대 이후 성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변화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따져보는 이남희는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 주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이런저런 착종을 풀어가기 위해 성에 관한 낯익은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상상력이 절실함을 역설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월드컵을 바라본 이마후꾸 류우따의 글은 무엇보다 근대의 국가이데올로기에 봉사해온 스포츠가 이제 그것으로부터 일탈해가는 경향성을 파악하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는 세계축구에서의 디아스포라 문화에 주목하고 한국인들의 열광에서도 오히려 민족주의와 성격이 다른 면모를 확인한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매개체로서의 스포츠 열기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될 법한데, 성대한 잔치 뒤에 여전히 작동하는 일본의 국가주의를 착잡하게 술회한 하종문의 문화시평을 같이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임지현의 논단은 지난호의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에 대한 반론으로 씌어진 글이긴 하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한층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지난호에 뒤이은 해외촛점 ‘팔레스타인 노트’는 축제의 열기에 가려진 지구촌의 어두운 그늘을 조명한다. 이스라엘 점령하 팔레스타인 지역의 끔찍한 현실의 일상사를 잔잔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주는 바후르의 일기,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세계적인 시인 다르위시의 시편들 모두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적이다. 이와 달리 차분하지만 도전적인 메씨지를 전하는 저트의 글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미국이 기존의 노선을 접고 양자간의 대화를 독려해야 하며, 양 당사자가 서로를 인정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 가운데 각자가 당한 굴욕과 고통을 잊어야 한다는 과감하고도 논쟁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논단의 김영희와 월러스틴의 글 역시 9·11테러 이후의 세계를 심도있게 바라보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이다. 특히 부르카라는 정형적인 이미지로 전해지는 아프간 여성의 곤고한 삶의 정황을 다각도로 살피는 김영희의 글은 서구중심주의와 다문화주의 시각을 넘어서 아프간 여성들의 주체적 운동에 주의를 환기하는 점이 뜻깊다. 월러스틴의 글은 미국 헤게모니가 동요하는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가운데 미국사회 내면의 결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는데, 마침 9·11 이후 1년이 되어가는 현싯점에서 번역자 한기욱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의 최근 생각도 들어보았다.

그간 본지에서 특집기획 외에도 현장성을 강화하는 이런저런 기획의 지면이 많다보니 문학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부문을 매호 특집이라는 자세로 임하고 있는데, 실제 다섯 편의 소설, 아홉 분의 시인이 참여한 시란, 네 편의 평론으로 구성된 이번호 문학란은 문자 그대로 특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6년 만에 창비 소설란에 등장하는 최일남도 오랜만이지만 윤흥길은 1978년 창비 50호에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발표한 이후 무려 24년 만이다. 여기에 한창훈, 김영하, 게다가 작년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가인 표명희까지 어우러진 소설란은 그래서 한층 빛난다. 민영을 비롯한 9명의 시인들이 각기 개성적인 목소리를 담아 다채로운 시란을 가꿔주었고 평론 역시 알찬 편이다. 임규찬에 의해 촉발되어 윤지관·황종연으로 이어진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이번에는 김명인이 가세하여 작품에 촛점을 맞추어 논의를 한발 진전시켰다. 게다가 임홍배의 황석영론, 최강민의 하성란론은 우리 시대의 문제작가에 대한 본격적인 작가론으로 손색이 없는데 여기에 최근 출간된 시집들을 자상하게 검토한 김춘식의 시평론이 더해졌다. 특히 처음 공개되는, 중국의 여성작가 띵 링과 김학철 부자간에 오갔던 편지 또한 독자들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믿는다.

현장통신은 6·13지방선거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고민을 담아보았다. 월드컵의 와중에 치러진 지방선거 당시 구청장에 출마해 낙선한 한 민주당 후보의 부인이 술회하는 애환, 그리고 현실적 난관 앞에 진보정당을 가꾸어가려는 한 민주노동당원의 진솔한 이야기에서 우리 정치개혁이 당면한 절실한 과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밖에도 창비와 옌(대학의 ‘재중 조선-한국 문학연구회’가 공동주최한 학술회의를 솜씨있게 정리해준 이욱연, 그리고 의례적인 책소개를 넘어 짤막하지만 알뜰한 쟁점토론을 해주신 서평 및 촌평 필자들께도 감사드린다.

한가지 공지사항을 말씀드려야겠다. 창비는 이번에 제정된 ‘대산대학문학상’을 대산문화재단과 함께 공동주관하기로 하였다. 창비가 정성을 들이는 이 대학문학상이 각 창작분야에서 젊은 지성들의 문학열을 북돋우는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본지 2003년 봄호에 수상작이 실릴 이 잔치에 뜨거운 성원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지면이 넘쳐서 다음호로 넘어간 글들이 많았다. 더운 여름에 글을 완성하느라 애쓰신 분들께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다.

[柳在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