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오감도들

신예시인들의 시세계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이 있음. oblako@hanmail.net

 

 

까마귀의 눈

 

시인 이상(李箱)이,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지고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1934년 9월, 「오감도」 작자의 말)고 일갈했던 것은 70여년 전이다. 우리는 이상의 우울한 한탄에서 멀리 떠나왔다. 그 70년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시를 쓰고, 여전히 시를 읽는다.

아방가르드의 문화적 전성기를 통과한 서구에서, 시 장르는 확실히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20세기 초엽은 문화적·정치적으로 일종의 한계, 혹은 ‘임계점’이 설정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쏘비에트 체제는 전무후무한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산물이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당시는 수많은 마니페스토(Manifesto)들이 쏟아진 전위들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사조’들이 명멸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들은 대부분 저 세기초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 당대적 변형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한계 체험으로서의 글쓰기’라는 크리스떼바(J.Kristeva)의 명제는, 이제 적어도 시에 직접 적용되기 어려운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체험해야 할 한계 자체가 이미 상투적인 것, 위반과 일탈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례인 것, 이 아이러니는 확실히 21세기 미학의 딜레마가 아닌가?

지금 우리 시는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 적어도 양적으로 풍요로우며, 한국의 시인들은 일본이나 서구의 언어형식을 추종하거나 그에 대한 모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전위적 실험과 강력한 실존, 무의미시와 정치적 에너지, 전통 미학의 리듬에서 기계인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우리 자신의 모국어로 거쳐왔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다른 세기를 맞이했다.

오늘의 젊은 시인들은 80년대의 정치적 초자아를 의식하거나, 그것을 무의식 안에 숨긴 채 초월적 해탈의 의지로 변형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른바 ‘씨니피앙의 축제’나 ‘내면으로의 회귀’라는 90년대적 반명제(反命題)에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전근대적 풍경에 대한 애착을 시적 진정성과 동일시하건, 반시(反詩)적 일탈만이 시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을 시의 임무로 삼건, 삶과 사물을 새롭게 보기 위해 집요하게 일상어를 변조하건, 이미 우리 시대의 시적 영토는 그리 좁지 않다. 아무도,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라고는 한탄하지 않는다. 이상이 느꼈던 저 문화적 불모는 흘러간 것일까. 하긴, 어쩌면 이제 ‘오감도’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까마귀의 눈으로 가득한 이 분방한 시대에, 대체 누가 저 불길하고 매혹적이며 고독한 ‘까마귀의 눈’을 자칭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가 생산하는 텍스트들은 풍요롭고, 바로 그 풍요에 의해 또 한량없이 가난하다. 시는 풍성하고, ‘한계체험’의 향유는 빈곤하다. 이 풍요와 빈곤의 역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역설은 언어의 것일 뿐 현실과 실재의 것은 아니다. 현실과 실재는 언어의 빈곤이나 사유의 한계 따위를 상관하지 않고 거기 있으며, 또 그 자체로 한량없이 변화한다. 모든 것과 무관하면서 또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는 나무가, 저 창밖에서 완강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 글은 신예시인들의 미학을 비판적으로 살피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신예시인’을 90년대 말 이후 등단한 시인들로 설정하고, 손에 닿는 대로 천천히 시편들을 읽었다. ‘비판적’이라고는 했지만, 같은 시공간을 통과하고 있는 그네들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 시편들을 단일한 논리적 맥락이나 몇개의 범주적 유형 안에 가둘 의향이 없다. 한 시인의 언어는 수많은 개념적 범주들 사이를 부유할 뿐, 일정한 유형 안에 갇히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평적 개념어들로 포괄할 수 있는 시의 영토는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적을 내용은 다분히 자의적이며, 또 어쩔 수 없이 파편적이다.

 

 

오래된 미래를 넘어서

 

아마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禪詩)’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명계 바깥에 구축가능한 또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편들 가운데 일부는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신예시인들의 어떤, 혹은 많은 시편들 역시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다음의 시는 이런 의문에 대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放心」(『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전문

 

손택수의 어떤 시들은 미묘한 곳에서 시적 긴장을 획득한다. 아마도 그의 가장 좋은 시 중 한편으로 등재될 이 시는 저 오래된 미래의 풍경과 정서를 끌어오되, 그에 대한 안이한 시적 예찬에 빠지지 않는다.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볍게 얻어낸 시적 리듬 위에, 한 마리 제비가 문득 우리의 방심을 통과한다. 그 순간 저 제비는 오래된 미래의 풍경을 건너와서 순간적으로 우리의 숨구멍을 열어놓는다. 이 숨구멍은, 정적이며 느린 것에 대한 상투적인 예찬을 넘어서서, 문득 어떤 열림과 닫힘의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정록과 문태준의 좋은 시들이 그러했듯이, 아마도 이 열림의 순간이야말로, 저 오래된 풍경을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마법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느림을 찬양하고, 자연에 매혹되고, 여기에 ‘문명비판’의 뉘앙스를 덧붙이는 관습적인 방식으로는 저 열림의 순간이 포착되지 않는다. 열림의 순간은 어떤 아슬아슬함, 어떤 위태로움, 어떤 발견의 순간에만 온다.

다음의 시에서 안온한 목가는 기이하게도 ‘칼끝’의 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 풍경이 될 수 있다.

 

심심하면 나는 칼끝을 보며 놀지

칼끝을 정면으로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보이지 그 위에

흰 양떼들이 노니는 게 보이지

더이상은 못 올라가지 나도 그냥 거기쯤

앉아서 놀지

(…)

물 길러 가는 흰 양떼들을 불러모아놓고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지

―이덕규 「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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