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오끼나와 문학’이라는 물음

 

 

심정명 沈正明

일본학 박사, 도오시샤대학 객원 연구원. 공저 『탈 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정』, 역서 『유착의 사상』 등이 있음.

yorito@gmail.com

 

 

긴 연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일본사회는 온통 들썩거렸다. 어느날부터 일제히 길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한 일장기의 행렬을 보며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헤이세이(平成)’가 끝나고 ‘레이와(令和)’가 시작된다는 축제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 하기야 인간은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시간을 구분하고, 매해나 매 십년, 짧게는 한계절이나 한달이 끝날 때마다 지난 시간을 과거로 만들며 미래의 계기를 발견하곤 하니, 이 떠들썩함도 영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설혹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교차하는 이 열흘간의 연휴가 끝나고 나면, 다시 예전과 똑같은 생활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헤노꼬(邊野古) 연안의 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직접 바다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眞俊)은 지금이 마치 시대가 변화하는 순간인 것처럼 흥청거리는 일본과 오끼나와의 매스컴을 비판하면서, 딱 잘라 이렇게 말한다. “오늘부터 레이와이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바보 아닌가. (…) 연휴가 끝나면 헤노꼬에서는 새 기지 건설 공사가 재개되고, 미야꼬(宮古), 야에야마(八重山)에서는 자위대 기지 건설이 강행된다. 중국과 대치하는 최전선으로서 오끼나와의 군사 요새화가 착착 진행된다. 미일의 군사 식민지로 변한 오끼나와의 상황, 야마또(大和)의 구조적 차별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뭐가 새로운 시대인가.”1 주지하다시피, 헤노꼬 새 기지 건설과 관련해 오끼나와현이 작년 7월 말에 매립 승인을 철회할 것을 표명하고 해당 절차에 돌입한 데 대해 일본 방위성은 행정 불복 심사를 청구했고, 지난 4월 5일 국토교통장관이 오끼나와현의 매립 승인 철회 처분에는 이유가 없다며 이를 취소하는 결의를 내린 바 있다. 그렇다면 메도루마의 말처럼, 오끼나와에는 전쟁 ‘이후’로서의 전후가 없었듯 기지와 철조망이 있는 전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꾸따가와(芥川)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지만 작품을 집필할 여유도 없이 매일같이 기지 반대활동에 나서는 메도루마의 존재 자체가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오끼나와의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끼나와를 둘러싼 이같은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함께 류우뀨우(琉球)왕국이던 곳이 1872년 류우뀨우현이 되었다가 1879년 오끼나와현으로서 일본에 병합(이른바 ‘류우뀨우 처분’)되면서 오끼나와의 근대는 시작된다. 오끼나와를 병합한 일본은 동화정책을 내세우며 오끼나와어가 아닌 ‘표준어’를 사용할 것을 장려하고 ‘생활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오끼나와의 ‘뒤처진’ 생활방식을 ‘개량’하겠다고 나서지만, 그와 동시에 토지제도 등에서는 구관온존(舊慣溫存) 정책을 쓰며 오끼나와를 영토적·경제적 식민지로 만들어왔다. 2차대전 말에는 일본정부가 본토 결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오끼나와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사석(捨て石)’ 작전을 씀에 따라 오끼나와 전투가 일어나는데, 그 결과 주민의 약 4분의 1이 미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패전 후 연합군의 점령 통치를 받던 일본은 1951년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주권을 회복하지만, 일본의 잔존 주권(residual sovereignty)과 미국의 시정권(施政權)을 규정한 이 조약에 따라 오끼나와는 계속해서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이며 ‘태평양의 요석’으로 요새화된다. 오끼나와 문학 역시 이같은 오끼나와 근대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며, 따라서 그것은 오끼나와를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일본에 동화되기 이전의 오끼나와어나 오끼나와적인 것, 혹은 토착적인 오끼나와와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오끼나와 아이덴티티를 모색한다는 특징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오까모또 케이또꾸(岡本恵徳)는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부터 1972년 시정권 반환(이른바 ‘복귀’)까지 오끼나와 문학의 특질을 크게 두가지로 설명한다.2 즉 이 시기의 오끼나와 문학은 정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오끼나와라는 지역의 독자적인 성격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전자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까모또 자신도 동인으로 참여했던 류우뀨우대학 문예부의 기관지 『류다이분가꾸(琉大文學)』(1953년 창간)일 것이다. 한편 오끼나와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문학적 시도는 오끼나와의 전통적인 풍속이나 언어 등을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부정하려고 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오까모또나 오오시로 사다또시(大城貞俊) 등이 오끼나와의 현대문학을 ‘복귀’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 시정권 반환과 함께 찾아온 ‘아메리카 세상(アメリカ世)’에서 ‘야마또 세상(大和世)’으로의 변화는 물론 오끼나와 문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가령 오까모또는 일본화가 가속됨에 따라 오끼나와의 독자적인 문화가 붕괴하는 데 대한 위기감이 쌓이면서 이 시기의 오끼나와 문학에서 민속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커졌다는 점, 또 미군 병사와 오끼나와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단순히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전의 문학에 대한 상대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거론하였다.3 본토 일본문학계가 오끼나와 문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와 겹치는데, 오오시로 타쯔히로(大城立裕)가 「칵테일파티(カクテル·パ—ティ—)」로 아꾸따가와상을 수상한 것이 ‘복귀’를 앞둔 1967년, 히가시 미네오(東峰夫)가 「오끼나와 소년(オキナワの少年)」으로 이 상을 수상한 것이 1971년이다.

물론 문학이 항상 정치적인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동하는 것은 아니며, 오끼나와 문학 역시 1945년, 1972년, 그리고 오오따 마사히데(大田昌秀) 당시 지사가 기지에 사용되는 토지를 강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대리 서명을 거부했고, 또 오끼나와 주둔 중인 해병대원과 해군 세명이 12살 어린이를 폭행하고 살해함으로써 오끼나와현에서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촉발시킨 1995년과 같은 달력상의 날짜에 따라 정확히 나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까호도 마사노리(仲程昌徳)가 오끼나와 문학의 백년을 돌아보며 미군기지와 관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과 오끼나와의 습속이나 전통을 기반으로 쓰인 것이라는 두개의 커다란 계보를 그려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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