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오늘의 문학을 생각한다

 

 

고은 高銀

시인.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 『내일의 노래』 『만인보』 『남과 북』 외 다수.

 

 

나는 이 자리에 역설적으로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어김없이 정보화시대라고 규정할 경우 내가 그런 시대에 일단 걸맞지 않을뿐더러 그 정보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적 인간으로 남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주가 일련의 정보유통이며, 실재와 실재 사이에 정보의 혈맥이 이어져 있고, 그 실재 자체도 구조화된 정보라는 어마어마한 확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정보에 대해 친숙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항상적인 삶은 정보의 전천후적 위력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이 놀라운 속도로 정보화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정보의 초과상태는 도리어 정보를 비정보화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의 문화적인 공익에 역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의 기억을 뒤져보면 그동안 정보가 뜻하는 것은 가령 60년대 이래 군사정권 30년 동안 가장 소름끼치고 저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가공할 억압체제로서의 정보정치를 통해서 그것은 권력 또는 폭력의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그것은 푸꼬(M. Foucault)의 ‘감옥과 벌’이 드러내는 비인간화나 크게 경계해야 할 집중적인 중앙통제를 위한 지배적 정보과학으로서의 야만적 장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는 일단 그 정치적인 의미를 변경함으로써 정치폭력에서 새로운 문명의 실질적인 기능 쪽으로 그 중요성이 바뀐 것입니다. 마침내 정보는 예상보다 빨리 인간의 삶과 사회·문화 전반의 경계를 초월하는 변화를 놀라운 속도로 주도해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식민지시대로 돌아가봅니다. 그 시절은 태어난 곳에서 죽는 일이 지속되는 오래된 자연부락의 단위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정체된 곳에서 전국을 떠도는 보부상이 나타나 마을의 퀴퀴한 머슴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들려준 먼 곳의 소식들, 이를테면 함경도의 어떤 사건이나 만주 봉천에서 일어난 일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알권리의 상상력은 불붙었습니다. 그만큼 정보는 황홀한 세계와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닫힌 곳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쯤 있어 마땅한 젊은이가 제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관살이를 할 경우 그 젊은이의 어머니는 애태우며 아들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녀를 위로할 때 마을사람들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소식 또는 사실에 관한 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보의 소박한 단초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6·25사변 당시 3개월 동안 인공치하에 있던 내 고향에서는 미공군의 프로펠러전투기에 이어 처음으로 나타난 제트전투기를 호주기(濠洲機)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인인 것을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잘못 알고 그 나라에서 보낸 처갓집 비행기라고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수준 미달의 엉터리 정보와 함께 소년시절의 나는 사는 곳 이외의 일에 대해 거의 무지몽매했습니다.

정보에 관한 한 나는 이런 정보의 원시시대에 의해 내 삶의 초기가 가능했습니다. 내 글쓰기 역시 이같은 막연한 전통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서당에서 한자와 중국 고전을 익혔고 고대 이래의 모필(毛筆)로 글자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식민지 국민학교에서 연필을 사용했고 그것이 잉크 철필과 볼펜으로 이어져 컴퓨터 글쓰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것입니다.

아니 나는 신시(新詩)의 개척자인 최남선(崔南善)을 만난 적이 있고 1920년대 혹은 3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작가들과 함께 문단의 일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나라에서 ‘신소설’을 ‘new novel’이라 직역함으로써 그것이 프랑스 누보로망(nouveau roman)이기 십상이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 그 ‘신소설’ 시대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읽어주는 이야기책 속의 사연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50년대 전후의 폐허에서도 실존주의의 한쪽에서 서정주(徐廷柱)의 「자화상」을 읽고 “애비는 종이었다…”를 중얼거리기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문학 전체가 나에게는 문학사 및 문학사적 평가의 대상으로 되는 시간의 크기 없는 현재로서의 대상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제까지의 글쓰기 방식과 글의 의미가 대체적(代替的)으로 변동되면서 오늘의 문학이 어제의 문학과 난데없이 구별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18세기 빅또르 위고(Victor Marie Hugo)가 오랫동안 격조 있는 깃털펜으로 세계 시인 중 가장 많은 시를 썼고 많은 소설과 희곡을 남긴 작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는데, 그의 만년에 처음으로 상품이 된 만년필을 끝내 거부하고 깃털펜으로 일관한 일이 떠오릅니다. 지금 대부분의 글쓰기는 그런 고집 없이 이미 만년필이나 볼펜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글쓰기 도구가 바뀌는 것뿐 아니라, 문학의 여러 보편적 준거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과 문학 본연의 의미 변화에도 어떤 이유가 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식민지문학 이래 동시대의 여러 현장에 좌우세력이 있었고 해방기간 동안 좌우 및 그것의 합작노선이 할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의 편향을 조절하는 중도적 위상은 곧 두 편향에 의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사라졌으며, 전쟁 이후 오직 살벌한 적대관계로서의 두 분단문학 진영으로 갈라선 것입니다. 다만 4월혁명과 함께 새삼스럽게 각성된 남한문학의 가능성이 있게 되고 70년대 민족문학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지난날의 국민문학 및 순수문학이나 좌익세력의 문학과도 또다른 독자적인 출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오는 동안 우리 문학 역시 많은 상처와 치욕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이식론(移植論)을 극복하고 그것의 민족 공유의 자율적 전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국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괄처리된 고대, 중세 그리고 근세 가요형식들과 한시 및 한문학의 유산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계승을 담보할 수 있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근대문학과 근대 초극의 문학 역시 다양한 형태로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문학은 정치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문학 속의 정치적 주제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문학 속의 정치성 자체는 문학을 좀더 강한 가치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약한 감수성밖에 드러낼 수 없는 상태와 천민적이며 멜로드라마적인 것들을 단호하게 거절한 큰 규모의 서사세계와 웅혼한 서정성을 그런 정치적 요소 위에 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문학을 독자적인 위상으로 두지 않고 소외 내지 예속시키려 했습니다. 분단체제의 남쪽도 체제에 순응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두 노선에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영향을 주었고, 북쪽은 체제에 복무하는 수단으로서의 문학 이외에는 용납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같은 분단고착의 문학에 자기전환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문명적 변화는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한 단계적 도전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보화시대의 문학은 더이상 하나의 명분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은 몇시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정보화시대 문학의 현장을 삼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의 수와 내가 태어난 뒤에 일어난 사건의 수는 거의 같다.” 바로 이런 사건 누적의 시대가 오늘인 것입니다.

한국은 서방세계가 미래 예측 및 대비에 대한 화려한 씨나리오를 펼치는 동안 정치적으로 고통스러운 개발독재를 체험했고 좀처럼 수정될 줄 모르는 세계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이 분단모순과 함께 인간의 실존적 삶을 강제했습니다. 문학은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의 궁핍한 글쓰기와는 달리 거의 폭발적인 작품생산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른 문단인구도 급증한 것입니다. 그동안 식민지 시기의 국학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80년대 사회과학 및 90년대 인문학의 다양한 성과들과 함께 문학 역시 기존의 2분할적인 대결구조가 해체되어가는 여러 경향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정보화시대의 문학적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의 다면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에 대한 세계적 척도는 결코 너그러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동북아시아 주변부의 작가적 한계로부터 떨쳐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갈 때는 아직 본격적인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여전히 작가의 사회적 지성과 치열한 정신행위에 미달된 상태이고, 공부가 모자란 촌락적 직인(職人)에 지나지 않는 안일한 작가생활도 지적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역사 내용 혹은 세계의 여러 조건 위에서 결코 동요되지 않는 문학의 자존심을 갖추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릅니다.

특히 디지털시대, 싸이버시대 그리고 엄청난 정보의 해일 속에서 문학의 위기들에 대한 고도의 지적 대응이 요청되는 반면, 이제까지의 무방비적이던 문학의 대응력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전야(前夜)로서의 반성이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의 문학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는가를 인지해야 합니다.

여전히 결론 없이 완충된 리얼리즘인가? 근대화담론의 반복적 논쟁인가? 한국문학의 표면에 2도 화상을 입히고 지나간 포스트모던인가? 아니면 90년대 후일담 혹은 내재적인 사소설 놀이인가? 시의 상투적인 위기인가? 이런 질문들은 지난 80년대의 주사파와 PD 또는 모순론이나 사회구성체 논쟁 등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특히 여러 시각에서 포위하고 있는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분단상황을 공제한 보편적 지성의 탈민족주의의 위력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에 대한 민족 절실성의 설득력이 부족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가 나찌나 독재자의 명분이 되는 것을 뿌리쳐 진정한 민족공동체의 보편적 미덕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작가의 경우 지금의 분단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답보적 패배주의를 일상생활의 무의식으로 삼고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민족 및 민족통일의 문제는 정치과잉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진전에 따라 분단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 대부분이 의외로 뜨거운 통일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장차의 사회문화적 통합과 관련될 때 고무적입니다.

우리 문학의 모국어는 바로 이러한 염원에 기초한 실천적이고 당위적인 언어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문학이 영어를 비롯한 다른 나라 언어가 아닌 모국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떤 열린 가치도 특수성의 행복 없이는 관념화되고 만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문제를 가슴에 담고 나와 세계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에 참가하는 것이 오늘의 문학에서 요구되는 우리 자신의 창조적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이와 함께 대처할 것이 아날로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근본으로서의 아날로그에도 불구하고 시 혹은 문학이 디지털의 거대한 융합틀 속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시와 소설은 사실인즉 고대·중세의 음악적 요소들을 시각의 화면으로 바꾸는 활자문명의 형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중세 음유시인의 소멸과 다른 예술장르의 번성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멀티미디어는 기존의 문학을 어느 시기에 무효화시키고 그것을 현재의 작품이 아니라 지난날의 유산으로 내장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선 2005년쯤이면 종이책 70% 이상이 전자화할지 모릅니다.

몇해 전 나는 이미 6,70년대에 간행된 미래전망들이 담긴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공(人工)의 달이 뜨게 되고 마음대로 피부색을 바꿀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시의 행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한갖 불안도 없지 않았습니다.

또한 “1985년에는 미적인 것이 사회공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류에게 반복적인 노동이 소멸되고 인간은 물질적 강제나 생존을 위한 온갖 장애에서 해방되어 정신의 모험으로 시간을 채울 수 있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기후의 조절, 합성식료품, 달의 광물 채집, 재택(在宅) 민주주의(자동투표기), 만능가사로봇, 인공생명 그리고 자동번역과 보편언어가 일상화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그 속성으로 보아 중앙계산기라는 정보과학 독점의 통제사회를 지향합니다. 실지로 이상과 같은 현란한 문명은 아직 실현단계가 아닐지라도 동서냉전의 한 축이 무너진 이래 ‘세계화=미국화’라는 미국 주도의 세계편성을 통해서 이미 초제국주의적 ‘중앙계산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지난날의 반외세·반제국주의 운동으로는 극복되지 못하지만 세계시민운동의 가능성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오늘날 새로운 저항능력의 출현으로 어느정도 극복될 수 있습니다. 즉 종래의 정치 중심의 저항이 아니라 세계시민 혹은 지역시민의 사회문화운동을 통해서 거대세력의 독점과 국제금융의 횡포를 막는 일입니다. 오늘의 문학이 단순한 문예주의의 한계 안에 안주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고 거기에서 문명사회에서의 변함없는 인류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반영시켜야겠습니다.

나는 감히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위기를 말할 때, 그 위기에 파묻혀버릴 것은 파묻혀버리기를 바랍니다. 위기란 어떤 가치가 존속되는 과정에서 단련받는 시간입니다. 그런 단련을 견디지 못하는 가치란 미련없이 새로운 가치에 일체를 인계하고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일정한 행운에 의해서 온존된 문학이 문명의 낯선 현실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문학이 시대를 뛰어넘든 아니든 시대의 산물일 경우 다른 시대까지 욕된 생존으로 연장되는 일에 급급한다면 그것은 문학적일 수 없습니다. 만약 문학이 지구상의 생명 종(種)의 하나로 소멸된다면 가차없이 생명 자체를 내주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멸종으로 죽어가는 문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문명의 패권주의 앞에서도 살아남는 치열한 문학의지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문학의 경우 그동안 많은 문학적 위기를 넘어온 경험들이 있습니다. 가까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그 대량학살의 폐허에서 시의 의미에 대한 심각한 절망이 있었습니다. 이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이후의 모더니즘의 출현 역시 하나의 위기적 산물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조선전기 한글이 창제된 것은 그때까지의 통치언어인 한자만으로는 사회가 운행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피통치화로서의 한글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 이미 한시 내지 한문학의 위기가 왔던 것입니다. 그런 위기의 계급적 해체와 함께 조선후기의 눈부신 중인층 한문학이 꽃피었습니다.

이런 한문학이 문학의 주류세력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원인은, 근대문학의 언문일치와 한글 사용에 있고 시조 역시 그 창(唱)의 음악적 권위를 잃자 새로운 시적 조건으로부터 밀려나 변방지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시 역시 일제강점기의 모국어 금지와 소외로 그 맥락을 잇다가 한국전쟁의 충격 이래 수많은 격변을 통해서 언어의 강점과 그 반대의 취약성과 함께 위기마다 점차로 다져지는 역동성을 갖추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한국문학은 각각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장인적(匠人的) 헌신과 밀도 그리고 큰 국량들을 담은 작품을 생산해내야 할 것입니다. 엄수되어온 장르에 대한 글쓰기 형식의 해방도 서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의 시가 보석과 같은 각인적(刻印的)인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일과 다른 형식에 스며드는 일, 한편의 소설이 인간과 자연 혹은 세계의 진실을 퍼담은 존엄스러운 생명감을 불어넣는 일을 새로이 요청합니다.

이로부터 시와 소설은 이전보다 더 가혹한 현실에서 그 생명의 진폭을 이어갈 것입니다. 문학은 이전의 오래된 합의에 의해서 보호받던 것과 달리 문명의 다면적인 충격과 역경 속에서 그 적나라한 생멸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독재자의 검열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검열을 거친 문학, 이제는 동인(同人)의 사랑이 아닌 증오하는 사람이 반하는 문학, 이제는 동포가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달려오는 문학을 할 때입니다. 요컨대 문학의 비약적 자기쇄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통상적으로 위기 혹은 소외의 대상이 되는 문학이야말로 진짜 문학만이 남겨지는 재난 속의 영광에 자리잡을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같은 놀라운 사건들은 시장논리를 적극적으로 경계함으로써 문학의 비영리성을 지켜나갈 고전적 의무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아날로그는 지난 시대가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이고 진정한 디지털은 오늘 이후의 미지입니다. 현재 속의 아득한 원시와 미래 속의 어떤 원시 그것들이 시의 자궁입니다. 문학은 인류의 유한에 이르기까지 존속됩니다. 그래서 정보에 문학이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속에 그것들이 선택적으로 들어가 육화되는 것을 우리는 인지합니다. 아직도 문학은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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