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완전소중 시코쿠
번역의 관점에서 본 황병승의 시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로 『얼굴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등이 있음. septuor@hanafos.com
지난해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유형진의 『피터래빗 저격사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김이듬의 『별 모양의 얼룩』, 김근의 『뱀소년의 외출』 등 색다른 형식과 기운을 지닌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꼬리를 물고 출간될 무렵, 한 일간지의 문학담당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들 ‘엽기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나를 이런 야릇한 시들의 지속적인 옹호자로 여기고 있었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추어 짧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우리 시를 지탱해온 힘은 자연에 대한 농경사회적 정서와 모더니즘으로 훈련된 문화적 감수성이었다, 90년대 이후 강력하고 날카로운 정치적 내용을 담은 시들이 퇴조한 자리에 맨 먼저 드러난 것이 전자의 허구성과 후자의 추상성이었다,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들은 이 두 문화의 틈새에서 자라온 서울의 하위문화와 지방도시의 반지방문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들 시가 발휘하는 강렬한 힘은 모든 종류의 하층문화가 지니고 있는 사실성과 직접성에서 기인한다. 나는 이 대답 끝에 “시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면 이 말에는 ‘엽기시’라는 명명에 항의하자는 겉뜻과 내 주장의 강도를 낮추자는 속뜻 외에도 시의 존재방식과 윤리에 대한 풀기 어려운 질문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한다면 이 의견 자체를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들 여러 시집의 힘과 그 방향을 심도있으면서도 집약적으로 표현한 황병승(黃炳承)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의 해설에서 이장욱(李章旭)은 이미 이 시집이 “비주류 하위문화의 정신으로 충만해”1 있음을 명백하게 지적했으며, 이 문화와 다른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시인이자 시 비평가인 송승환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암시받은 바가 크다. 그래서 내 몫으로 남게 되는 것은 시의 존재방식과 윤리에 대해 혼자 품었던 질문 정도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일반론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비주류문화가 시의 형식을 빌려 주류문화를 압박하고 그와 소통을 꾀하는 양상을 고찰하여 이 문제를 둘러싼 구체적인 성찰의 한 실마리를 붙잡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하류문화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를 번역론의 관점에서 읽으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선 시집 속의 게이 시코쿠와 그의 친구들이 속한 문화는 그 자체를 위해서도 주류문화를 위해서도 일종의 번역과정을 거쳐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김현미(金賢美)는 저서 『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또 하나의 문화 2005)에서 문화번역의 개념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과 그 인근도시에만 해도 여러 외국의 이주민들과 탈북자들이 30개가 넘는 이산마을에 흩어져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거나 새롭게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체계 안에 다양하게 들어와 있는 이질적인 삶을 바르게 해석하고 성찰하기 위한 문화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대치하는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른 것으로, 타자의 언어, 행동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번역행위가 항상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행위의 시공간적 맥락과 번역자의 성향에 따라 “두 문화적 행위자간의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위계적인 관계를 고착시키기도 한다.”(48면) 시코쿠들의 문화는 이산마을에 자리잡은 이주민들의 그것이 아니지만 주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타자적 성격은 동일하며, 그 내재적 의미를 파악하여 관계 맥락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것이라면 이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마도 관계 맥락의 설정이 끝없이 천연(遷延)되거나, 경계 짓기와 맥락 세우기가 고의적이건 아니건 혼동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동성애자들과 가출청소년들과 자폐증을 연기하는 자들의 문화이며, 가정과 학교와 사회질서에 반항하고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을 거부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이 문화를 통틀어 지극히 당연한 듯이 언더그라운드 문화라고 부를 때, 이 명명은 거기에 일정한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내재하는 문화적 가치를 제한하고 그것이 주류사회에 미칠 영향을 방어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이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명명에서 하나의 해방구를 발견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도롱뇽의 잘린 꼬리 이상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수는 없다. 번역은 항구적인 잠정상태에 놓이고, 두 문화는 번역의 유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을 공유한다. 이때 주류사회는 방탕한 아들이 언젠가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오게 될 길을 섣부른 문화번역으로 영원히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으며, 시코쿠와 그의 친구들은 “늙은 마초들”(「핑크트라이앵글배(盃) 소년부체스경기입문(入門)」)의 오역이나, 기껏해야 “아줌마 아저씨들”(「세븐틴」)의 나쁜 번역을 일단 면할 수 있다.
시코쿠의 친구들은 번역을 거부한다.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sauce」의 화자가
이쪽으로 가면 석달 열흘 춤만 추는 광대 원숭이가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밤낮 겨울 봄 슬픔을 길어올리는 울보 토끼가 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나뭇등걸에 서서 체셔 고양이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었다
고 말하면서 자신의 도정에 대한 진지한 선택을 포기할 때, 이는 번역과 문화해석에 뒤따라오게 될 재난, 곧 주류사회의 가치이념에 따른 강제적 줄 세우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븐틴」의 악동은 나쁜 번역의 비밀을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결국 모두 한 이웃이라고 아줌마 아저씨들 입을 모았지만
우리는 오를 살해하고 구체적으로 타지(他地) 사람이 되어갔어
- 이장욱 「체셔 캣의 붉은 웃음과 함께하는 무한 전쟁(無限戰爭) 연대기」,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 19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