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요즘’ 청년들의 트릴레마

최근 소설 속 일과 사랑에 관하여

 

 

전승민 田承珉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레즈비언 구출하기: 침묵, 방백, 그리고 대화」 「만질 수 없음을 만지는 언어」 등이 있음.

nrz5haeyo@naver.com

 

 

1. 상호 침범하는 섹슈얼리티와 노동

 

사랑하거나 일하거나 혹은 그 둘 모두를 거부하는, 인간은 이 세가지 실존적 상황 중 최소한 하나에는 해당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고사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부터 어려워진 시대다. 사랑은 어떤가? 온몸을 바쳐 사랑할 만한 끌림의 경험은 너무나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차원의 것이 되었고, 결혼은 더 나은 수준의 삶을 살기 위해 각기 가진 자본을 결합하는 계약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생활이 곧 생존의 연속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처럼 일과 사랑으로 시선을 모을 때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윤곽이 좀더 드러난다.

질문은 한번 더 쪼개진다.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섹슈얼리티나 젠더는 공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노동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둘은 상호 침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울에서 취업에 성공한 남자와 서울로 진입하지 못하고 지방 소도시로 다시 돌아간 여자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유리천장을 뚫고 힘들게 입사한 회사에서 팀장과 부장을 거쳐 임원까지 승진하려는 여자는 과연 회사에서도 ‘여성’일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에 함께 성공하고 서울의 아파트를 구입하기도 한 이들의 연애는 마냥 안정적일까?1 노동과 섹슈얼리티의 공모관계는 매우 치밀하고 음험해서 분리가 어렵다. 노동과 생산조건이라는 유물론적 토대가 섹슈얼리티와 젠더, 사랑이라는 관념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역으로 그 성적 실천이 생산과 노동의 물질성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가령 모종의 이유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연애로 인해 승진이 좌절될 수도 있고, 혹은 회사의 ‘자비로운’ 대출상품 덕에 애인과 함께 살 보금자리를 마련해 더욱 안정적인 연애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 청년 주체들의 노동과 사랑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다음 세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보자.

 

 

2. 프레카리아트 피터팬: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모든 유혹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무한경쟁과 제로섬 게임을 사랑하도록 유혹한다 할지라도 매혹되지 않는 자는 분명 있다. 송지현의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의 화자는 그 힘의 변두리에 조용히 기거하는 삼십대 여성이다. 인디밴드 가수를 꿈꾸던 ‘나’는 고시원에서 ‘임시’로 거주하다가 낙향하여 지방 소도시의 시장 근처에서 이모와 지내기로 한다. 스스로를 “한치 같은 인생”에 비유하는데, 한치는 돈을 주고 사 먹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주문하는 메뉴라서다(163면). 이는 인력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재단할 줄 모르는 사람이나 자신을 고용할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고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낙담의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고 취업에 필요한 능력을 계발할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2로 노동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슬픔을 갖는 것도 아니다. 대신 천천히 걸어가는 거북이처럼 고요하고 느린 평온함으로 둘러싸인 그 일상의 표피 아래에는 어색한 접속사와 말줄임표로 압축된 강렬한 정서가 숨어 있다.

 

나는 남을 죽이고 내 인생이 망가지는 악몽을 자주 꾼다. 악몽 속의 나는 항상 사소한 실수로 살인을 한다. 원망도 증오도 없다. 그런 실수로 인생이 망가져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시체를 유기한다. (중략)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데 망가지지 않은 것이 맞나? 어쨌든.

그래서, 나는 휴먼고시원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모의 일도 미리 배울 겸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거였다.(164면, 강조는 인용자)

 

꿈속이지만 사람을 ‘사소한 실수’로 죽이고 그로 인해 자기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적극적으로 시체를 유기하는데, 그런데도 인생이 망가졌는지 아닌지는 불확실하다는 마음이 말줄임표 안에 들어 있고,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이어지는 ‘그래서’라는 전혀 개연성 없는 접속사에는 사유와 결단의 부재가 들어 있다. 자기 인생이 망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하게 감지하기 어렵거나 혹은 감지하고 싶어하지 않는 화자는 사태 파악에 있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을 유보한다. 이 프레카리아트적 산책자(flaneur)의 정념은 정념이라 부르기 머쓱할 정도로 식은 밥처럼 뜨뜻미지근하다.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를 거닐며 십대 시절을 추억하지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상대가 당최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으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가 진지하게 의문시하는 것은 소머리국밥집인데 왜 돼지머리를 대야에 담가 둘까 하는 것 정도니 말이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 산책자는 그러나 자신의 현재 상황이 다분히 임시적이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한다(“우리 모두 이곳을 임시로 거쳐 가는 것이 맞겠지요, 휴먼?” 162면). 이 프레카리아트 산책자에게도 주택 마련의 꿈은 분명 실재했다. 다만 현재 임시적으로 유보하는 중일 뿐이다. 우리의 이 여성 프레카리아트는 룸펜처럼 ‘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극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선택과 결단을, 나아가 상황을 제대로 감각하는 일조차 끝없이 미루면서 현재라는 순간의 욕조에 몸을 담그며 머무르고 있다. 물 온도는 역시, 뜨뜻미지근.

하지만 이토록 평평해 보이는 ‘나’의 서사에도 애정의 삼각관계가 있다. 시장 내 청년몰에 입점한 핫도그집 사장,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첫 키스 상대로 뒤늦게 밝혀지는 동창 b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서사 전체를 지배하는 느슨함은 연애 관계에도 물론 적용되어서 이 삼각 구도는 그 어떤 긴장도 암투도 경쟁도 포함하지 않는다. 삼십대의 연애는 모름지기 대개 조건을 앞세운 결혼을 염두에 둘 때가 많지만 화자는 서울에서 재취업에 성공한 b를 핫도그집 사장보다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업턱을 낼 테니 서울에 언제 오느냐 묻는 b에게 ‘나’는 이유 모를 화가 난다. b를 통해서 서울에서 다시 음악에 도전하려는 생각을 가지거나 주택 구입의 꿈을 되살려볼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

  1.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탐구하며 다음과 같은 소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송지현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 장류진 「공모」(『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그리고 박상영의 세 소설 「요즘 애들」(『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우리가 되는 순간」(『릿터』 2021년 12월/2022년 1월호), 「보름 이후의 사랑」(『악스트』 2021년 9/10월호).
  2. 불안정함을 뜻하는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 그들은 노동하지 않거나 못하는 ‘노동자’층이며 직업적인 전문성과 안정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불안정한 벌이로 생계를 가늘게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