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상영 朴相映

1988년 대구 출생.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가 있음. sang783@hanmail.net

 

 

 

우럭 한점 우주의 맛

 

 

1

 

밤새 마감하느라 늦잠을 자버렸다. 대충 세수만 하고 가방을 들었다. 엄마는 아마도 짜증을 꾹꾹 눌러가며 병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을 터였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엄마와 함께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벌써 오래되었다.

계단을 내려오다 습관처럼 흘끗 우편함을 바라봤는데, 서류봉투가 꽂혀 있었다. 꺼내서 만져보니 두툼한 서류뭉치였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뭐지 하는 마음에 서류봉투를 뜯어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가 나왔다.

그것은 오년 전 그에게 던지듯 건넸던 나의 글, 일기였다.

나체로 전신 거울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으로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검은색 펜으로 휘갈겨 쓴 일기 위에 빨간 펜으로 교정기호며,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내가 쓴 일기의 교정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닷새도 아닌 오년 만에. 나는 종이뭉치를 세게 쥐었다.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대한 기억들이, 격렬한 감정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들어왔다. 아직도 내 집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뭉치의 마지막 장은 내가 아니라 그가 휘갈겨 쓴 쪽지였다. 그의 필체로 적힌 빨간 글씨들이 눌어붙은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형이에요. 작가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원래 이름에 ‘제’ 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맞죠? 예명을 쓰나봐요.

누굴 놀리나. 아무리 예전 일이라도 그렇지 일년도 넘게 만났던 사람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다니.

살이 많이 쪄서 사진으로는 못 알아봤어요.

됐다. 두번 볼 것도 없다. 넌 그냥 쓰레기통행이다 생각하며 쪽지를 찢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문장.

엄마 건강은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그땐, 미안했어요. 여러모로. 다.

남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그냥 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될 일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용건을 적어놓았다.

그간 몇번이고 연락을 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있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몇년이고 시간이 흘렀고 전화번호가 바뀌어버렸더군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일정이 빠듯해서 그럽니다. 월요일에 급하게 출국하게 되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아예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괜찮다면 이번주 일요일, 예전에 약속했던 시간에 약속했던 장소에서 만나요. 꼭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번주 일요일이면, 이틀 뒤였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나에게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줘야 할 물건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우리 사이에 더 주고받아야 할 건 욕밖에는 없었다. 서류봉투째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마음과,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소중히 보관해놓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결국 봉투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길을 걷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이렇듯 격렬한 신체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자존심이 상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핸드폰의 메모장 앱을 켰다. 그리고 한 문장을 적었다.

오년 전, 나는 그를 엄마에게 소개하려 했었다.

 

*

 

다행히 엄마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곧장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보호자용 침대에 앉았다.

엄마의 입원이 장기화되자, 병실에 엄마의 물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담긴 반찬통과 과일, 서랍 속 과도, 박하사탕 한봉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액자 하나. 열한살의 나와 서른아홉의 엄마가 나란히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엄마는 학사모를 쓴 채 정체 모를 형상의 동상 옆에 기대 서 있고, 엄마 다리맡의 나는 데님으로 된 멜빵바지를 입은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찍힌 내 사진을 보면 모두 미간에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더러운 성격은 아마도 기질상의 문제인 것 같았다. 사진 옆에는 올해 출간된 내 책 두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병문안 온 손님들을 위한 물건이었고, 정작 엄마는 내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내 책뿐만 아니라 내가 쓴 모든 글을 강박에 가까울 만큼 철저히 읽지 않았는데, 노안 때문에 글씨가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려서 못 보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무살 때 대학신문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선되면 백만원의 장학금을 주는 대회였는데, 마침 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는 동기가 경쟁률이 낮다는 얘기까지 해줬다. 언제나 술값이 모자랐던 그때의 나는 별수 없이 학력 콤플렉스가 심해 방송통신대 학위를 두개나 따고 난 후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투신하는 오십대 여성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것이 당시의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던지듯 출품했던 내 첫 소설은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으며 당선됐다. 엄마는 어디선가(아마도 모든 소문의 원흉인 교회에서) 그 소식을 주워듣고는 내 당선작이 나온 대학신문을 구해다 읽었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네 마음이 그렇게 아팠다니, 내가 그렇게도 너를 그렇게 착취해왔다니……” 안방 문을 넘어올 만큼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엄마, 소설은 그냥 소설이야. 다 지어낸 거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들릴 턱이 없었고 그후로 엄마는 내가 쓰는 그 어떤 글도, 심지어는 바닥에 떨어진 리포트나 메모조차도 읽지 않는 몸이 되었다.

—명희가 네 책 재밌다더라. 지금까지 나온 건 죄다 사 봤대. 걔가 우리 중에서 제일 똑똑하잖니. 숙대도 나오고. 네 글 보더니 애가 아주 착하게 큰 것 같대.

지난 삼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해봤자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鷄姦)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피우는 사람들 얘기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뭘 보고 착하다는 건지. 두번만 착했다간 사람도 죽이겠네. 아무튼 교회 아줌마들의 립 서비스는 알아줘야 했다. 엄마가 특유의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기도 힘들다고 얘기하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엄마가 하도 코를 골아서 엄마와 같은 방을 쓰던 환자가 두번이나 병실을 옮겼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벌써 두달 가까이 이인실을 혼자 쓰는 중이었는데,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뭐가 마음에 안 든다 난리더니 막상 아무도 없으니 밤에 저승사자가 너무 쉽게 데려갈 것 같다는 둥 사십년 차 기독교인답지 않은 샤머니즘적 발언으로 다채롭게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엄마 사과 깎아줘?

—입이 쓰다. 그냥 사탕이나 까줘.

생전 단것을 먹지 않다가 암수술을 한 뒤로는 계속 박하사탕을 찾았다. 어떤 날은 밥도 먹지 않고 사탕만 물고 있어 억지로 뱉게 한 적도 있었다. 소화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병실에서 풍기는 병자 특유의 콤콤한 냄새를 감추기 위해 이불과 침대에 섬유탈취제를 뿌렸다.

육개월 전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수년 동안 잠잠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비극도 희극도 너무 길어지면 하나도 좋을 게 없어서 이 모든 패턴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나는 장례 말고는 암환자의 가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어쩌면 이제 겪어보지 않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될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

 

엄마의 몸에서 처음으로 암이 발견된 게 벌써 육년 전이었다.

당시에 나는 이십대 중반의 인턴이었다. 육개월에 걸친 인턴 기간의 막바지였으며,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열명이었던 인턴 중 최종까지 남은 사람은 셋. 그중 한명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그것이 유일한 남성인 내 차지가 될 확률이 높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오십대 남녀의 정치적 성향과 건강의 상관관계 조사 연구 보고서 팀에 보조 연구원으로 투입되어, 백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던 찰나였다. 공교롭게 오십대 중도 우파 성향의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평소처럼 두번 그녀의 전화를 거절했으나, 그녀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별수 없이 회사 내선번호로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코리아……

엄마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암이래! 자궁암! 할렐루야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보름 전 배 속에 진달래꽃이 만개하는 꿈을 꾼 후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고 자궁암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었다. 인맥관리 차원에서 교회 사람들에게 들어놓은 여러개의 암보험에서 진단비만 이억이 넘게 나온다고 했다. 그 돈이면 지금 우리 모자가 살고 있는 잠실 아파트의 남은 대출금을 얼추 다 갚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실손보험에서 수술비가 나오고, 수원과 안양의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그럭저럭 우리 두 모자가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엄마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엄마는 외할머니도 엄마도 둘째 이모도 모두 암에 걸렸으니 너도 백 퍼센트 암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내 명의로 암보험 두개를 더 계약하자고 했다.

퇴사 의사를 밝히는 내게 차장이 말했다.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곳에 붙은 건가?

그게 아니라 홀어머니가 암에 걸려서요.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때려치웁니다,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엄마는 남들에게 굳이 비밀로 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비밀로 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남세스럽다’는 것이었다. 대찬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묘한 포인트에서 수치심을 느끼곤 했던 그녀는, 자신의 병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 엄마는 이십년이 넘도록 관리해왔던 회원들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성지순례를 간다고 휴직 선언을 했으며, 친구들뿐만 아니라 이모들에게조차도 병을 알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아픈 게 뭐 대단한 흉이라고 저 난리일까 싶기는 했으나, 순순히 엄마의 비밀에 동참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차장에게 퇴사 후 글을 쓸 거라고 해버렸다. 평생 꿈꿔왔던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꿈 그거 좋지. 그러나 이거 하나는 기억하게. 기회는 기차와도 같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첫번째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보름 후 엄마는 자궁암 명의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한 종합병원 수술대에 누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다며 수술할 때 마취를 하지 말아달라 의료진에게 요청해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정신과 진료도 함께 받게 되었다. (드디어.)

사진상으로 대단할 것이 없으리라 추측되었던 엄마의 암은 막상 열어보니 꽤 심각한 상태였다. 임파선으로 전이 소견이 있으며, 간의 상태도 좋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여러단계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궁 적출 수술 후 육개월 동안 몇번의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음에도, 엄마의 암세포는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교양 수업에서였다. 많고 많은 강의 중 ‘감정의 철학’ 수업을 수강한 것은, 당시에 내가 정말로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의 덕목에 맞게 영어 점수를 만들고, 각종 회사의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모자라, 엄마의 병수발을 들며 엄마의 간절하고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하루에 한번씩 산책까지 시켜줘야 했다. 몸과 마음이 골고루 병든 병자를 종일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까지도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또 얼마간은 엄마라는 불행의 진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카데미에 갔다. 수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롤랑 바르뜨의 『밝은 방』과 『사랑의 단상』을 부재로 삼아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을 나노 단위로 쪼개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 수업 때 ‘재야의 철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사는, 강의력이 부족한 많은 강사들이 그러하듯 수강생들에게 자기소개를 강요했다.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수업이라 그런지 열다섯 남짓의 수강생 중에 반수 정도가 사회단체 활동가였다. 그들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속한 단체나 믿고 있는 신념, 성적 지향 같은 것을 밝혔고,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도 중도좌파에 남성 호모섹슈얼,이라고 고백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살짝 사로잡혔으나, 그냥 본명을 말하고 대학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조바람님, 제임스님, 셀리님, 맙소사님, 가을의 전설님, 유타님…… 국적과 출처를 알 수 없는 활동명과 닉네임이 줄줄 이어졌다. 모두가 소개를 마칠 때쯤 한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키가 몹시 커 문에 닿을 듯했고, 그래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자. 기십년은 된 듯한 이스트팩 백팩에는 태극기가 오버로크되어 있었고, 낡은 후드를 입은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 후드를 벗었는데 목과 손가락에 길게 문신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파충류의 꼬리 같은 것. 저 무늬를 타고 올라가면 어떤 모양이 그려져 있을지, 문신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훑다보니 나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켜버렸다. 갑자기 남자가 내 옆에 바싹 다가왔다. 귀부터 발끝까지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죄송한데, 커피 한모금만 마실 수 있을까요?

남자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앞에 놓인 일회용 커피잔의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의 움직임이 슬로우모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남자는 (아마도 몹시 뜨거웠을)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자기소개의 마지막 순서였던 남자는 자신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작곡을 하는 것도, 미술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을 한다고 하는 그 문장이 이가 시릴 정도로 쿨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불길한 관종의 기운을 느끼고야 말았다.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난 후 남자가 내게 다가와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까 마신 커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음료를 허락도 없이 마시질 않나 남자의 말투며 눈빛 같은 게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만은 않아,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남자는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그와 아카데미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하게 된 것은 도의적인 차원에서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고 실은 그가 너무너무 내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저음에 또렷한 목소리, 툭 튀어나온 눈썹뼈에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작은 입술, 선크림 따위 생전 한번도 닿지 않은 듯 군데군데 기미가 낀 피부까지. 성격은 이상한 것 같지만 그냥 얼굴이나 실컷 보다 와야지 하는 마음이 불길한 예감을 뛰어넘어버렸다. (그러는 게 아니었다.)

남자와 계산대에 나란히 섰는데 나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가 훌쩍 컸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것은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키인 내게는 좀체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자기가 커피를 마시자고 해놓고는 별말도 없이 그냥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 남자. 결국 내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목이 많이 마르셨나봐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침묵. 당시의 나는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비정규직의 쇼맨십을 온몸에 품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러라고 한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나서서 저는 대학생이고,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요즘 재밌게 본 드라마는 무엇입니다, 취미는 독서이고, 이 수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계속 하나 마나 한 말을 떠들어댔다. 그는 나를 훑듯이 쳐다보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쯤 입을 열었다.

—말을, 예쁘게 하시네요.

뭐래는 거냐 이 남자, 지금 나 끼스럽다는 거지. 게이인 거 티 난다고 하는 거 맞지. 그냥 하는 소리인가? 내 피해의식인가? 나는 괜히 기분이 복잡해져버렸고,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침묵. 아메리카노 잔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어색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이에요.

—네…… 네?

—그래서 어머니를 치료소에 입원시켰는데 몇번이나 도망쳤다가 이번에 폐쇄 병동으로 들어가셨어요.

—아…… 네.

—치료 방법을 바꿔봐도 도저히 차도가 없어요. 계속 숨겨놓고 술을 마셔요. 침대 옆에도 술병이 있고, 가방 안에도 있고. 미치겠습니다.

이 남자,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심지어 요즘은 알코올성 치매 초기 증상까지 와서 대하기가 영 녹록지가 않네요. 그래서, 엄마를 잡으러 다녀요, 사나흘에 한번꼴로.

뭐야, 돌았나. 갑자기 내 쪽에서도 거창한 가족사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장답게 죽도록 바람을 피워 열한살 때 이혼을 했으며, 엄마는 대한민국 중노년층 사망 원인 1위인 암환자랍니다, 말해야 하나. 아니면 더 대단한 사연을 지어내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해버렸다.

—저희 어머니도 아프세요. 자궁암. 수술받고 요양병원에 계셔서 요즘 제가 돌보고 있어요.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우리 공통점이 많네요.

엉겁결에 엄마의 투병 사실을 공개해버리고 나서야 타인에게 엄마의 병에 대해 털어놓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 수업 듣는 거 처음이시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여기서 열리는 인문학 철학 수업 거의 다 들었거든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이길래.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기억 못할 리가 없지.

그 말을 했을 때의 그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구보다도 여유로운 것처럼 굴었지만 자신감 없이 떨리는 눈빛, 머뭇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이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 경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농담으로라도 나에게 귀엽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정규교육 과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한번도 없었다. 누가 봐도 전혀 귀엽지 않은 게 그나마 내 귀여움의 포인트인데. 그런데 이 아저씨 뭐지. 이쪽 느낌은 아닌데. 노골적인 플러팅인가. 어쭙잖은 작업질인가. 아냐 그럴 리 없지. 나도 집에 거울이 있는데 내가 일부러 커피를 사줘가면서까지 작업 걸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하도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떨고 있다는 것,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으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만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뒤에 별일 없으시면 앞으로도 수업 끝나고 밥이나 같이해요.

그렇게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아카데미 근처를 돌아다니며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 주변의 지리며 맛있는 식당을 훤히 알던 그가 나에게 맛집(이라 불리는 가정식 백반집과 기사식당 등의 꼰대적 취향의 음식점)을 소개해주는 식이었고 나는 그의 내밀한 일상 공간에 초대받은 것 같은, 과장된 자의식에 젖어 있었다. (나중에는 그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아는 척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고 밥을 적게 먹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그를 관찰하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는데 손질되지 않은 짧은 머리와 웃을 때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입김, 쑥스러울 때면 한쪽만 올라가는 눈썹과 시옷 발음이 새는 습관 같은 것들을 속속들이 내 속에 담았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언제나 앞만 보고 빠르게 걷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 그보다 10센티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속도를 맞추며 걸었다. 그렇게 숨이 가쁜 채로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그가 한번도 내 쪽을 바라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연유 없는 절망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를 만나고 난 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감정을 휘저어놓는지 궁금했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감정들이 자꾸만 떠올라 초당 수천 미터는 뻗어가는 것 같았고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위해 마련해놓은 대학노트를 일기장 삼아, 그의 일상을, 나아가 그를 통해 변화하는 나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양이 늘어날수록 나는 그에 대해 더 알 수 없어졌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극도로 말을 아꼈으나, 어쨌든 출퇴근을 하지는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시시때때로 별다른 용건이 없는 문자를 보내왔으며(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노인들처럼 암에 좋은 음식이나 면역력을 높여주는 식품에 대한 기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고 난 후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의 일상이며(오늘은 칸트를 읽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모친의 알코올의존증 치료 상황과(어머니가 병원을 탈출해 술을 마신 뒤 택시 기사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다못해 매일 별다를 게 없는 일인분의 식사까지 찍어 보냈다(고등어찜을 먹었습니다). 나는 그런 그의 메시지에 간신히 아, 네, 힘드시겠어요, 밥 맛있게 드세요,와 같은 하나 마나 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마 끊어질라치면 그는 괜히 웃는 이모티콘이며 뚱뚱한 고양이 스티커 같은 것을 보내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없는 메시지를 보내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2

 

토요일 오후, 요양병원에서 힐링 요가 수업을 마친 엄마가 산책을 가자고 나를 채근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산책길이었으나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보내온 종이뭉치가 내 일상을 통째로 다른 것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마치 오년 만에 돌아온 기차를 잡아탄 것처럼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저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감을 일주일 정도 늦추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나는 엄마와 함께 공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길만 건너면 올림픽공원이었다. 엄마가 기대듯 내 팔을 잡았고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은 모자처럼 보일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십분쯤 걷다 호수 앞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재발한 암일수록 생존율이 낮다고 했다. 모든 것이 두번째였기 때문에 포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암이 전이된 간의 일부와 담도를 적출한다고 했을 때도, 다섯번의 항암 치료를 더 하게 되었을 때도, 일년 이상 생존할 확률이 20퍼센트가 넘지 않는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도 우리 모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팀장은 사정이 나아지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말했지만, 서른한살은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새로 옮긴 요양병원은 집에서 도보로 십오분 거리였다. 경기도 외곽의 요양병원에 반년 가까이 입원해 있다 엄마와 가깝게 지내던 동갑의 폐암 환자가 죽은 뒤 급하게 이곳으로 옮겼다. 집 근처의 병원은 요양병원이라기보다는 호스피스에 가까운 곳이었고, 병실도 부대시설도 모두 호텔처럼 깨끗했다. 전문 간병사와 치료사들이 의학과 대체의학을 넘나드는 치료와 처치를 해주어,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 내가 할 일이 부쩍 줄었다. 내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병원비를 생각하면 형편에 맞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가장 편한 곳에 있게 해주는 것이 엄마와 내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더이상의 항암 치료를 포기한 채 요양병원에서 진행되는 통증을 경감해주는 한방 대체요법이나 힐링 요가, 마음을 다스리는 긍정의 명상법 같은 프로그램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 와중에도 암세포는 착실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엄마의 암세포조차 엄마를 닮아 몹시도 성실했고 통증의 범위와 형태는 다채롭게 변해만 갔다.

엄마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부축해 공중화장실의 장애인 칸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좌변기에 앉혀주고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방광 부근까지 암세포가 전이된 이후로 용변을 볼 때마다 부쩍 통증을 호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기침을 하는 등 복압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몸을 가누기가 힘든지 번번이 나를 찾았다. 나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엄마가 힘없이 오줌 누는 소리를 들었다. 몇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엄마는 다 죽어가는 마당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는 듯 당당한 손길로 내가 건네준 휴지를 턱 받아들어 닦더니 속옷을 올리고 얼른 자신의 바지를 추켜올려라, 몸을 일으켜 세워라 난리였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마지못해 뒤처리하는 것을 보고서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역시나 딸을 낳는 거였다”라고 삼십년은 늦은 후회를 했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나를 내버려둔 채 누구보다 호방한 자세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혼자 용변조차 제대로 못 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씩씩하게. 산책로가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건강박수를 쳤으며, 공기가 상쾌하다고 난리였다.

—미세먼지 수치가 100이 넘는데 상쾌하긴 뭐가 상쾌해. ‘매우 나쁨’이래.

확실히 암세포가 호흡기에는 전이되지 않은 거 같았다. 엄마가 내 시큼털털한 표정을 보고 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지 똥 기저귀까지 빨아가며 키워놨구만, 그게 뭐 대수라고 난리 법석을 떨어대는지. 하긴 너한테 내가 뭘 바라겠니. 너 외할머니가 암 걸렸을 때도 그랬어.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가 쪼르르 기어가서는 누워 있는 저희 할머니 뺨을 때리고 그랬다. 떼어놓으면 또 기어가서 뺨을 때리고, 문을 닫아놓으면 밀고 들어가서 때리고. 그랬던 애다, 네가.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어.

—아 정말, 도대체 언제까지 그 얘기 할 거야?

—죽을 때까지 하려고 그런다. 왜.

사망 카드가 먹히는 것도 한두번이지 기백번 똑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 싶은 마음까지 들 지경이었다. 엄마는 “얼마 남지도 않은 에미한테 좀 잘하라고, 다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다!”라고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첨언했다. 한번 시작한 타령을 끝낼 생각이 없는지 또다시 결혼 얘기를 끌고 들어왔다. 누구네 아들은 벌써 애가 둘이라느니, 총각 때는 순 망나니였던 애가 결혼하고 나서 판교에 아파트를 샀다느니, 매일 부르던 돌림노래를 또 부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결혼타령이지만 뭐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그녀가 평생 동안 나를 먹여 살려왔던 일이 그런 것이었으니.

 <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