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등이 있음.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엄마의 사십구재가 끝나고, 기오성에 대해 인터뷰해달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더이상 엄마가 없는 영종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옮길 곳을 인터넷으로 찾는 중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자신을 다큐멘터리 피디로 소개했다. 이메일 화면을 띄워놓고 한동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문경의 사촌에게 사과값을 주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과를 주문해 병실 사람들과 나눈 지가 오래인데 이제야 그 생각을 하다니. 나는 갑자기 초조해져 이체기록이 남았는지 엄마 통장을 들춰보다가 사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무슨 일인데?”

졸음이 묻은 사촌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지금이 열한시, 그쪽 시간표대로라면 모두 깊은 잠에 들었을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과값을 주지 않은 것 같다고, 지금이라도 보낼 테니 얼만지 알려달라고 하자 사촌은 사과? 하고 아직도 어슴한 잠결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니는 안 자나, 잠을 몬 자나.”

사촌은 아마 이모가 지불했을 게 분명하고 안 줬더라도 그 돈이 뭐가 중요하냐고, 괜찮다고 했다. 나는 늦은 시각에 전화를 걸었다는 미안함에다, 사촌이 괜찮다고, 정확히는 개안타고 하는 바람에 감정이 복잡해졌다. 잘 있어, 인사를 겨우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문경 한번 온나. 사과꽃 다 지기 전에 한번, 꼭.”

사촌은 어렸을 때 내가 시골에 간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과밭의 흰 무더기 꽃에 흥분하며 ‘서울내기 다마네기 사촌’이 종일 뛰어다녔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보니 얼마나 꽃을 올려다봤는지 뒷목에 붉은 줄이 여러개 잡혀 있었다는. 서울내기 다마네기는 서울 애들의 새침함을 놀리는 말이었다. 그 뒤 무엇을 하든, 성인이 되든, 마흔이 가깝든, 사촌에게 나는 여전히 사과꽃을 올려다보는 애였다. 내게 사촌은 깁스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병실에서 웃어 보이는 애였고.

전화를 끊고 나는 이럴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 몸에 밴 불안 같은 것이라고. 경계하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무언가가 엄마를 그냥 삼켜버릴 듯해 긴장했지만 실제로 정신은 그렇지 못해서 나는 일상의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어느날은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이 엄마와 함께 식당에 갔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항암을 할 수가 없다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병원에서 말해 부랴부랴 고깃집에 간 날이었다.

누구에게 계좌이체를 해달라고 부탁하려 해도 외우는 번호가 없었다. 엄마도 항암제가 잘 듣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있었다. 사촌을 떠올렸지만 엄마가 거기는 지금 한밤중일 텐데, 하며 망설였다. 하는 수 없이 엄마를 두고 차로 이십여분 떨어진 아파트에 나 혼자 다녀왔다. 엄마는 고깃집 창가에서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있었다. 간간이 모자가 뒤로 벗겨지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나는 엄마가 그런 풍경 속에 혼자 남겨져 있었던 데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화가 났고,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슴아슴한 눈으로 은경아,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병원에서도 나는 매일 실수하는 보호자였다. 언젠가 의사가 날 보며 엄마, 정신 차리자,라고 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나를 왜 엄마라고 부르지? 의아해하다가 내 나이대의 여자에게는 의사가 대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호칭을 나보다 더 거슬려 한 사람은 엄마였고, 선생님 우리 애도 선생님이에요,라고 어느날은 직접 정정했다. 엄마 그렇게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정이라는 이름의 그 피디는 기오성의 이십대 시절을 알고 싶다고 했다. 기오성과 같이 팟캐스트 일을 했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기오성에 대해서라면 내가 좀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가제는 ‘정치논객 기오성’이었고 취지에는 참여정부에서 촛불정국까지 청년정치의 현주소를 되짚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기오성씨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입니다,라고. 그런 만큼 그의 재조명이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요, 방송을 계기로 소재가 파악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용하는 이메일이리라 기대하며 보냅니다. 꼭 한번 연락을 주세요, 언제라도 상관없고 24시간 대기로 선생님 연락을…… 기오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2007년부터 ‘잡어탕평’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했고,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꽤 주목받았다는 사실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가 바로 그 녹음 스튜디오였다.

하지만 나는 이메일을 삭제한 다음 휴지통을 비웠고 포털의 지도를 움직여가며 이사 갈 집을 다시 찾았다. 옮겨 갈 도시는 많았다. 일산이나 김포, 부천, 아니면 의정부 쪽으로도 갈 수 있었다. 새로 구한 기간제 교사 자리는 서울이었지만 어차피 서울 시내까지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에서 지냈던 터라 어디든 상관없었다.

 

*

 

그해 여름 기오성과 나는 한 노교수의 종택(宗宅)에서 처음 만났다. 정년퇴임을 하고 명예교수로 있던 그가 그간 자기 문중의 숙원사업이었던 족보를 정리하기 위해 우리를 방학 동안 고용한 것이었다. 나는 한자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과에서 추천했고 기오성은 교수와 친분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그 집은 향토유적으로 지정될 만큼 유서 깊은 고택이었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세칸짜리 사랑채가 있고 그 뒤에 대청을 중심으로 ㄱ자 모양을 한 안채가 있었다. 고택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는 건물은 사랑채라고 했다. 수제 기와를 층층이 올려 위엄을 뽐냈고 마당 쪽으로 뻗어나온 방에는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격자무늬 유리창들이 달려 있었다. 일제시대의 흔적이었다.

처음 고택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도 그 화려한 사랑채였다. 그곳 툇마루에서 한 여자애가 마루 아래를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수의 큰손녀인 강선이었다. 이어서 기오성이 도착하고 우리는 안채에 짐을 푼 뒤 저녁을 먹었다. 나는 강선과 방을 같이 써야 했는데, 강선이는 유학을 준비 중이라 주로 서재가 있는 사랑채에 머문다고, 그냥 혼자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교수는 말했다.

둘이 써도 상관없어요.

나는 교수에게 그렇게 까다롭거나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 일부러 말했다. 지금 집에도 사촌이 올라와 같이 지내고 있다고. 교수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는지 사촌이 왜 올라오게 되었냐고 물었고 나는 한 전자회사에 취직해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촌이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고 첫 월급을 받으면 학점은행제를 운영하는 사설 교육기관에 다닐 계획이라고 말을 이었는데, 교수가 그래도 정식 대학이 낫지 않나? 하는 바람에 대화는 끊겼다. 할아버지, 누가 그걸 몰라? 그때 오리불고기를 뒤적이고 있던 강선이 좀 짜증 난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상황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뭐야.

그날 자는데 도시와 달리 주변의 기척들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어딘가에는 분명 대나무가 있는 듯했다. 산바람에 흔들리면서 딱. 딱. 하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된다기보다는 하나하나 마침표를 찍듯이 들려왔다. 아마도 기대가 없어서이지 않았을까. 대나무의 단단한 몸체가 서로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리라는 것에 당연히 나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들려도 그만, 들리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건 내일부터 내가 하게 될 경기도 광주를 본으로 한다는, 신라 6부촌장의 후손이라는 이 집안의 족보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노동이지 노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식당을 하는 엄마가 미리 해놓는 밀가루 반죽 같은, 희고 물렁물렁하고 둔중한 덩어리에 불과한. 그렇게 생각하자 아까 밥상에서 내가 사촌 이야기를 너무 길게, 자세히 한 것이 끔찍하게 후회되었다. 가장 신경 쓰였던 건 교수나 기오성이 아니라 강선이었다. 그애는 붉은색 머리띠로 앞머리를 완전히 넘기고, 습관인지 새끼손가락을 약간 들어올려 젓가락을 허술하게 잡은 채 반찬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강선이 무람없이 조부를 탓하고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던 모습이 도드라지며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음 날부터 기오성과 내 앞에는 그 집안의 오래된 세보(世譜)들이 놓였다. 문중의 공식 세보는 18세기부터 여러차례 정리되었는데 가장 최근은 1973년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한문으로 쓰인 그 책을 그대로 컴퓨터로 옮기고 이후 30여년 동안 대대손손 늘어난 후손들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사랑채 끝방에 작업을 위한 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기오성과 나는 처음 며칠 동안은 별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일단 세보의 내용을 노트에 정리했다가 오류가 없으면 그날그날 타이핑했다. 기오성은 뭔가 대화의 물꼬를 틔워보려고 몇몇 과 선배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지만 내가 내 학번부터 학부제로 바뀌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자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말 모르겠네요.

식사시간이 되면 교수의 사모가 안채로 우리를 불렀다. 사모는 개성 출신이라서 그쪽 요리도 해주었는데 항상 꿩을 아쉬워했다. 만두의 일종인 편수를 빚거나 칼국수를 끓이거나 언제나 우리가 맛있게 먹는 양을 보고 있다가 꿩이 있어야 하는데, 혼잣말을 했다. 없는 꿩을 왜 자꾸 얘기하느냐고 교수가 타박하면, 없으니까 말하죠, 있으면 말을 않지,라고 대꾸했다. 그런 식사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얘기들이 오갔다. 교수에게 최근 허리 통증이 생겼다거나 강선의 아버지가 목사라든가 하는 언급들이었다. 나는 이 세세연년의 족보 정리와 목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강선이 무슨 말 끝에 그러니까 둘이 만날 사이가 안 좋지, 하고 이죽거리는 바람에 모든 상황이 그대로 이해가 갔다.

교수는 우리를 은경양, 오성군이라고 불렀고 식사의 마지막을 늘 기오성에 대한 당부로 맺었다. 언제는 꽤 거구인 자신에 비해 약해 보이는 기오성의 체력이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 생활습관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기오성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 초점이 되었다.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사람들에게 휩쓸리면 안 된다고 교수는 여러번 당부했다. 그러면 기오성은 적 없이 운동이 되나요, 하고 슬쩍 웃으며 넘겼고 교수는 순진한 소리는 말게, 하고 경고하듯 손가락을 세웠다. 나중에 기오성은 누가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짧게 불평했다.

족보는 옛날 체제 그대로 인쇄되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매킨토시로 편집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읍내 인쇄소에 나가 타이핑한 내용을 매킨토시 파일로 만들었다. 명함이나 광고물을 찍는 영세한 인쇄소라 편집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곳 사장도 같은 문중이라 어쩔 수 없이 노력봉사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사랑채에 내내 같이 있다가 그렇게 기오성이 빠져나가면 나는 그때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리를 죽 뻗어서 맞은편 의자에 올려놓기도 하고 뭔가 생각다운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교수에게서 세달치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