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동네 촌장 이문구

 

 

황석영 黃晳暎

소설가. 중단편전집 『객지』 『삼포 가는 길』 『몰개월의 새』, 장편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등이 있음.

 

 

 

지난 2월 25일,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형이 작고했다. 나는 그가 의식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임종의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것도 무슨 전생의 인연이리라. 장례식장에서 내가 읽은 조사(弔辭)를 인용해본다.

 

명천(鳴川) 이문구 형!

나는 지방에서 형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서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이 들린 지도 두 해나 지난 일이 아닙니까. 워낙에 형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고 더구나 번거롭게 걱정을 주는 일은 한사코 피하던 성미였습니다그려. 그래서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을 했으면서도 동료들에게 전혀 알리지를 않아서 시인 신경림 선생이 같은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우연히 형의 병세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몇달 전에 베트남 작가들 환영연에서 형을 만났을 때, 볼이 팬 형의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 ‘대안의학’의 치료법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섭생에 힘쓸 것을 역설하자 형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그냥 내버려둘 거여’라고 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이미 수술했을 당시부터 예전 같으면 가망이 없었던 병환을 두해 동안이나 버티어온 것도 형 특유의 생명력이었다고들 말합디다. 그러니 그 원망스러운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져 있던 사람을 보고 나는 섭생 운운하였으니 형의 무심했던 대답은 그야말로 죽음에 초연한 말투였던 것입니다.

내가 병원에 당도하여 형이 의식을 잃게 되기 직전에 마지막 작별을 나눌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우리의 인연입니다. 육체에서 이승의 것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정신만 남아 있는 형의 몰골을 바라보며 나는 차마 울 수도 없었습니다. 형은 내가 다가서자 그 두툼한 손은 어디로 가고 앙상한 뼈다귀 손을 들어 내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 손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나는 내심 놀랐습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는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지요. 형이 내게 뭐라고 여러 말을 했지만 가래가 끓는 듯 목구멍에 걸린 소리라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형에게 속삭였습니다.

‘문구형, 내가 나중에 가게 되어 미안해.’

그러자 다시 형의 알 수 없는 말이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형의 손을 쥐고 말을 그만 하라고 했지만 그 하고 싶은 남은 말은 그치질 않았지요. 내가 다시 ‘나 여러가지로 미안해’ 하니까 ‘아니 아니’ 하면서 형은 고개를 여러번 흔들었습니다.

형과 사귀고 얼마 후에 우리가 밤을 새워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형의 가족사며 소설을 쓰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나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남자이며 또한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몇몇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꾸리던 청진동 골목과 주점들을 어찌 잊겠소이까. 어느해 겨울에는 광주에서 후배들과 함께 벌이게 되었던 제사에서 형이 화장실 안에 들어가 울음을 삼키던 광경을 가슴 저리게 기억합니다. 나와 김지하는 그때에 슬며시 밖으로 빠져나와 자리를 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을 ‘토박이 이야기꾼’이라고 하면서 나를 ‘외방 이야기꾼’이라고 비교하여 부르기를 좋아합디다. 나는 형과 함께 맛과 개성이 다른 이야기 세계를 펼치며 늙어갈 작정이었습니다.

옛 속담에 ‘시시덕이는 영 넘어가고 새침데기는 골로 빠진다’고 했는데 형이나 나나 새침데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문을 쓰는 자는 도회지의 삶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쓰는 짓이 천업(賤業)이어서 제발 언젠가는 때려치우고 ‘요새두 소설 같은 거 쓰냐’ 하고 후배들에게 되물을 날이 올 거라며 웃기도 했지요. 근년에 와서 형은 문단의 여러 작태 속에서 외돌았습니다. 어느 시인은 이러한 인생의 회한을 ‘쓰러진 자의 꿈’이라고 이름지었지만, 누군들 온전하게 이 만만찮은 시정의 삶을 견디어낼 수 있었겠소이까.

당신은 그야말로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자신이었습니다그려. 스스로 나대지도 않고 엇구수하게 자신을 지킬지언정 악착같고 명료한 맵시를 멀리하고, 비루하게 몸을 굽히거나 자립하지 못하는 처신을 일컬어 ‘쇤네 기질’이라고 일갈하였습니다.

나는 당신과 작별하기 전에 당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산복이가 산복이가……’ 하기에 얼른 ‘산복이 다 컸던데 뭘’ 했더니 ‘갸가 씨원찮아서……’ 그러고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요. 혈육에 대한 당신의 남은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나는 당신에게 ‘형, 이제 말 그만 하고 쉬어요’하고는 허리를 굽혀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얇은 살갗은 아직 따뜻했습니다.

鳴川 이문구 형! 오늘도 고단하게 잠든 우리들 베갯머리 위로 저 고향의 실개천은 웃으며 재깔거리고 또한 울면서 한도 없이 끝도 없이 흘러갑니다. 나 이제부터 먼 세상을 돌아 누구에게 찾아와서 속마음을 나누리까. 우리는 지금 탯줄 묻은 고향을 지키고 있던 우리네 촌장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내가 형과 동시대를 살며 글을 쓴 것은 행운이었고 함께 기억될 일 역시 또다른 행운일 것입니다.

鳴川 선생! 고히 잠드소서.

 

내가 이문구를 만난 것은 1971년 한국문인협회가 있던 『월간문학』 사무실에서였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로 1972년에 불타기 전에는 서울시민회관이 있었고 문인협회는 그곳에 있었다.) 무슨 신인특집을 한다고 편집장이 만나자고 하여 방문한 자리였다. 줄을 친 두툼한 돗꾸리 스웨터 차림에 머리는 헝클어졌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술이 두툼한 것이 밥깨나 잘 먹게 생겼다. 게다가 순 토박이 충청도 사투리에 텃세는 아닐지언정 자기 사무실이라고 어찌나 당당하게 말을 잘하는지 서울내기라고 할 수 있는 나도 그때 첫눈에 기가 눌렸다. 시속 말에 병아리 적에 눌린 닭이 커서도 모이를 감히 함께 쪼지 못한다더니 이문구에 대한 내 처지가 그러했던 셈이다.

뒤이어 내가 「객지」를 창비에 발표하게 되고 이문구의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길 건너 수송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던 창비 사무실을 드나들게 되면서 청진동에서 그와 자주 부딪치게 되었다. 당시에 백낙청은 잡지를 창간하여 운영을 하다가 미국에 나가 있었고 염무웅 혼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염모와 이모는 41년생 동갑내기로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서로간에 배포가 맞는 동무 사이였다. 내가 둘러보니 문단에는 그 무렵에 41년 뱀띠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43년생인 나는 두살 위의 형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라 교실에는 두살 서너살 나보다 위인 나이배기들이 들끓었고 동네에서도 나는 중간쯤에나 끼일까 말까 할 정도로 형들이 많았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