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시
우리들의 그늘진 왕국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여기는 민주공화국?
우리 삶을 조정하고 가동시키는 법과 규율, 제도, 그리고 사회계약 따위는 합리적 근거에 의해 마련된 사회적 장치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치들의 근본 목적은 빈부상하(貧富上下)에 따라 만들어진 계층적 위계를 최소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지켜내는 데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투쟁구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분명 누군가 합법성이라는 명목을 불합리한 방식으로 도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불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고 증식시키기 위해 악법을 합법화하는 데 있다. 교묘하게 다듬어진 사회적 장치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으로 연동될 때 권력적 억압의 전술은 최상의 효과를 얻게 된다. 악법의 합법화야말로 피지배자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권력자의 가장 치밀한 기획인 것이다. 이같이 합리성을 위장한 비합리적 권력구조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국가와 시민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살지만 이면적으로는 그 어느때보다도‘사회적 관계’에 개인적 삶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하게 분화된 소수집단의 이익관계는 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다.
부조리한 권력의 힘이 작동할 때 개인이 그것을 돌파하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보존에 위협을 느낄 때 정의나 정직보다는 권력에 순응하거나 동조하는 편이 개인에게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응과 동조의 메커니즘이 강해질수록 세계의 진실은 은폐되고 권력은 더욱 증식할 가능성이 커진다. 순응과 동조의 메커니즘이 보편화될 때 공모자들의 밀약은 더욱더 합리적인 가치로 탈바꿈하여 번성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가 곧 보편의 가치를, 다시 말해 여론이나 공론을 대변할 때 한 사회의 정신적·정서적 가치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소수의 희생 또한 무지막지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쾌락의 시대에 문학사회학이 유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진정한 합리성으로 기획되어 있는가? 나 또한 공모자는 아닐까? 우리 사회에 희생적 공모는 없는가? 이같은 생각과 더불어 이 세계를 고민하는 네 편의 문제작과 만날 수 있었다. 정병근의 「태양의 족보」, 박지웅의 「사회적 식사」, 김기택의 「슬픈 얼굴」, 우대식의 「택리지—겨울 남행」이 그것이다. 이들 시는 개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의 억압성을 예민하게 의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 권력자의 밀서(密書)
권력자의 최대 고민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보강하는 데 있다. 권력이 곧 그의 생존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좌가 위협받을 때 권력자의 시퍼런 칼끝은 날카롭게 벼려진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가 약할수록 권력자의 칼은 더욱 무자비한 것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 칼은 역적의 무리를 진압하고 왕국의 질서를 다시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피비린내를 불사한다. 이와 같은 절대권력은 중세의 봉건적 왕조에서만 통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근대사에 등장하는 몇몇 정치인들을 떠올려보면 권력의 만행이 인간사에서 쉽게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물질적 풍요가 미덕인 시대, 개인주의가 집단주의에 우선하는 시대, 그럼에도 불평과 불행과 부당함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이 시대에 권력은 더욱 교묘하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결박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더 철저하게 개인을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병근(鄭柄根)의 「태양의 족보」는 매우 흥미로운 발상을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의 저 유서 깊은 패륜은
가령, 내셔널지오그래픽식으로 말하자면 그게 다
무자비하면 할수록 외경스런 자연의 섭리란다
그러면서 순환하는 거라고, 인간은 그저 겸허하게 지켜보면서
뭔가를 궁구해야 한다고 나도 가끔 테레비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자연과 생명의 경이 따위를 햐, 햐, 가르치곤 하는데
그런 아비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벌써 불신과 권태의 낌새가 묻어 있다
저 눈빛이 언젠가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
음모와 반란, 살육과 숙청, 분서와 갱유로 얼룩진 아비의 역사가
저들에게 들통나는 날엔 나도 무사하지 못할 터, 설마 싶지만
(설마가 키운 방심 때문에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나는 그게 불안하여 아이들이 더 울룩불룩해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뭔가 단단한 것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으리라 결심해보는 것인데,
저 아이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아비를 추궁할 때쯤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