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우리말로 편입된 라깡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김종갑 金鐘甲

건국대 영문과 교수 jonggab@kkucc.konkuk.ac.kr

 

 

불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자끄 라깡(Jacques Lacan)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의 하나에 불과했다. 더구나 당시 담론시장을 풍미했던 미셸 푸꼬(Michel Foucault)나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철학자들의 위세에 눌려서 정신분석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체의 죽음”을 진단하고 예언하면서 “기표의 유희”의 굿판을 벌이는 세기말적 예언자·이론가 중 하나로서 풍문처럼 인구에 회자되곤 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라깡에 대한 관심은 본격적인 담론의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론이 소개되고 소화되는 단계적 과정이 그러하듯이, 당시에 상상계나 상징계와 같은 라깡 정신분석의 ABC 개념들을 비롯해서 수수께끼처럼 들리기만 하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구절 등에 대한 체계적이면서 학문적인 설명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때에는 “이상한 나라”의 라깡을 향한 호기심과 찬탄, 기대가 라깡을 논의하는 담론의 숨결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학문이라기보다 라깡은 하나의 감격이었다. 이론적 첫만남의 흥분이 잦아들고 비교적 투명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라깡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평자의 소견에, 2000년을 즈음해서 라깡은 학문적 논의의 장으로 편입되었다. 풍문과 유행이며 감격이었던 라깡이 비로소 우리 이론의 토양 속으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라깡의 재탄생』이 이 점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무려 716면에 이르는 『라깡의 재탄생』의 물리적인 방대함은 학문적인 방대함의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처음에 두 손으로 쥐어들었을 때 그 질량과 질감에서 오는 뿌듯한 감동은 차례에서 글들의 제목을 살펴보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12명의 국내학자들이 라깡의 이론, 라깡의 영향, 라깡과 다른 이론가의 비교 분석이라는 다양한 화두를 놓고서 씨름하며 고민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선 데까르뜨(R. Descartes)와 싸드(M. de Sade), 쏘쒸르(F. de Saussure)로부터 시작해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라깡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엮은이의 표현을 빌리면 “라깡 연구의 연륜이 그다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9면) 도처에 포진한 국내학자들이 이런 다양한 주제를 가뿐하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이 책의 편집과 기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0명이 넘는 학자들이 공동저자로 대거 참여하는 저술에서는 일관성이나 통일성을 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당연히 있어야 할 기획의 구심력이 학자들의 원심력에 의해서 해체되고, 공중분해되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이 방대한 저술에서는 엮은이의 의도가 공동저자의 편의나 사정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절충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평자가 단지 기획의 훌륭함에만 감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들쭉날쭉한 차이가 없지는 않았지만, 16편의 개별적인 글들도 평자에게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라깡의 이론이나 개념이 우리말로 완전하게 정착됐다는 사실을 가슴 뿌듯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라깡은 우리에게 외국인의 서툰 한국말처럼 다가왔다. 딱히 논리적인 차원에서 틀린 점을 지적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발성하는 어투의 생경함에 식상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라깡의 재탄생』에서는 라깡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지 않으면 아예 한국인으로 느껴질 정도로 라깡을 논의하는 언어가 우리말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난해하고 고매한 사상과 이론도 따지고 보면 언어의 문제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평자에게는, 라깡을 발화하는 언어의 유연함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일반독자를 위한 라깡 개론서로서 신문의 서평에 소개되긴 했지만 『라깡의 재탄생』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론서는 아니다. 평이한 개론서를 기대하고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가 있다면 다이달로스(Daidalos)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헛되이 라깡을 찾아서 헤매게 될 것이다. 물론 제1부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의 전부를 차지하는 홍준기(洪準基)의 글은 개설적인 글이다. “‘상징계·상상계·실재’라는 범주가 상당히 신비롭게 들릴지도 모르는” 아직 “라깡의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66면)들을 위해서 홍준기는 친절과 배려의 미덕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쉬운 문체로 라깡 이론의 전모를 소개하였다. 때로 그러한 저자의 미덕이 독자의 수준을 너무 낮춰잡음으로써 지나친 친절함으로 치닫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한 예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성적 욕망이라는 ‘파렴치한’ 개념을 상정하다니!”(46면) 오디이푸스 콤플렉스를 “파렴치한 개념”으로 생각할 정도로 프로이트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면 아예 이 책에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홍준기의 글을 통해서 평자는 오디이푸스 콤플렉스나 대상 a, 향유, 충동과 같은 라깡의 기본적 개념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었는데, 라깡의 다의적 난해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이론을 명쾌하게 섭렵하는 저자의 지적 역량과 넓은 시야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입부의 글을 제외하고 제2부 ‘라깡과 현대사상’, 제3부 ‘라깡과 현대비평’에 실린 나머지 15편의 글들은 입문서의 일부로 간주되기에는, 적어도 제재가 너무나 전문적이었다. 라깡 이론의 초입에 서 있는 독자들이 이러한 개별적 논문에 한눈을 팔다보면 전체의 풍경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깡의 재탄생』에 “내포된 독자”(implied reader)는 어느정도 정신분석의 입문식을 마친 수준높은 독자들로 전제되었음이 틀림없다. 서문에서 엮은이도 이 점을 분명하게 못박아두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힘으로 라깡을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다시 탄생시키고 자라나게 하는 것, (…) 단순한 소개의 수준을 넘어 라깡 이론의 정수가 만개할 수 있는 활기찬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이 저작의 기본취지다”(8면). 엮은이는 동료 학자들이라는 집단,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비판하며 논쟁의 장을 펼칠 수 있는 라깡 연구자들의 집단을 내포된 독자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자못 거창한 제목도 단순한 수사적 표현은 아닌 셈이다.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그러한 수준높은 기대의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논쟁적이거나 라깡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문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다양한 입구를 통해서 라깡에 다가서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동저자들은 비교론적으로 혹은 영향사적으로 라깡의 이론을 해명하는 작업에 촛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라깡에 대한 접근이 공격적이라기보다 겸허한 것이다.

117-457『라깡의 재탄생』의 장단점은 저자들이 라깡을 바라보는 시선·방식·지점·원근법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입장과 노선이 분명한 고지에서 논쟁의 불꽃을 지피는 글이 아니라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관되고 분명하면서도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글이 단연 빛을 발한다. 더욱이 느긋하고 침착하면서도 유연하고 단호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눈에 원근법적인 미덕이 깃들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너무 멀리 밀쳐놓아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잡아당겨도, 대상의 표면에만 머물고 있어도, 그렇다고 깊이에 파묻혀버려도 안된다. 이것은 특히 영향사적 관점이나 비교론적 관점에서 라깡의 이론을 조망하는 경우에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 16편의 글 가운데서 특히 맹정현(孟廷炫)의 「라깡과 싸드」 「라깡과 푸꼬·보드리야르」가 그러한 원근법적 미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야에 잡히기만 하면, 복잡하고 미묘하기만 했던 라깡이나 싸드, 푸꼬,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의 동일성과 차이가 굵직굵직한 윤곽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라깡과 싸드」에서 저자는 싸드와 칸트(I. Kant)의 농담과 음영의 섬세한 차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시원시원하고 명쾌한 문체로 라깡의 윤리학적 관점을 훌륭하게 예시하였다. 특히 ‘현대적 시선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은 「라깡과 푸꼬·보드리야르」에서는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였다. 시각을 둘러싼 상이한 담론들이 칡덩굴처럼 얽혀서 꼬인 매듭을 매끈하게 풀어서 서너 갈래로 정리하는 지식 분류술이 빼어났다. 대상들을 정리하고 분류한 다음에 그것에 걸맞은 명칭을 붙여주지 않으면 대상이 지식의 장으로 편입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의 분류술은 동시에 발견의 기술이라 할 수 있으리라. 라깡의 실재의 관점에서 쏘쒸르의 전설 연구를 멋들어지게 재해석한 「라깡과 쏘쒸르」—애정과 기쁨을 가지고 이 글을 읽었기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본론이 ‘용두(龍頭)’인데 결론 부분이 ‘사미(蛇尾)’로 끝나고 말았다—를 비롯해서 키에르케고르(S.A. Kierkegaard)의 불안을 라깡적으로 접근한 「라깡과 프로이트·키에르케고르」, 국내의 논문으로는 보기 드물게 논쟁적인 「라깡과 알뛰쎄르」도 역시 훌륭한 글들이었다. 라깡 및 비교되는 이론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바탕에서 씌어진 이 글들은 라깡 이해를 심화시키고 비교연구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라깡의 재탄생』에는 비교대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불안정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논의되는 이론가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그러한 이론가의 스타일에 사로잡혀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시야가 너무 협소하게 제한된 것이었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논의가 너무나 피상적으로 흐르거나 단순비교의 수준에서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라깡의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번역하다시피 하면서 단편적인 설명을 덧붙인 경우도 있었으며, 명목상으로는 영향사를 표방하면서도 깊은 연구나 준비 없이 단지 라깡의 텍스트에 대한 평이한 해제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편차를 십분 감안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모든 저자들이 한결같이 성실하면서도 진지한 연구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라깡의 재탄생』의 가장 귀중한 성과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이 우리말의 질서 속으로 훌륭하게 편입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론은 ‘언제나 이미’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여행한다. 이론은 여행중에 있는 진행형이다. 현재진행형으로서 라깡의 이론을 염두에 두면 아무래도 이 책에서 페미니즘의 역할이 너무나 미미해 보인다. 라깡의 해석과 재해석, 라깡의 수용과 극복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용솟음치는 분야가 바로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편저에서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와 수많은 이론가 가운데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만 다루어져 있을 따름이다. 또 평자 개인적인 소견으로, 현대사상의 비교론적 관점에서 라깡을 조명하는 제2부에서 헤겔(W.F. Hegel)과 싸르트르(J.P. Sartre)가 포함되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욕망, 불안, 응시, 사물에 관한 라깡의 이론은 헤겔 및 싸르트르와 비교·대조되면서 계보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날 수가 있다. 특히 심리적 무의식과 억압에 대한 싸르트르의 비판이 라깡으로 하여금 언어 자체가 억압이라는 관점—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아쉬움을 덧붙인다면, 라깡 이론의 변천사 혹은 수용사에 관한 글이 한 꼭지를 차지했으면 하는 것이다. 라깡이 비교적 일반인에게 생소하던 1950년대 중반까지는 그의 이론에서 순수기표와 욕망에 촛점이 모아졌으며, 그러한 연구태도가 그의 영향이 급증한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주류를 이루었다면, 1970년대 이후로 점차 실재계와 증상이 강조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지젝(S. Zizek)을 필두로 한 후기라깡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시키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라깡의 재탄생』의 저자들은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이행하는 라깡 이론의 어느 특정단계에서 그를 접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평자가 느꼈던 소감을 하나 피력하는 것으로 촌평을 매듭짓고 싶다. 요즈음 줄지어 출판되고 발표되는 라깡 관련 서적과 논문의 방대한 분량을 지켜보면서 평자가 평소에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다. 정작 라깡의 저서는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94년에 10편 남짓한 논문이 공동번역되어—이 책에서 「라깡과 레비나스」의 저자이기도 한 민승기가 역자의 하나이다—『욕망이론』(문예출판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후로 라깡 번역 시도는 아예 자취를 감춘 듯이 보인다. 원문의 번역이 너무나 어려워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겠거니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깡의 재탄생』의 저자들이 이룬 성과에 비추어보면 라깡 원문의 번역이 너무나 늑장을 부리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이토록 유연하게 라깡이 우리말로 논의될 수 있다면 문학적이고 난해하며 다의적인 그의 원문도 역시 유연하게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이 책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