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 시대의 에곤 실레–은희경

 

이선옥 李仙玉

숙명여대 강사. 문학평론가. 주요평론으로 「이기영 소설의 여성의식 연구」 「박완서 소설의 다시쓰기–딸의 서사에서 여성들간의 소통으로」 등이 있음. sun-oklee@hanmail.net

 

 

 

1. 머리말

 

이곳은 얼마나 추악한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빈은 온통 잿빛이고, 일상은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안톤 페슈카에게 보내는 편지」(1910)로1 이 글을 시작하며, 그의 「초록색 스타킹을 신고 누워 있는 여인」을 떠올린다. 진열장의 인형 같은 무표정과 도발적인 음모, 그것들을 둘러싼 단순하고 일그러진 몸매의 선. 실레의 드로잉에 묘사된 소녀들과 여인들, 자화상과 도시풍경들을 보면 묘하게 은희경(殷熙耕)의 작품과 겹치는 환상을 느끼게 된다. 한참을 인물들의 조롱과 위악을 따라가다보면, 두 남녀의 격렬한 「포옹」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림에 전혀 문외한인 내게도 넘쳐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포옹」에 눈을 멈추면 냉정함을 가장한 그의 인물들은 감추어진 순정과 슬픔을 드러내며 스르르 갑옷을 벗어던진다. 인물들은 놀랄 만큼 저속하지만 쓸쓸함의 이면에 순정을 감추고 있고, 세상을 조롱하는 표정 뒤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 격렬한 열정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실레의 화집은 『그것은 꿈이었을까』의 주인공 준이 유독 특별하게 여기는 세 가지 중에 하나로 등장하고 있어서 은희경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인물들의 냉정함이나 위악적인 태도, 그 이면에 감춘 순정성에서 이들은 참 닮아 있다. 1900년대 초 빈(Wien)의 모더니스트 실레가 사창가의 흘러넘치는 성과 상류계층의 위선과 개인들의 욕망을 도시의 일상으로 그려냈다면, 은희경은 ‘익명의 성기’와 쎅스를 하거나, 늘 향상심(向上心)에 시달리지만 마이너리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로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은희경은 4편의 장편과 3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새의 선물』(문학동네 1995) 『타인에게 말걸기』(문학동네 199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 1998)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창작과비평사 1999) 『그것은 꿈이었을까』(현대문학 1999) 『마이너리그』(창작과비평사 2001) 『상속』(문학과지성사 2002)2 등단한 지 만 7년 동안 일곱 권의 작품집을 발표했으니 한해에 한권씩을 출간한 셈이 된다. 제목만 훑어보아도 문학적 성취나 대중적 호응 모두에서 만만치 않은 성과를 얻은 선 굵은 작가임을 느낄 수 있다.

그간 은희경의 작품에 대해서는 사랑의 탈낭만화나 여성성의 드러내기, 환멸과 냉소, 농담과 위악, 아이러니의 기법 등의 논의가 이루어져왔으며, 이러한 논의들은 작품의 이해와 수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사실 이 글이 그간의 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글읽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삼으면서,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보면 그것에 대한 이해가 좀더 진전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발견한 도시적인 삶과 지지부진한 일상의 강고함에 대한 풍자는 유쾌하지만 슬프고, 반복적이면서 또한 달라진 한 시대의 초상을 드러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때문에 은희경은 직선적인 변화의 작가이기보다는 반복형의 작가로 보이며, 그녀의 작품들을 겹쳐 읽을 때 의미가 좀더 선명해지리라 생각한다.

 

 

2. 쎅스, 소통 불가능성의 상징

–『타인에게 말걸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아내의 상자」

 

지지부진하고 반복적인 삶이 일상이며, 따라서 진기하고 특별한 ‘사건’들은 일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들도 일상의 바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은 반복적이며 잘 변하지 않고 사소하지만, 또한 일상처럼 심오한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일상은 사람들의 적나라한 삶이 진행되는 생존과 존속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3 이러한 일상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면, 태어나서 성장하고 밥을 먹고 사랑하고 꿈꾸면서 죽어가는 모든 일들은 일상을 구성하고 그러한 하루하루로 우리 삶이 지속된다. 탄생·밥·사랑·꿈·죽음으로 문학의 다섯 가지 주제를 삼은 포스터(E.M. Forster)의 생각도 그러한 일상의 주제화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시대 일상의 양태 중 은희경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소재는 성과 사랑이다. “난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러는 거야. 섹스를 안하기 위해 겪는 실랑이처럼 의미없이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없어”(『타인에게 말걸기』 265면)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먼지 속의 나비」의 선희처럼 그녀의 인물들은 프리쎅스를 실천하거나 혹은 세번째 남자를 만들며 냉정함을 연기하고 있다. ‘익명의 성기’와 벌이는 쎅스로 넘쳐나지만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냉정함을 가장한 그녀의 인물들을 만드는 것이다.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249면)라고 말하는 「타인에게 말걸기

  1. 프랭크 휘트포드 『에곤 실레』(김미정 옮김, 시공사 1999) 8면에서 재인용.
  2. 단편은 소설집에 실린 것을 텍스트로 하였다.
  3. M. 마페졸리·H. 르페브르 외 『일상생활의 사회학』(박재환·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 엮음, 한울 1994) 24〜2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