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 사라지지 말자
유해정 庾海貞
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경희대 강사. 공저서 『5·18 다시 쓰기』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나는 숨지 않는다』 『재난을 묻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등이 있음.
hjsaram@gmail.com
부모님은 내가 특별하고, 성공한 삶을 살길 바라셨다. 고되지 않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라셨고, 내 명의의 집이 있어 전전긍긍하지 않길 바라셨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아픔 없이 자녀를 키우길 기도하셨다. 자긍심 있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 역시 그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너무 고루하고 평범한 것투성인데, 평생이 어렵고 순탄치 못했던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그 평범함이 비범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철들어가는 과정은 이 평범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평범은 성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넘어서야 하는 목표, 그 기준이 평범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평범, 평범한 일상은 간절히 성취하고 싶은 목표이자 ‘능력’이다. 사회적 약자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평범에서 소외되거나 추방된 삶을 살며, 적잖은 이들이 평범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사회적 위기가 도래할 때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의 삶이 한 사회의 수준이자 실력이며, 인권의 척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22년 5월 10일 윤석열정부가 출범했다. 환영과 기대, 걱정과 우려가 교차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나고 있다. 한 정권을 조망하기에 9개월은 너무 성급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권교체 이후 인권 상황이 급속하게 후퇴한 이명박정부 때를 복기해보자면, 9개월은 결코 이르지만은 않다. 일례로 이명박정부 출범 일년째 되는 날(2009.2.24) 인권단체들이 개최한 기자회견 제목은 ‘인권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였다. 인권단체들은 그 증거로 용산참사, ‘떼법’으로 간주된 집회결사의 자유, ‘광우병 괴담’이 된 알 권리, 최루액 섞은 물대포, 경찰 기동대의 부활, 대체복무제 도입 원점화, 국가인권위원회 대통령 직속화 시도 등을 제시했다. 이후로도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폭력진압, 집회·결사의 자유 위축, 언론 독립성 침해, 민간인 사찰,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증대, 파견노동자 급증, 의료보험 민영화 시도, 재벌 기업들의 골목상권 진출, 한미 FTA 날치기 통과, 4대강사업 등 굵직한 현안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도 계속됐다. 언론의 심각한 독립성 침해에 항의하며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장기간의 언론사 총파업이 벌어졌지만, 결국 기자들의 대량해고 및 징계로 끝이 났다. 인권활동가들의 농성을 통해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화 시도는 저지했지만, 부자격자의 낙하산 인사는 계속되고 조직은 축소돼 임기 내내 정부의 알리바이용 기관으로 전락했다. 많은 싸움의 현장에서 이명박정부가, 이겼다. 그리고 당대의 인권 정책을 바로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대체복무제가 대표적이다. 노무현정부 집권 말기 국방부가 추진방안까지 발표했지만 이명박정부 들어 폐기되면서 대체복무제는 2019년 12월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12년간 유예되었다. 30여억원에 달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손해배상 문제도 최근에야 마침표를 찍었다. 대법원은 2022년 11월 경찰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파업 당시 경찰의 헬기 진압은 위법하며, 노동자들은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13년. 소송에 따른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하지만 4대강사업의 폐해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당시 가파르게 증가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및 파견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조급하지 않느냐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전해지는 목소리들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윤석열정부 출범 9개월, 현장에서 전해지는 목소리는 매우 암울하다. 인권이 퇴행하고 있다는 우려들로, 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서 더 빨리 더 크게 터져나오고 있다.
깊은 통곡의 거리
“이태원참사 이후로 뭔가 죄인이 된 느낌이라 이 거리를 지나면 왠지 숙연해진다니까.” 2022년 세밑, 대전 으능정이거리를 지나던 20대 청년이 함께 길을 걷던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침묵이 답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그들을 붙잡아 어떤 마음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붙잡힌 것은 나였다. 한 여성이 내 패딩을 잡아끌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유가족입니다. 도와주세요. 저희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서명 좀 부탁드립니다.” 50대 초반쯤 되었을, 자그마한 체구에 빨간 목도리를 두른 여성의 손엔 이태원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용지가 들려 있었다. 영하 15도의 날씨에 그는 맨손으로 서명을 받고 있었다. 차가운 바다에서 자식을 잃은 뒤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던 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8년 전에도 나는 이 거리에 있었다. 때로는 서명판을 들고 사람들을 붙잡아 세웠고, 때로는 조용히 서명대 한 구석을 채웠다. 나는 떠났으나 유가족들과 일군의 시민들은 며칠인지 몇년인지 세어지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 동안 그 거리를 지켰다. “수학여행 간 아이가 영영 못 돌아온답니다. 왜 그런지 꼭 밝혀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노란 리본과 학생증을 달고 서명을 받던 그들의 목소리에도 깊은 통곡이 묻어 있었다. 진상규명 천만인 서명 용지는 세월호 인양 촉구 서명지로, 특별수사단 설치 서명지로 바뀌어갔다. 한명의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두명의 대통령이 취임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만 흘러 그들은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고, 사람들은 그사이 많이도 냉담해진 듯 보였다.
이제 주변 사람들과 아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는 이제 과거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빵빵한 추모관 만들어 국민들이 우리 아이들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거 아닙니다. 대통령이 기억하고 정부가 기억하고 여야가 기억해서 재발방지대책 세우고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다시는 목숨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저희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고故 박가영씨 어머니 최선미씨)
유가족들이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고 호소했지만, 시민들의 발길은 쉽사리 서명대로 향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손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한 배달노동자는 밤이 화려한 거리의 길목에 선 유가족에게 눈을 부라리며 경적을 울렸다.
그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빚어내며 내일을 꿈꿨을 159명1의 이야기가 2
- 159번째 희생자는 이채현군으로 참사 현장에서 구조된 후 43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