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 그리고 기억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전통의 단절’과 ‘단절의 전통’

 

시인은 비평(이론을 포함하여)의 영향에서도 아주 자유롭기는 어렵지만, 선대의 시인에게서는 더욱이나 자유롭지 못하며 그 영향의 불편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세계를 정립해나간다. 일례로 우리 시에서 김수영(金洙暎)의 「풀」은 모더니스트든 리얼리스트든 상당히 많은 후대 시인들을 불편케 만들었으며, 또한 그로부터 각 진영의‘새로운 시’가 조정되어나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방가르드 문학의 진원지인 서구에서도 사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라르메(S. Mallarmé)는 시적 산문으로 작성된 「문학적 씸포니」(Symphonie littéraire) 서문에서 세명의‘스승’(고띠에, 보들레르, 방빌)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시적 부친과 그로 인한 시적 자식의 거세효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전임자의 아름다움은 풋내기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지만 그 풋내기는 무력하고 피동적인 영혼, 즉 여성적인 상태로 변신함으로써 이처럼 거세된 상태는 일종의 뮤즈(muse)로서 다시 환기된다. 영감의 결여가 영감의 원천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말라르메의‘백조’가 실제로는‘지난날의 백조’, 즉 보들레르(C. Baudelaire)가 자신의 시적 전임자인 위고(V. Hugo)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썼던 「백조」라는 제목의 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 백조는 이같은 전임자를 지칭하게 된다.1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전통을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전통을 지금 여기의 시각으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후대 시인은 선대 시인이 이룩해놓은,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해‘다르게’말하기의 불가능성에 도전하지만, 또한 그만큼‘똑같게’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말라르메가 보들레르의‘지난날의 백조’를 전유(專有)해 이룩한‘위대한 한권의 책’(THE BOOK)-“세상은 위대한 한권의 책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은 상관적인 개념이다.2

전통의 재구성은 결코 무덤 속 망령들을 소환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시대의 시가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 시를 쓰는 것은 출발과 되돌아감 사이에서 교차되는 시간들을 채집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그 “시간들의 교차점, 시간들의 수렴점”3을 모색하는 행위다. 즉‘전통의 단절’이 아니라‘단절의 전통’을 꿈꾸는 것, 그래서 단절 하나하나가 새로운 시작이 될 때‘텍스트의 무덤’은 지금 이곳에서 살아 있는 작품들의 집합체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시를‘서정적 경향의 시’와‘환상적 경향의 시’로 대별하고 그 특성을 고찰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고 있다. 이 이분법적 도식을 적용해 중진시인들을‘서정파’라고 한다면 젊은 시인들은‘환상파’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도‘서정파’와‘환상파’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촌공동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문태준(文泰俊), 손택수(孫宅洙) 등이 서정적 경향의 시를 쓴다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황병승(黃炳乘), 강정 등의 시는 낯설고 기괴한 이미지로 환상적 공간을 창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이전 세대와는 다른‘세대론’이나‘재현에 대한 상이한 세계관’등의 관점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 시적인 것의 탐구와 ‘기억’

 

이런 이유로 내게 지난호 『창작과비평』(2007년 여름호)에 게재된 백낙청(白樂晴)의 「외계인 만나기와 지금 이곳의 삶」은 무척 실감있게 다가왔다. 그는 이 글에서‘외계인 만나기’라는 모티프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한다. 이것은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나는 모더니즘을 리얼리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리얼리즘을 모더니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그것이‘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고 읽는이 나름의 진지한 독법이기만 하다면 다 좋다는 입장”4과 맥락을 같이한다. 무엇보다 이 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젊은 비평가의‘외계인’논의에서 지금 이곳에서의‘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성찰을 이끌어내는 대목이다.

 

현실인식과 현실변혁에의 의지 또한 살아감의 필수적인 여건이며,‘시의 경지’의 필연적인 파생물(…)이다. 아니‘언어’에 대해서도 실제 살아 있는 인간들의 언어가 “외부에서 부여된 언어”와 그 “바깥”으로 양분될 수 있는지 연구해볼 문제다.(340~41면)

 

이 글에서 백낙청은 그가 텍스트로 삼은 이장욱의 「외계인 인터뷰」에 의지해‘외계인’의 관점을 씨앗어로 삼아 젊은 비평가와 똑같이 다시금 시에 대한 논의를 소설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로 “이는 소설 또한‘시의 경지’에 달할 때 비로소 언어예술의 한 장르로서 그 고유한 몫을 다할 수 있다는 나의 지론과도 통”(335면)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관점은‘외계인 인터뷰’를 통해 관례적 인식을 넘어서서‘있는 그대로의 실재/현실’을 새롭게 다루면서도, “그것은 시적 전략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각과 본능의 산물”5에 의해서라는 이장욱의‘시적인 것’과 일정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백낙청이 의도하는‘시적인 것’의 모습은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소 선명해 보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이장욱과는 다른‘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논의가 크게 진척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그가 최근 펴낸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에 산발적이긴 하지만 텍스트에 숨겨진 보석처럼 의미심장하게 빛을 발한다. “나는 전형성, 현실반영 같은 특정 기준들의 충족 여부보다‘지공무사(至公無私)’또는‘사무사(思無邪)’로서의 당파성의 구현 여부가 한층 본질적인 문제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오히려 좁은 의미의 시야말로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시의 경지에 도달하는가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최선의 표본이 되고, 나아가 현실주의적 성격이 좀더 농후한 장르들의 현실주의를 올바로 정초(定礎)하는 첩경일 수도 있다.”(429면)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메씨지를 옳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전통문법의 틀을 깰 수도 있”(53면에서 재인용)어야 하며, 그것은 아울러 “포괄성과 구체성”(123면)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현기법의 새로운 탐구가 오늘날의 지구시대에서 증가하는‘달리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져 곧 지금 여기의‘있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첩경으로 제시되어 있다면,‘포괄성과 구체성’은 근대 전반을 포괄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어떤 확고한 면모를 지녀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그‘확고한 면모’가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실현되는 것으로‘지공무사’나‘사무사’의 시정신을 들고 있는데, 이것을 직시하기 위해서는‘각성된 노동자의 눈’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눈’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세상이 부당하며 극복되어야 함을 꿰뚫어”보는 것이고, 거기서 “나아가‘지식사회’가 되고‘정보화사회’가 된다고 해서 노동이 근절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됨을 인식”(202면)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각성한 노동자의 눈’은 근대 세계체제와 현행 세계화과정에 대한 발본적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뜻”한다(같은 곳).

그러므로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새로운 중도(中道)를 찾을 필요”(209면)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의‘시적인 것’의 핵심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 속의 민족적 위기가 여전한 이 땅의 현실에서‘지공무사’라든가‘각성한 노동자의 눈’을 통해 남한의 국민문학을 겸한 전체 한민족의 민족문학을 새롭게 구성

  1. C. 호제크, P. 파커 엮음, 윤호병 옮김 『서정시의 이론과 비평』, 현대미학사 2003.
  2. 같은 책 462면.
  3. 옥타비오 파스 지음, 김은중 옮김 『흙의 자식들 외』, 솔 1999, 210면.
  4.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330면.
  5.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비 2005, 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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