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신화 없이

 

인간은 왜 일을 해야 할까?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격노한 신은 ‘선악과 무단취식 사건’을 인간의 원죄로 규정하고, 살아서는 벗어날 가망 없는 노동의 수고를 인류에게 부과했다. 비록 그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교(異敎)의 창세기는 보다 노골적이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노동을 대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지상에 내려와 문명을 건설하던 신들이 과도한 노동과 형편없는 처우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자 신들의 신인 엔키(EnKi)는 인간을 창조해 신들을 고된 노역에서 해방시켜줌으로써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노동쟁의’를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다.

오랜 시간 대립하던 노동과 신성(神性)의 관계는 ‘프로테스탄티즘 정신과 자본주의의 윤리’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창안한 이념형에 이르러 노동은 신성의 결여가 아니라 반대로 신의 은총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징표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세속적인 직업을 갖고 노동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거룩한 소명으로 인식하는 정신의 변혁이 자본주의의 발흥을 이끌었다는 베버의 논의는, 근대 산업노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라는 세속세계 신의 탄생을 소묘하는 데 더욱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새로운 역사의 무대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는 태내에 자신의 ‘적대자’(antagonist)인 프롤레타리아를 배태하고 있었으니 프롤레타리아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spin-off)의 상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이 주인공이 되어 펼치는 해방의 드라마는 근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신화였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오래인 지금, ‘노동해방’의 신화는 개인의 근면성실한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베버의 신화만큼이나 낡은 듯 보인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곧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을 획득함을 의미한다”거나 “전진하는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전형의 창조에 한걸음 더 다가가” “전체 운동의 발전 속에서 자신의 운명의 개척자로 깨어나는 노동자와 민중의 모습을 반영”1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2

자신을 지탱해온 근대의 신화들이 스러진 지금, 노동은 위태롭고 곤궁하다. 근면성실한 노동에도 ‘벼락거지’가 된 스스로를 책망하며 다급하게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동산과 주식, 가상화폐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오늘날 노동의 곤궁함은 더욱 도드라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릿적의 숙명론이 다시 힘을 얻는 현실은 노동에 관한 새로운 자기증명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노동이 고통과 징벌일 뿐이라는 신화적 숙명론은 익숙한 ‘노동혐오’를 반복하게 할 뿐이며 미래의 노동을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생성해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 보전과도 밀접하기에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일수록 이 과제를 피해가기 어렵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관습적인 가치평가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는 데 오늘날 작가들이 마주한 난점이 있다.3 오늘날 작가들은 기존의 신화들이 몰락한 자리에서 과거의 잔해를 헤집으며 미래의 희망을 발견해야 하는 곤경을 맞닥뜨리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는 장강명과 김혜진, 김세희의 작품을 통해 변화한 현실의 노동을 새롭게 포착하기 위한 조건을 탐문해보고자 한다.

 

 

2. ‘공정’한 재현에의 욕망과 능력주의의 덫: 장강명의 「공장 밖에서」

 

장강명의 「공장 밖에서」4는 쌍용차 사태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회사의 위기에서 출발해 정리해고를 요건으로 하는 법원의 회생계획 발표를 거쳐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투쟁으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이미 알려진 사태의 전개 과정과 큰 틀에서 합치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에 나선 노동자의 투쟁을 서사의 중심에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전통적인 ‘노동소설’이 요구하는 재현 방식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한다. 여기서 장강명의 시선은 노자 간의 계급적 대립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에 의해 불확실한 미래를 할당받는 노동과 자본의 공통적인 존재 불안을 향한다.

 

사장은 노조가 비겁한 소리를 한다고 여겼다. (…) ‘당신들이 정말 죽지 않을 각오로 여태까지 일을 해 왔나.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텐가. 당신들은 진짜로 죽는 게 어떤 건지 몰라. 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더 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로 옮겨 간다고 죽지는 않아.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짜로 죽을 수 있는 건 회사뿐이다.’(91~92면)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조의 구호를 접한 사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되뇐다. 작가가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이 사태를 다룰 거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당황할 법도 한데, 저와 같은 사장의 속마음이 결코 풍자나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파업을 소재로 한 작품의 대부분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에 내재한 힘의 불균형을 고려했을 때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편에 서는 것이 정치적으로 합당한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올바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경영자와 자본가가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럴 때조차 그들은 탐욕적이거나 비열한 술수를 써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평면적인 악인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장강명에게 그와 같은 재현 방식은 “소재의 선택이나 서술 방식, 주제 의식에 있어서 편향이나 왜곡”을 야기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현실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는” 걸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이

  1. 정남영 「민족문학과 노동자계급문학」, 『창작과비평』 1989년 가을호 81~89면.
  2. 물론 1980년대 노동문학을 둘러싼 논쟁은 치열했으며 모든 논자들이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일률적으로 추인했던 건 아니다. 1980년대 노동문학론에 내재한 관념성을 비판하며 문학과 삶에 있어서의 창조성을 강조한 백낙청의 논의가 대표적이다. 백낙청은 “자본제 아래 노동자계급의 소외된 노동의 경우에조차 그것이 짐승이나 기계의 움직임이 아닌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소외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실천으로서의 노동을 이미 부분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민중소외의 극복도 바로 이처럼 이미 구현되고 있는 창조성을 바탕으로만 가능한 것이며, 소외극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외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실은 그러한 창조성의 실감을 전제하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백낙청 「작품·실천·진리: 민족문학론의 과학성과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379면) 한편 1980년대 노동해방문학을 주창하면서 가장 강경한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주장했던 조정환은 이후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의 승리란 사회주의의 신화”일 뿐이며 그같은 신화에 기댔던 1980년대 “노동문학은 어느새 ‘고귀한 출생-고난-투쟁-종국적 승리’라는 구전설화의 구도를 닮아”갔다는 뒤늦은 자기반성을 내놓은 바 있다.(조정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종말 이후의 노동문학」, 『실천문학』 2000년 봄호 256, 264면)
  3. 백낙청은 앞의 글에서 진리를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노동을 꼽는 사람들이 있음을 거론한 뒤 “인간은 노동함으로써만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니까 노동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창조적이다라는 답변도 흔히 듣는데, 이는 진실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같은 인식으로써는 “노동은 궁핍이라는 필연성에 강제된 불가피한 행위로서 가치창조의 원천이 되기는 하지만 참된 자유와 행복은 노동으로부터의 면제 곧 ‘휴식’에 있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관과 혼동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378면)
  4. 장강명 『산 자들』, 민음사 2019. 발표 당시(『실천문학』 2015년 봄호) 제목은 ‘산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