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

신경숙과 공선옥의 작품들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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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였던 여성작가들이 90년대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문학풍토가 상당히 달라졌다. 이는 여성작가들의 숫적인 증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문학적 성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을 낳는 데 그간의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수용과 여성운동의 진전이 적잖이 기여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서사적 차원에서의 변화일 것이다. 흔히 ‘9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꼽는 현상, 즉 ‘역사’에서 ‘일상’으로, ‘거대서사’에서 ‘미시서사’로의 전환이 여성작가들의 득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가령 90년대 여성문학의 성격을 거론하면서 일상적 미시서사와 역사적 거대서사를 이항대립시키는 경향이 그렇다.1

이런 경향의 문제점은 이 이분법적인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남녀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것은 이런 도식적인 사유틀이 일상적인 작은 이야기에서 역사적인 계기들을 추방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유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무엇이 거대서사이고 무엇이 미시서사인지에 대해서도 좀더 발본적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여성작가들이 흔히 다루는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작은 이야기인가? 사랑과 성은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이지만 역사적 계기로부터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계기와 맞물려서 형성되고 해체된다. 그렇기에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에는 그 시대의 주요한 모순과 갈등이 담기게 되고 그런만큼 큰 이야기와 섞이게 마련이다.

이 글은 이런 발상에서 90년대 이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꼽히는 신경숙(申京淑)과 공선옥(孔善玉)의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사랑과 성의 이야기에는 남녀관계와 가족관계, (이성·동성) 성애/성차의 문제뿐 아니라, 계급과 환경의 문제가 깊이 스며 있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특히 여성)의 삶이 어떻게 찢겨져왔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들이다. 두 작가의 작품을 이런 삶의 찢겨짐의 결을 따라 읽고 그 찢겨진 삶에 대처하는 각각의 생존/서사 방식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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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과 공선옥을 비교하고 싶은 충동을 처음 느낀 것은 「어떤 여자」를 읽었을 때이다. 실명으로 거론하진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신경숙이 그려내는 ‘어떤 여자’는 공선옥을 모델로 삼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두 여성소설가의 전화통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소설은 일상적인 ‘사실’을 어느새 비범한 ‘픽션’으로 둔갑시키는 신경숙의 빼어난 솜씨를 보여줄 뿐 아니라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요긴한 단초를 제공한다.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무엇보다 수화기 저편에서 터져나오는 거침없는 남도 사투리와 흙냄새 사람냄새 풀풀 나는 걸쭉한 시골 이야기인데, 그것이 영판 공선옥의 목소리요 화법이라서 마치 그녀의 소설에서 한 토막을 끊어낸 듯하다. 한편 신경숙 자신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전화통화에서는 주로 듣는 쪽인데다 공선옥과의 만남을 회고하는 작품의 서두에서도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모습을 부각하는 데 몰두한다.

하지만 신경숙은 여기서도 자신의 삶에 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렷한 인상을 남기는 공선옥의 활기찬 목소리에 기대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기 때문에 독자는 그 ‘희미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기 쉬울 따름이다. 가령 공선옥과의 빈번해진 전화통화에 대한 소감을 밝히면서 “나는 내 태생지를 떠나온 뒤 여행자처럼 살고 있는 중이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늘 떠돌고 있는 기분으로. (…) 아직 부모님이 거기 살고 계시기에 가끔 그곳으로 가보지만 이제 그곳이 여기보다 더 낯설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은 그리운 법. 그녀에게선 내 유년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말투와 음식의 냄새가 흘러나왔다”(『딸기밭』, 문학과지성사 2000, 211면)고 술회한다. 그러니까 공선옥이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시골 이야기는 신경숙에게는 유년에는 누렸으되 지금은 상실한 어떤 온전한 삶이다. 공선옥과의 긴 통화를 끝낸 후 “수화기 이편과 저편처럼 그녀와 나는 생판 다른 삶을 살고 있다”(220면, 강조는 인용자)고 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는 대목에서 이런 대조는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이 도시에서 혼자, 그녀는 남도의 시골 마을에서 아이 셋과 함께. 내가 이 도시에서 빌딩에 걸린 희뿌연 달을 볼 때, 그녀는 마당에 내려서서 나뭇가지 끝에 걸린 맑은 달을 볼 것이다. 내가 주말에 영화관에 가서 심야 프로로 「식스 센스」를 보고 있을 때면 그녀는 아마도 이제 24개월 된 아이의 가슴에 이불을 당겨주며 뺨에다가 입을 맞추고 있겠지. (221면)

 

이 대목에서 나타나는 도시와 시골 마을, 홀로 된 삶과 가족과 함께하는 삶, 빌딩과 마당, 희뿌연 달과 맑은 달 등의 두드러진 대조는 신경숙 문학의 주된 모티프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신경숙 문학에서 원형적 경험은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도시로 갑자기 이주한 데서, 즉 유년의 따뜻한 삶을 상실하고 졸지에 삭막한 도시적 환경에 던져지는 가혹한 체험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주의 경험은 이 작가에게 가장 고통스런 ‘찢겨짐’으로 체험되면서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아로새겨놓는다. 달리 말하면 이 ‘찢겨짐’ 이전과 이후의 삶이 ‘생판 다른’ 것으로 나타나며, ‘생판 다른 삶’을 이어붙여 찢겨진 삶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이 작가의 가장 특징적인 서사가 된다. 여기서 극적인 계기는 찢겨짐의 경험 전후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는 깊은 상처를 어떻게 대면하고 다스리는가의 문제이다.

어떤 개인이 깊은 상처를 치유하자면 그 상처의 진상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한데, 문제의 개인이 작가라면 자신의 상처와 대면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게다가 이 고통스런 경험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미 상처받은 자신과 타자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글쓰기란 상처를 치유할 수도 덧나게 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장편 『외딴방』 1·2(문학동네 1995)는 이런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돌파함으로써 산업화가 한창인 시기에 도시로 이주한 한 여성노동자의 고통스런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2 상처의 한가운데는 ‘희재’ 언니의 비극적인 삶이 놓여 있지만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큰오빠를 비롯한 외딴방의 식구들, 공장과 산업체 부설학교의 인물들, 고향의 부모와 연인 ‘창’의 삶 역시 나름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이야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작품은 어느새 “가까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증언록”3이 되었다. 요컨대 ‘생판 다른 삶’을 잇는 신경숙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물음과 성찰은 중요한 서사전략이 된다. 『외딴방』의 성취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모여 있는 불빛」(『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1996)과 같은 작품도 이 서사전략을 절묘하게 활용한 수작이다.

그러나 모든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의 전략을 도입하는 것은 힘든 노릇일뿐더러 서사의 소재적·기법적 다양성을 획득하려면 이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성찰에 버금가는 서사전략은 시골 유년기에 경험한 자연친화적·공동체적 활력을 끌어들여 삭막한 도시생활의 허무와 메마름, 뒤틀림 등에 맞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생태적인 기획’이라 부름직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떤 여자」에서 보듯이 시골 유년의 세계가 도시적 삶의 양식을 진단하는 가치척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신경숙의 초기부터 내재되어 있었지만, 『외딴방』 이후부터는 더욱 두드러진다. 따라서 신경숙의 소설은 상실된 유년의 세계를 ‘기억’을 통해 계속 재구성하는 반복적 양상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복고적이거나 낭만적인 취향만이 아니라, “늘 떠돌고 있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도시생활 속에서도 삶의 온전함이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생태적 기획을 가능케 하는 신경숙의 자질, 즉 자연과 생명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다. 이런 감수성은 산업화 이전의 시골에서 자연과 맞닿은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질이며, 그런만큼 도시에서 태어난 젊은 작가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경숙한테 이런 자질이 유독 강한 것은 그의 유년기가 산업화로 인한 생태적 환경이 급격하게 훼손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상실의 위기에 처한 자연친화적이고 혈연공동체적 삶이 이를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경숙의 소설에 묘사되는 갖가지 꽃과 나무, 동물 들을 실감나게 하는 원천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종종 ‘소녀적 감상성’이라는 비판의 빌미가 되는, 언제 소멸할지 모르는 생명체에 대한 유별난 애착과 연민도 바로 이런 생태적 감수성의 분출에서 연유한다.4 아프고 여린 생명에 대한 연민이 깊이 스며든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상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부석사」(『창작과비평』 2000년 겨울호) 등은 이런 감수성이 빚어낸 수작들이다.

이런 생태적인 감수성이 이 작가의 중요한 자산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이용한 서사전략에 내포된 맹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삶의 온전함을 재는 기준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연민의 행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 모순을 추궁하는 힘이 떨어지면서 현실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소설 장르 특유의 박진감을 상실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이런 징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예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인데, 앞서 거론한 세 작품 역시 그 탁월한 묘사력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뭔가 나른한 느낌을 준다. 생명체에 대한 연민이 과도하게 분출된 나머지 찢겨진 현실에 대한 사유는 물러나고 불교적 연기(緣起)의 세계관에 입각한 위로와 진혼의 제의(祭儀)가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오래전 집을 떠날 때」나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이상 『오래전 집을 떠날 때』)는 영혼의 집을 잃고 헤매는 귀신들을 위로하여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을 주된 모티프로 삼고 있는데, 그 도덕적 의도는 사주고 싶지만 예술적으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모티프를 사용하더라도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딸기밭』)처럼 ‘귀신’ 요소를 살짝 가미할 때 가엾은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극적 긴박감과 종결의 훈훈함이 살아난다.

흥미로운 것은 신경숙 소설에서 사랑과 성애의 문제가, 유년의 기억으로써 도시의 피폐한 삶을 회복하려는 생태적인 기획과 종종 어긋난 관계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장편 『깊은 슬픔』 상·하(문학동네 1994)에서 ‘이슬어지’는 은서와 완과 세의 마음의 고향이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서로간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모두 사랑에 실패한다. 유년의 기억이 가족간의 정과 유대를 다지는 데 밑거름이 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에는 파괴적인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친화적이고 혈연공동체적인 유년의 세계가 사실은 결핍과 금기와 ‘기습’의 공간이기도 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령, 장편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5에서 고향마을의 미나리군락지는 오산에게 도시생활의 허망함을 견디게 해주는 생태적 상상력의 원천이지만 유년기의 동성애 욕망이 거부되면서 원초적인 ‘고독’과 결핍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하다. 오산의 이런 상처받은 내면이 그녀와 사진기자와의 관계를 편집증적인 짝사랑으로 몰아가면서 그녀의 사랑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요인이 된다.

『바이올렛』에서 눈여겨볼 것은 오산의 사진기자에 대한 사랑이 착각(‘오산’)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이 눈먼 사랑에서 촉발된 관능적 욕구가 생태적인 요구와 묘한 갈등관계에 놓인다는 점이다. 서울 도심의 한 화원에 취직한 오산은 사진기자와 만나기 전에 “식물이 주는 위로”(93면)와 화원에서 같이 일하는 수애와의 우정으로 도시의 무료하고 황량한 일상을 힘들게 견뎌나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바이올렛 꽃을 찍으러 화원에 찾아온 『꽃세상』의 사진기자와 만난다. 하지만 오산에게는 그와의 ‘재회’가 결정적이니, “어제 그 남자와 재회하기 이전의 시간과 어제 그 남자와 재회한 이후의 시간에 대해 분명히 금을 긋는다”(169면). 대체 그 남자와의 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번째 만남은 오산과 수애와 수애 친구가 찾아간 까페에서 사진기자 일행이 우연히 합석한 데서 시작되지만 문제의 사건은 그들 일행이 까페에서 나와 흩어진 후 사진기자가 그녀의 팔을 만질 때 일어난다. 그때 “그녀의 팔 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이 소름을 남자가 쓸어내리는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울 뻔한다”(159면). 남자의 한번의 터치에 그녀는 간단히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6. 단편에서는 이 만짐으로 끝나지만 『바이올렛』에서는 남자가 “당신, 사랑해도 되겠소?”(161면)라는 도발적인 발언과 함께 그녀의 뺨에 입맞추는 장면이 더 있다. 또한 단편에서는 사진기자에게 예쁜 마누라가 있다는 암시가 『바이올렛』에서는 예쁜 애인들이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는 나중에 오산이 사진기자가 까페의 창밖에서 자기 쪽을 두 번씩이나 쳐다보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데 좌절하지만, 『바이올렛』에서는 그런 실망을 겪은 후에도 오산이 전화로 그를 불러내어 마침내 두 사람이 대면하고 그 자리에서 그가 오산의 (머리를 자르고 눈썹을 밀어)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때 사랑의 최종적

  1. 황종연·진정석·김동식·이광호 좌담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99년)에서 신경숙 문학의 혁신성에 관한 황종연의 주된 논지가 그러하다.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자면 역사철학 혹은 거대서사의 몰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1면)라든지 “일상성의 영역에 대한 관심은 신경숙 소설에 뚜렷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90년대 소설 전체에 두드러진 것이기도 하지요. 신경숙 이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미학, 도덕, 정치는 소설의 주류 테마가 되었으니까요”(40면). 그런데 신경숙 자신의 최고 걸작이자 90년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외딴방』(1995)이 과연 거대서사의 차원이 결여된 일상적 미시서사로 그치는 것인지 묻고 싶다.
  2. 『외딴방』의 성취를 글쓰기에 대한 성찰과 결부하여 탁월하게 논한 글로는 백낙청 「“외딴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참조.
  3. 남진우 「우물의 어둠에서 백로의 숲까지: 신경숙의 “외딴방”에 대한 몇개의 단상」, 『외딴방』 2권 292면.
  4. 이런 자질은 신경숙의 산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령, “꽃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그들과 관계맺고 있는 한 순간에 찬란한 향기를 풍기다가도 또 한순간 그들은 죽음이나 그리움이나 부재나 상실로 돌아갔다”(「말해질 수 없는 것들」,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1995, 47면)라는 구절을 보라.
  5. 신경숙은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과지성사 1993)를 저본으로 삼아 『바이올렛』을 썼는데, 이 두 작품의 차이를 엄밀히 규명하면서 장단점을 비교하려면 또하나의 글이 필요하다. 필자는 『바이올렛』이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여러 계기들을 발전시키고 개선함으로써 사랑과 성애의 문제를 확연하게 드러낸 점을 높이 사지만, 동명의 단편을 장편화한 『외딴방』의 경우와는 달리 그 핵심적인 대목에서는 큰 변화가 없고 또 그만큼 성공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여기서는 『바이올렛』의 텍스트를 기본으로 삼되 두 작품의 공통된 면을 먼저 논한 다음 양자의 차이와 그 예술적 효과에 관해서는 간단히 덧붙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