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운명을 모르는 페넬로페(들)

김유담 소설 속 회상의 형식

 

 

임정균 林貞均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마음의 리얼리즘: 김금희론」 등이 있음.

wolverine10@naver.com

 

 

그의 회상과 깨달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험담을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오디세우스는 험난했던 여정을 떠올리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한 끝에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일들에 관해 그대에게 이야기하고 있죠? 어제 이미 나는 그대의 집에서 그대와 그대의 강력한 아내에게 그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리고 분명하게 말한 것을 재차 말한다는 것은 내 성미에도 맞지 않는데 말이오.”1 루카치(G. Lukács)가 그리스 영웅들은 회상이라는 시간 체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오디세우스의 이같은 성미가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을 알고 있고, 삶의 의미를 의심치 않는 그리스의 영웅에게 회상은 어떤 내적 변화도 주지 못한다. 지혜로운 오디세우스에게 무가치한 회상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회상은 운명을 모르는 평범한 인간에게나 유용하다. 인간은 운명을 알고 싶어하고, 동경하며, 그같은 갈망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삶이 구체적 형상을 띠기 시작했을 때에야 뒤를 돌아보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 운명을 너무 늦게 알았구나. 깨달음은 언제나 한발 늦다.

여기 회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어째 좀 미심쩍다. 그의 회상은 밤늦은 시각에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육개월 전 헤어진 여자친구 피티의 언니 소냐는 동생이 실종된 것 같다고 전한다. “오늘이 사흘째야. 이럴 애가 아닌데…… 네가 알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피티의 실종 소식을 들은 남자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피티가 사라지다니, 그것도 소냐를 혼자 두고? 내가 아는 피티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김유담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 『탬버린』, 창비 2020, 278면, 이하 「영국산 찻잔」.)

남자의 이같은 확신은 피티와 헤어진 이유와 관련 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소냐를 피티가 지나치게 보호해왔던 것. “그녀가 그렇게까지 소냐에게 신경을 쏟지 않았다면, 나에게 좀더 집중해주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308면) 그런데 피티가 언니를 두고 사라졌으니, 그는 피티가 스스로 사라졌다고는 믿지 못한다. 곧장 소냐의 집으로 향한 남자는 그녀의 횡설수설을 들으며 집 안을 둘러본다. 곧 단서 하나를 발견한다. 피티가 평소 아끼던 영국산 5인조 찻잔 세트 가운데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그 찻잔은 “나중에, 소냐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 때 네 자매가 함께 피크닉을 가서 차를 마시고 싶다”(302면)라고 한 그녀에게 큰언니가 사다 준 것이다. 소냐가 마음을 열길 기다리며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던 찻잔이 피티와 함께 사라졌음을 알게 된 남자는 비로소 피티에 관한 ‘새로운 앎’에 도달한다. “오지 않을 티타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피티, 어떤 갈망은 삶을 견디는 힘이 되는 동시에 삶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걸까. 그제야 나는 피티가 가장 좋아하는 찻잔으로는 단 한번도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314면)

분명 이 깨달음은 독자로 하여금 피티의 행방을 낙관하도록 추동한다. 그렇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피티에 관한 그의 새로운 앎은 기존에 그가 확신하던 앎을 수정하라 요구한다. 그러니까 ‘피티는 소냐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피티는 제 삶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라는 새로운 추측에 의해 번복된 것. 일관된 주장을 번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그리하여 어떤 변화를 맞이한 이 남자를 우리는 긍정해야 할까.

실마리는 앞서 본 첫 장면에 있다. 언뜻 두 사람은 ‘피티는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동일한 형태의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소냐의 판단은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이런 적이 없었거든”(283면)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전 행위들의 경향성에 근거한 단순하고 확신 없는 추측이다. 거기엔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지만, 이럴 수도 있는 애’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반면 남자는 피티가 소냐를 혼자 두고 떠났을 경우의 수를 확신에 차 배제한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피티가 자신과 헤어진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생이 스스로 떠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소냐가 “설마 나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303면)라며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하는 것과 달리, 수상쩍게도 단순 가출을 배제한 남자의 태도는 지나치게 태평하다. 유사한 판단 이면의 상반된 태도는 피티의 실종 뒤에 숨겨진 내막이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 내막은 남자의 과거 회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문제다. 회상은 소냐의 집에서 그녀와 나눈 짤막한 대화 사이에 일어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과거의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헤어졌던 육개월 전의 사건에 다다른다. 두건의 폭력이 있다. 그는 자매가 키우던 개에게 줄넘기 줄을 휘두르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했던 폭력을 재연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지.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아들이 줄넘기 줄을 휘두른 후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을 헥헥거리는 개새끼에게도 들려주었다.”(299면) 그는 폭력을 합리화했던 아버지의 논리를 답습하며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자의식을 표출한다. 이어서 소냐에게 가한 폭력을 “내가 발끝으로 소냐의 팔꿈치를 툭 건드리자 그녀의 상체가 휘청하면서 냉장고 문과 맞붙은 홈바에 머리를 부딪쳤다”(309면)라고 묘사하면서 그것이 우발적 사고였다고 슬그머니 주장하기에 이른다.

겉으로는 사라진 피티의 행방을 걱정하며 소냐의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지만, 그의 의식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이 회상의 목적은 과거의 사건들에서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피티의 실종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한다. 만일 두 사람이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폭력임을 인정한다면, 피티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깨달음은 ‘피티는 제 삶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추측이 아니라, 오히려 ‘피티가 제 삶을 찾아 떠나야지만 그녀의 실종과 나는 전적으로 무관해진다’라는 일관된 자기변호의 완성이 아닐까.

 

 

그녀의 동경과 그의 욕망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혹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변명하려는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가 낯선 것은 아니다. 가령 임현의 ‘문제작’ 「고두叩頭」(『그 개와 같은 말』, 현대문학 2017)의 서술자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구축해가며 진술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결국 자기변명에 불과한 기만적 언술이며, 나아가 자기모순의 계시적 장치임을 많은 독자들이 예리하게 간파했던 것도 이런 유형의 서술자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소설을 한국문학의 ‘문제작’으로 만든 것은 피해여성의 삶과 행동, 의식을 가해자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상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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