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내가 사는 곳

 

웃을 일은 없지만 빙그레

 

 

정은정 鄭銀貞

농촌사회학자. 저서 『대한민국 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백남기 농민 투쟁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질적연구자 좌충우돌기』(공저) 등이 있음.

avis96@empas.com

 

 

청량리발 3번 버스의 종착지를 다들 ‘빙그레’라 했다. 초행길인 사람들이 “여기가 빙그레예요?”라 물으면 “네, 빙그레예요”라고 답해야 했던 곳이다. 누구 하나 웃지도 않으면서 ‘빙그레’라 했다. 50여년 전 1973년에 양주군 미금면 도농리에 빙그레 공장이 들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이 일대에는 젖소를 길러 상봉동 서울우유조합이나 빙그레에 젖을 내는 농가들이 많았다. 성장에 목말랐던 시대, 왜소한 몸은 우유와 고기로 채워 기골이 장대해지길 바랐고 땅에서 기르는 농사보다는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을 내는 축산업을 한수 위로 쳤던 때였다.

빙그레 종점에 내려 2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우리 집 밭이 있었다. 따지고 들자면 우리 집 밭이 아니라 빌린 밭이었다. 택지든 상업지구든 느긋하게 개발을 기다리는 부재지주들의 땅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성도 몰랐다.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종종 농지 임대차 중개를 해 약간의 소개비를 챙기는 ‘마름’도 있었다. 그렇게 마름을 통해 밭을 얻고, 계약서 없이 당해 연도 쌀값을 기준으로 몇가마니 치 값을 도지로 무는 임차농이자 소작농들이 많았다. 사회과부도에 ‘근교농업지대’라 이름 붙은 곳에서 부모님은 푸성귀를 길러 팔았다. 회전율은 좋지만 유통비용이 높아 농가 수취율이 낮은 엽근채류와 수취율이 조금이나마 높은 토마토를 번갈아가며 길렀다. 근대-토마토-쑥갓, 상추-토마토-시금치, 하는 식이었지만 농산물 시장은 워낙에 들쑥날쑥이었고, 때마침 외환위기까지 겹치자 안 먹어도 안 죽는 토마토 따위를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방학을 하거나 겨울 농사를 쉬는 시골 이모들이 와서 도와줄 수 있겠다 싶으면 직접 수확을 했고, 일손을 구하기 어렵겠다 싶으면 밭떼기로 넘기곤 했다. 포전거래를 하면 산지상이 작업자들을 직접 데려오는데, 당시 ‘조선족 할머니’라 부르던 중국 동포들이 끼어 있었다. 지금은 규모가 더 커져 농촌에는 불법과 합법을 뒤섞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작업단이 전라도에서 강원도까지, 국토를 아래위로 훑으며 농사를 짓는다. 자기 땅도 없고, 트럭도 한대 없이 짓는 농사는 매번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현금으로 셈을 하는 일이었으니 부모님이 수중에 쥐는 돈은 아주 적거나 아예 없었고 빚을 지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 엄마는 버스를 타고 빙그레에 내려, 근교농업의 특징으로 꼽히는 출퇴근 농사를 지었다.

방학이 오면 종종 밭일을 거들어야 했다. 겨울에는 가끔 비닐하우스 채소들 이불을 덮거나 걷으러 혼자 갈 때도 있었다. 해 짧은 겨울에 빙그레 앞에 내려 하우스까지 걷는 길은 어둡고 무서웠다. 이중창이 단열에 뛰어나듯 요즘 비닐하우스는 이중 구조로 짓고, 겨울에는 기름보일러를 때는 가온방식으로 작물을 기른다. 하지만 우리 집 비닐하우스는 여러 임차농들이 돌려쓰던 구형이었다. 비닐하우스를 새로 짓고 싶어도 언제 임대차 관계가 깨질지 몰라 시설투자를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홑이불에 불과한 비닐은 바람은 막아도 밤새 곤두박질치는 수은주는 막지 못했다. 그래서 작물 위에 얇은 비닐과 카시미론 보온덮개를 한번 더 덮어, 가온이 아닌 보온을 해야 했다. 아침에는 작물들 숨 쉬라고 비닐과 이불을 걷어주고, 저녁에는 일일이 다시 덮어주어야 하는 고된 농사로 기름 대신 사람을 태우는 일이었다. 밭일을 하고 있으면 나가 놀고 싶어 화가 났고, 나가 놀고 있으면 엄마가 불쌍해서 화가 났다.

 

나는 부모님 허리를 베어 먹은 대신에 농사와 같은 험한 일은 피하고 살았다. 사범대 가서 선생 자리를 잡거나, 번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