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원한’의 시학은 ‘고행’을 수행할 수 있을까
최금진 시집 『새들의 역사』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이 시대의 혁명, 이 시대의 니힐리즘」등이 있음. husaing@naver.com
‘원한’(ressentiment)의 감정을‘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니체였다. 그에 따르면 객관적 삶의 조건을 긍정적 실존 상황으로 쇄신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의 조건이나 신의 주사위놀이를 원망하며, 자신의 생을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동시에‘원한’의 상태는 도무지 삶의 유희적 가능성을 모른다는 점에서 미학적 삶의 제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확실히 니체의 도덕은 현실적 차원에서는‘강자의 도덕’으로 해석될 만하다. 현실적으로 그의 담대한 니힐리즘의 윤리학을 승인하면서‘주인의 도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정신의 나약함 탓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확실히 우리는 맑스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견해에 따르자면 역사의 최종 승리는‘노예’들의 것이 되었으나, 맑스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근본 기분인 이‘원한’의 감정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노예정신’의 산물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리고 우리 삶의 체험적 직관의 결과, 우리는 삶의 쇄신 가능성이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경제적 삶의 조건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미학의 가능성은 이제 니체적인 놀이정신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