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 대안은 있다
위기 이후의 대안, ‘한반도경제’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동북아시대의 한국경제 발전전략』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등이 있음. ilee@hanshin.ac.kr
1. 대안은 있는가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세계경제는 격변 속에 놓여 있다. 1980년대말 이후 레이거노믹스의 등장으로 보수적이고 통화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시장경제의 회복을 위해 재정정책을 옹호하던 케인즈(J.M. Keynes)마저도 경제학 교과서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 미국 금융위기로 상황은 일변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전세계적으로 당분간은 복지·조세정책에 의한 조정과 개입의 필요성에 대해 컨쎈써스가 이루어질 것이다.1
전세계적으로도 시장만능주의가 한계에 직면했고, 국내에서는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후 실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세력이 뚜렷이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한 중에 눈에 띄는 논의가 있다면, 사회민주주의 대안과 진보적 자유주의 대안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민주노동운동에 기초한 진보정당 실험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지식인운동의 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또하나의 흐름은 진보적 자유주의인데,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과 그 대안에 대한 논의가 여러 갈래에서 진행중이다.
자주파 대 평등파라는 구태의연한 대립구도에 비하면 사회민주주의 대 진보적 자유주의의 대안 경쟁은 진일보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 구도 역시 결국은 “국가인가 시장인가” 하는 과거의 프레임으로 환원되고 만다. 이는 우리가 처한 분단과 냉전의 현실을 모두 끌어안을 수 없고, 새로운 대중과 운동의 지향성을 따라잡기도 어렵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매우 복합적이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본·국가·세계시장 같은 차원의 일반적이고 근대와 관련된 문제도 있지만, 한편에는 분단 극복이라는 특수한 과제가, 또다른 한편에는 지역 형성이라는 포스트모던한 과제가 있다. 자유주의라든지 사회민주주의라는 틀로는 이러한 삼중의 과제에 도저히 맞설 수 없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롭게 대응해야 한다. 이에 필자는 세계적·동아시아적·한반도 차원의 이행기에 적용되는‘한반도경제’라는 대안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국가, 지역, 다양한 경제조직의 세 바퀴로 굴러가는 세발자전거(tricycle)이다.2
2. 세계체제의 재편
먼저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는 기본환경의 변화를 살펴보자. 20세기말 세계는 미국 주도하에 폭발적인 금융적 팽창을 경험했는데, 금융시장에서의 경쟁격화는 세계경제에 대한 미국의 금융적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대불황으로 미국이 금융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행사하는 세계경제에서의 헤게모니는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이 주도한 금융팽창의 주인공은 투자은행이었다.3 투자은행은 흔히 증권회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의 투자은행은 영국에서 이식되어 19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투자은행은 보통 법인을 상대로 자본시장에서 자금조달을 돕는데, 20세기 초에 이르러 상업은행 업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대 뉴딜정책의 핵심은 투자은행을 중심으로 한 거대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하도록 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이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의 투자은행들은 소규모로 존재했다.
투자은행들이 대형화하고 자본시장 업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대규모 금융거래가 손쉬워졌으며, 특히 소매거래의 경우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였는데, 이는 대형 투자은행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에 따라 이전의 파트너십 형태가 해체되고 기업공개가 이루어졌으며 인수·합병이 진행되었다. 규모 확대를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투자은행들의 자금조달구조는 악화되었다. 통화당국의 정책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투자은행은 대차대조표를 최대한 확대하여 자산규모를 극대화했다.
투자은행이 주도한 금융팽창은 내리막길에 있던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를 회복시켰다. 2차대전 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미국은 1960년대말에서 70년대초에 들어서 위기국면에 봉착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후퇴하면서 위신이 추락하자 당시의 경제위기는 제3세계 국가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 투자은행이 추동한 금융시장에서의 경쟁격화는 미국의 지배력을 다시 강화했다. 경쟁에 따른 막대한 자금 흡수는 제3세계와 사회주의권으로의 자금공급을 고갈시켰다. 결국 구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미국만이 군사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독점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 투자은행들의 과도한 위험인수는 2008년에 파탄에 직면했다. 투자은행들은 부동산 관련 담보대출의 증권화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는데, 증권화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투자은행에 예탁되어 있던 자산의 인출요구가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지불능력의 한계에 부딪힌 투자은행들은 파산하거나 매수되어 상업은행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자 위기는 상업은행과 산업에까지 확대되었고, 결국 미국정부는 금융과 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했다.4
대규모 공적자금 지원과 경기부양책 마련, 그리고 사회보장 개혁을 추진한다고 해도 미국경제가 종래와 같은 위상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국가재정이다. 미국이 2040년 안에 재정균형을 달성하려면 다음 세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연방지출을 60% 감축하거나, 연방조세를 현재의 2배로 인상하거나, 실질GDP가 75년간 매년 두자리수 백분율로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5
미국경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과잉소비와 과잉투자에 의존하는 기존의 씨스템이다. 이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막대한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조절해야 한다. 이는 매우 고통스런 구조조정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구조조정을 주도할 능력이 있는지, 미국민들이 이를 추진하는 국가의 역할에 계속 신뢰를 보낼지는 의문이다. 당장 2010년 후반부터는 중간선거를 겨냥하여 공화당이 시장주의의 반격을 조직화할 것이다. 앞으로‘국가’와‘시장’양측의 지지자들 사이에 치열한 대립이 재연되고, 이러한 세계관의 충돌이 미국의 새로운 발전모델 수립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
위기 이후 미국경제의 하강은 분명한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 위기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자본주의 붕괴로 인식하는 단순논법은 현실과는 별 관련이 없다. 오히려 현재의 금융자본을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신호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생애(장기지속)를 분할하고 금융적 팽창을 주요 자본주의 발전의 종결국면으로 파악한 바 있다.6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4번의 체제적 축적순환을 경과했고, 각 체제에는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집적된 자본주의 권력(국가와 자본의 독특한 융합)이 있었다. 그리고 네번째 순환, 즉‘장기 20세기’는, ① 19세기말~20세기초의 금융적 팽창(미국체제의 탄생), ② 1950~60년대의 실물적 팽창(미국체제의 우위), ③ 1980년대 이후의 금융적 팽창(미국체제의 파괴)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금융적 팽창은 또한 새로운 체제의 탄생이 준비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리기는 이를 체제의 근본적 재편과정으로
- 그렇지만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몰락했다고 할 수는 없다. 상품과 자본의 이동은 일시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무역이나 금융질서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임원혁 「신자유주의, 정말 끝났는가」,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참조. ↩
- 이일영 「혼합경제체제로 가는 세발자전거」, 『창비주간논평』 2008.12.24 및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한반도경제론: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서』, 창비 2007 참조. ↩
- 전창환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와 금융자본의 재편」, 『동향과전망』 2009년 여름호 111~15면. ↩
- 지금까지 미국정부가 약속한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 규모는 7.8조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명목GDP의 60%에 달하는 규모이다. 전창환, 같은 글 133면. ↩
- 정건화 「미국의 경제위기와 오바마의 경제정책」, 『동향과전망』 2009년 여름호 94~96면. ↩
-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