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위기 속의 비평과 시의 미학적 윤리
2010년대 시인들의 ‘시의 파레시아’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평론집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등이 있음. redland21@hanmail.net
1. 문학의 위기와 삶의 위기
비평문을 쓸 때마다, 비평가로서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이 자문은 비평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비평(criticism)의 어원이 위기(crisis)라고 하니, 비평가는 우선 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하는 사람이겠다. 위기는 사건에 의해 드러난다. 사건은 어떤 미래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 즉 위기를 촉발한다. 그 위기의 시간에서 주체성의 문제가 불거진다. 위기가 벌려놓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주체는 어떠한 보증도 없이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예민한 감성으로 세상과 주체성의 위기와 접촉하고 그 위기를 통해 구성되거나 해체되는 주체성의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비평가는 자기 시대와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위기를 들추어내고 주체성을 문제화하면서 그 위기와의 대결에 참여한다.
그런데 한국문학계에서 위기 담론은 ‘문학’에 맞추어 전개된 감이 있다. 결국 예전의 문학 또는 (근대)문학 자체가 더이상 지속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논의가 맞추어져 있었다. 물론 그러한 논의가 의미 없다고 할 순 없는데, 문학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와 토론 속에서 문학은 좀더 젊어질 수 있고 습성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국면 속에서 계속해서 돌출해왔던 ‘문학의 위기’ 역시 문제를 설정하고 그 위기와 정면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1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영인(韓永仁)의 표현을 빌리면 ‘문학+성(城)’ 안의 논쟁이어서, 마치 신-구 논쟁처럼 논의가 전개되고 낡은 문학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문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느냐 마느냐 식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이 자본주의 사회와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 한국의 상황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위기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알리바이로 변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영인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문단을 둘러싼 각종 추문으로 인해 ‘(한국)문학’ 자체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위기에 처하고 만 것”2이라며 이전의 주체성을 새로 정립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위기와는 유를 달리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지탄은 사실상 문학 자체라기보다는, ‘문학+성’을 지키고 그 속에서 안주하고자 하다가 그만 어떤 면이 부패해버린 문학제도의 상태에 대한 것일 터이다(‘문학+성’ 바깥에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더 증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문학비평이 결국 그러한 성을 계속 지키기 위해 기능했다면, 현 상태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문학사가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면, 이 위기는 훨씬 더 보편적인 위기의 부분 형상에 지나지 않는”3다고 말한 바 있다. 문학비평은 문학의 자율적 장 안의 문학을 지키기 위해 문학의 위기를 의식하는 것을 넘어 ‘문학+성’ 바깥의 세상에서 전개되는 ‘보편적인 위기’—삶의 위기—를 더욱 의식할 필요가 있다. 문학을 세상의 위기와 연결하여 사고할 때, 문학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비평은 자신이 지닌 실천적 성격(정치성)을 스스로 의식해야 한다. 비평은 시단의 지형도를 설명하면서 교통정리를 하는 글쓰기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학처럼 삶의 위기에 맞서고자 하는 실천적 글쓰기이기도 하다.
2. 세대론과 냉소적 비평을 넘어서
비평의 정치성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한국 시비평에서 적잖이 보였던 어떤 경향—비평이 문학장 내부에서의 인정투쟁적인 세대론으로 빠지는 경향—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4 세대론에 따르면 시사(詩史)는 문학장 내부의 세대교체에 따라 설명된다. 그래서 시사는 벤야민이 근대의 시간성의 특징으로 든 ‘공허하고 텅 빈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역사가 된다.5 이러한 인정투쟁에 따른 세대론은 문학의 위기 담론과 마찬가지로 결국 ‘문학+성’의 안과 밖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6 신세대가 자신의 문학적·정치적 방향을 뚜렷이 의식화하고 구세대의 문학과 투쟁한다면 인정투쟁은 긍정적인 결과—문학의 쇄신—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신세대의 투쟁이 문학장 내의 중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라면 공허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 투쟁에서는 어떤 신세대가 문학장의 중심이 되면 또다른 신세대가 등장하여 문학장의 중심을 향해 이전 세대와 투쟁하는 식으로 문학의 중심 세대 교체가 계속 반복될 뿐이다.
세대론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00년대 시비평에서는 문학적·정치적 자의식이 결여된 채로 지나치게 세대론이 내세워졌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박상수(朴相守)의 글(「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은, 뛰어난 분석과 서술의 전개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대론을 비평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보여서 씁쓸했다. 박상수는 이 글에서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283면)을 감행한 2000년대 시인들을 같은 세대로 묶고는, 주로 2010년대 중반에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을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에 따라 시를 쓰는 세대로 특징화하여 대립시킨다. 박상수가 비판하는 세대는 후자다. 그는 후자의 세대를 대변하는 비평가로 든 양경언(梁景彦)에게서 “2010년대 시 이외의 다른 것들을 모두 지워버리거나 서둘러 비판하면서 자기 세대의 감각과 현실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294면)을 감지한다. 또한 시의 사회적 실천과 연대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양경언의 비평은 “저 오래된 ‘문학적 진정성’ 추구의 또다른 버전”이며 그 비평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시에서 힘겹게 얻어낸 ‘입체적 개인’은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293면)는 것이다.
박상수는 이 글의 전편 평론(「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에서 사회학적 계급론(부르디외)을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단에 등장한 세대를 흥미롭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장 바깥의 한국 사회·경제 변화와 계급론을 적용하여 2000년대 시인들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그 글의 논의 방식은 신선하기까지 했고 우상파괴적인 면이 있
- 한영인 「문학성(文學性)에서 문학성(文學+城)으로, 그리고 그 밖으로」,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하이픈 73면. ↩
- 같은 글 74면. ↩
- 발터 벤야민 「문학사와 문예학」, 최성만 옮김, 『서사(敍事)·기억·비평의 자리』, 길 2012, 529~30면. ↩
- 이 역시 ‘비평의 정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의 정치는 ‘문단 내 정치’에 한정된다. ↩
- 이를 모더니티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모더니티는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는 상품의 모더니티 논리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는 달리, 시의 모더니티와 새로움은 이전 세대의 시에 대항하여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서 확보된다기보다는, 현대사회의 ‘흐름’—그것이 상품의 논리에 따르는 모더니티이기도 하다—에 저항하면서 그 결을 거슬러 나아가는 데에서 확보된다. ↩
- 이렇듯 세대론에 따라 시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벤야민이 비판하는 “학문의 역사를 정치적·정신적 사건의 외부에 자율적으로 분리된 과정으로 그때그때 서술하려는 시도”(발터 벤야민, 앞의 글 529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