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권여선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가 있음. puruntm@empal.com
위험한 산책
1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에서 막 깨기 전에 꾼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등뒤에서 누군가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 남자가 남편인지 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남자가, 그녀가 그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의 가슴이 닿은 그녀의 등과, 그 남자의 팔에 안긴 그녀의 허리가 뜨거웠다. 그녀의 심장은 뚜껑이 닫힌 채 불에 던져진 놋쇠상자처럼 서서히 달구어지며 팽창하고 있었다.
그 달고 격한 느낌을 다시 한번 맛보기 위해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느릿느릿한 말투였다. 바쁜 척은 몹시도 하는 사람이 말은 느리다고, 그녀는 약간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전데요.”
그인 줄은 발신번호 표시로도 알고 목소리로도 알았다. 그리고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집이에요?”
그가 물었다.
“그럼, 집이지 어디겠어?”
“한선배는 갔구요?”
“응.”
잠시 대화가 끊겼다.
꿈속의 그 남자는 바야흐로 그녀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마지막으로 그 말이 듣고 싶다고 그 남자는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 음성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녀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며 약간 높은 톤으로 물었다.
“일찍부터 어쩐 일이야?”
“일찍이라구요? 지금 열두시 다 됐는데요. 전 일어난 지 여섯 시간 됐고요.”
그가 일어난 시간이 새벽 여섯시라면, 그녀의 남편이 목욕탕에서 정성을 다해 머리에 타월을 두르고 있었을 시간쯤이겠다. 사실 그도 그 시간에 일어나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녀가 아는 건 꿈속의 남자가 그녀를 등뒤에서 뜨겁게 안았다는 것뿐.
“난 일어난 지 육분 됐는데.”
“육분!”
그가 혀를 찼다. 그리고 또 말이 없었다.
남편은 노란 목욕용 타월을 머리에 터번처럼 두르고 보랏빛 스트라이프 셔츠만 입은 채 맨다리로 현관에 서서 그녀를 애처롭게 불러댔다. 그때가 여섯시 반경이었던 걸로 그녀는 기억한다. 한동안 잠잠하던 증세가 하필 1박2일의 지방 쎄미나 일정을 앞두고 도진 것이었다. 한사코 벽에 달라붙으려는 남편을 달래 제대로 된 양복을 입히고 타이를 매주고 가방과 우산을 들려 내보내는 데는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 일로 기진맥진해 잠시 눕는다는 것이 긴 잠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입 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녀는 물을 병째로 들이켰다.
“뭐, 먹어요?”
“물 마셔.”
“제가 지금 여기가 약속장소 근처거든요.”
“벌써?”
약속은 저녁 여섯시였다.
“그렇게 됐어요.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그렇고.”
말은 다시 끊어졌다.
“당신 좀 일찍 나올 수 있어요?”
“글쎄.”
그녀는 산뜻하게 나간다도 아니고 못 간다도 아닌 채 미적거렸다.
“그러지 말고 세시까지 나와요.”
“그러지 뭐.”
어쩔 수 없다는 듯 새침하게 대답한 그녀는 황급히 물었다.
“근데 약속장소가 어디였지?”
전화를 끊고 그녀는 장만한 지 얼마 안되는 새 휴대폰을 꽉 쥔 채 골똘히 앉아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게의 집게발에 물린 작은 조개처럼 그 남자의 품에서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입을 벌려서는 안된다. 그 남자가 떠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입을 벌리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더이상 참기 힘든 흉부 통증에 잠에서 깼다.
베갯잇에 닿은 뺨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자신이 울다 깬 줄 알고 말랑한 슬픔의 잔여를 즐기려 했다. 베개의 냄새를 맡아본 후에야 그녀는 꽉 다문 자신의 입에서 진하고 독한 침이 흘렀음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눈물 대신 침을 흘리는 여자라니, 입맛이 썼다. 게다가 악물린 그녀의 양 입귀에서 새어나와 베개를 적신 침은 참으로 역한 냄새를 풍겼다.
휴대폰 화면창은 12:00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난 지 여섯 시간이 됐다고 했고, 지금은 정오였고, 원래 약속은 여섯 시간 후였다. 여섯 시간 단위로 구획된 그의 시간표에 뜻밖의 구멍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구멍을 막아야 하는, 네덜란드인지 노르웨이인지 모를 애국소년이 내밀 수 있는 연약한 주먹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베개에 닿았던 오른뺨을 쓸어내렸다. 이제부터 이것이 내가 사랑을 생각하는 하나의 포즈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우울함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흉터를 만지듯 오른뺨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일, 살이 모조리 썩고도 껍데기만은 굳게 닫혀 껍데기 양 귀로 부글부글 독을 괴어올리는 조개의 액 같은 이 역한 침자국을 천천히 닦아내는 일, 이것이 바로 내가 내용은 사라졌으되 형식은 의연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포즈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부쩍 기운이 났다.
그녀는 서두른 덕에 삼십 분쯤 일찍 도착했다. 그러나 약속장소 근처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열두시부터 줄곧 자신을 기다려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그토록 바쁜 척하는 그가 왜 자신을 기다리며 혼자 점심을 먹고 서점을 기웃거리며 세 시간을 흘려보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정오 무렵에 받은 전화의 뉘앙스는 꼭 그랬다. 고즈넉이 그녀를 기다리고만 있을 듯한.
곰곰 따져보니 그에게는 열두시 약속과 세시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세시 약속이 펑크가 났고 열두시 약속은 아무리 늦어도 세시쯤에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약속한 상대가 오기 전에 재빨리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의 계산에는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그녀가 삼십 분쯤 일찍 온 것과 앞사람이 삼십 분쯤 늦게 온 게 문제였다. 그의 입장은 공평무사했다. 그녀는 일찍 온 만큼 기다려야 했고 앞사람은 늦게 온 만큼 용건을 단축해야 했다. 모든 일정이 삼십 분쯤 비스듬해질 뻔했지만 그에겐 모든 일정을 바로잡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하긴 비스듬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하루 일정이었다.
그는 기다란 검정 우산을 들고 세시 십오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