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유랑자의 귀로

윤대녕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 창비 2007

 

 

황도경 黃桃慶

문학평론가 agada320@hanmail.net

 

 

135-301

윤대녕(尹大寧)의 소설은 이른바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로 요약되는 세계다. 그의 인물들은 일상과 초월, 현실과 환상,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서 흔들리다 결국 ‘지금-여기’가 아닌 저편의 세계를 향해 일탈의 모험을 감행해왔다. 그들은 고독하고 섬세한 도시인이었고, 일상의 구차함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는 일탈자였으며, 그리하여 ‘저곳’을 향해 떠난 낭만적 모험가였다. 그들은 항시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거나 여행중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만나는 누군가는 그들의 탈주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항시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새 작품집 『제비를 기르다』에서 우리는 그들의 다른 얼굴을, 달라진 행방을 만난다. 요컨대 그들은 ‘돌아오는’ 중이다. 존재의 시원을 향한 열망으로 떠나갔던 그들이 이제 고향으로, 일상으로,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이들은 미당(未堂)이 ‘국화 옆에서’ 노래한 그대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귀향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화보다는 연꽃을 닮아 있다. 국화 향기가 진동하던 집 안에 탐욕스런 노인네가 살고 있을 뿐이었던 것과 달리(「고래등」), 연꽃은 진흙 속에서 오히려 화려한 꽃을 피워 물 위에 흐드러져 있다(「탱자」). 윤대녕은 이제 연꽃 아래 숨어 있을 그 진흙탕 같던 세월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전의 윤대녕 소설이 불현듯 무언가에 이끌려 어딘가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면 이제 그의 소설은 그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단길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고(「낙타 주머니」), 제대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며(「제비를 기르다」), 감옥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온다(「연」). 그런가 하면 한평생 가족을 버리고 집을 떠나 있던 아버지는 삼십오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고(「편백나무숲 쪽으로」), 가족들에게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고모가 고향인 제주로 오며(「탱자」), 사십대 중반이 된 ‘나’는 젊은날의 방황을 마치고 돌아와 고향인 강화도의 한 술집을 찾아간다(「제비를 기르다」). 이제 이들은 “결국 돌아오게 돼 있는 것”이라는 백부의 말처럼(「편백나무숲 쪽으로」) 돌아옴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돌아온 이후의 삶이다. 가난과 고독과 상처와 병을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윤대녕 인물들의 화두가 된다. 그리하여 사랑을 묻고 결혼을 하고, 셋방을 전전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시도하고, 융자금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하고, 은행에 가서 공과금을 내는 장삼이사의 풍경이 소설에 자리하기 시작한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이제 비로소 산문적 현실의 세계에 돌아온 것이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연을 따라 저편 세계로 건너가던 남녀들의 이야기도 이젠 그 양상이 달라진다. 가령 「제비를 기르다」에서 ‘나’와 문희는 그리움과 사연을 묻어두고 각각의 일상으로 돌아가 살기 시작하고, 「연」에서 ‘나’와 정연은 해운, 미선과의 어긋난 인연 앞에서 그 어긋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던 길에 유턴하여 자기 삶으로 돌아가고, 「못구멍」에서는 별거 후 다시 결합한 명혜와 기훈이 온 집안에 가득한 못자국을 끌어안은 채 어쨌든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연줄이 얼레에서 계속 풀려나가고 있는 「연」의 마지막 풍경에서 환기되듯, 소설 속 남녀들은 길에서 마주친 인연을 따라 저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인연의 끈을 풀어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찌 ‘먼 곳’에 대한 갈망마저 사라졌겠는가.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북한산은 현실 안에 자리한 ‘먼 곳’이라 할 수 있으니, 윤대녕의 인물들은 이제 멀리 떠나는 대신 산을 오른다. 하지만 이때에도 이야기는 이들이 산을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우섭과 정연이 만난 것도 북한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이고(「연」), 비단길을 함께 여행했던 화가를 다시 만난 것도 북한산 등반 후 내려오는 길에서였다(「낙타 주머니」). 이들은 북한산을 올라갔다 내려와서 두부김치와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목욕을 하고 하산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면서 동시에 일상으로 돌아오기 전 행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물고기처럼” 떠나려고만 했던(「편백나무숲 쪽으로」) 젊은 시절 윤대녕의 인물들은 이렇듯 청춘과 젊음을 다 소진한 중년이 되어 혹은 늙고 병든 노인이 되어 한때는 상처와 혼돈의 근거였을, 그래서 떠나고 외면했던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와 있다. 그것은 상처와 고통과 혼돈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금-여기’의 삶으로 돌아오는, 그리하여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편백나무숲 쪽으로」에서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주인공에게도 그런 귀향을, 고통스런 삶의 근거였던 고향과 가족의 포용을 요구하게 된다. 가슴에 독을 품고 살아온 주인공은 아버지의 지난했던 삶 역시 “생의 회한과 허무를 이겨내기 위한 노동”이었음을 이해하기에 이르고, 결국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뿐 아니라 술집을 꾸려가며 자신의 딸과 남의 딸을 키운 서모, 아버지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자신을 데려다 키운 백부, 출가한 사촌동생 등 나름의 사연과 상처 속에서 살아왔을 사람들 모두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과연 “그들은 모두 남이던가? 이제는 남이 아니던가.” 주인공의 독백에서 드러난 이런 질문을 통해 윤대녕 인물들은 세상 속으로 그리고 사람들 속으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을 것이니, 아마도 “그래도 사람이 부처”고 “누가 만드신 것인지 세상은 참 어여쁜 것”이라는 「탱자」 속 고모의 말은 그렇게 해서 그들이 종국에 마주하게 될 새로운 진실일 것이다.

인물들의 귀로에 걸맞게 소설의 서술방식이나 언어도 달라져 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나 환상적 세계가 전개되는 법도 없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언어 대신 비교적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언어가 사용된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방식도 눈에 띈다. “조부가 세상을 뜬 것은 1975년 여름의 일이었다”(「탱자」), “내가 문희를 만난 것은 1986년 일이었다”(「제비를 기르다」), “1999년 사월 초순의 일이었다”(「연」), “낙타 주머니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1995년 2월 14일이었다”(「낙타 주머니」)와 같이 일련의 사건들을 구체적인 시간을 제시하며 요약하듯 서술하는 방식은 서술되는 사건이나 상황의 현실성을 강조한다. 이전의 윤대녕 소설이 특정 지역이나 공간, 사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설명과 묘사를 통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 어느 순간 전혀 낯선 세계로 변모하는 것을 보여주었던 데 비해, 이 소설집에서 그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시간에 집중된다. 이제 윤대녕 소설은 흘러가는 강물 같은 세월을 묵묵히 따라가고 있는 듯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변화를 무심한 듯 바라보며, 종국에 그것이 데려다줄 ‘무무(無無)’의 세계(「낙타 주머니」)를 기대하는 것, 이는 아마도 존재의 시원을 향해 가는 윤대녕 인물들의 또다른 방법이기도 할 것이니, “흐름의 끝에 다다른 강물처럼 잠잠해”진(「제비를 기르다」)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더 단단해지고 낮아질지 지켜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