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유럽과 중국의 비교사

 

 

에릭 밀런츠 Eric Mielants

유타대학 사회학과 교수. 이 글의 원제는 “Europe and China Compared”이며 Review 제25권 4호(2002)에 실린 것을 필자가 축약한 것임. ericmielants@yahoo.com

ⓒ Eric Mielants 2002/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중국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문명들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중세에 중국은 십중팔구 모든 권역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발달한 권역이었을 것이다. 1100년 무렵 중국의 인구는 약 1억명이었으며, 화폐경제의 발전(지폐, 서면계약서, 신용대부, 수표, 약속어음, 환어음의 사용) 수준이 높았다.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황제는 전 유라시아대륙에서 최강의 맹주였다. 중국을 기원후 1000년의 유럽과 비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회경제·군사·기술상의 발전에 관한 내기에서 중국에 돈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 800년 뒤에는 유럽이 정치·군사·경제·기술면에서 지구를 제패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 제국에는 서유럽이 했던 대로 그 주변부를 정복하고 복속해서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식으로 발전할 능력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럴 의향이 없었던 것인가?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중국과 유럽 사이에 존재한 ‘거대한 분기’(great divergence)의 발생시기를 산업혁명기로 잡아왔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왜 산업혁명 그리고 반복성장(recurring growth)의 이익을 경험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포머런즈(Kenneth Pomeranz)의 연구(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 Press 2000)는 왜 서구가 궁극적으로 반복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고 중국(이나 인도)은 그렇지 못했는가에 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내놓으려는 시도로 세계사 분야에 크게 이바지한 업적이다. 포머런즈는 주로 서구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전통적인 입장에 도전한다. 그들은 서구시장이 다른 지역보다 ‘완전경쟁’과 자유노동을 더 많이 제공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도약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했다고 믿어왔다. 마치 유럽의 산업혁명이 유럽의 독특한 내재적 특징 덕분에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입수가능한 문헌을 파고들어서 1800년 이전의 유럽이 독특했다는 주장을 파기하는 대단한 작업을 한다. 근본적으로 그는 서구가 흥기한 것(또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을 오로지 유럽만을 살펴봄으로써, 또는 이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 및 종교적 특수성의 관점으로 유럽의 우세를 설명함으로써 해명하려는 학계의 모든 시도의 토대를 뒤흔든다. 그는 유럽이 산업혁명 이전에는 세계사 배후의 원동력이 아니었고, 세계무역을 석권한 19세기 이전에 핵심은 여럿 존재했으며, 이 지역들이 모두 다 적지 않은 일인당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거듭해서 지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은 인구가 밀집한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극히 중요한 경제적 특징을 지녔던 듯하다. 상업화하고, 재화·토지·노동이 상품화되고, 시장을 동력으로 삼는 성장이 이루어지고, 가계가 출산과 노동배분을 경제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이 그것이다”(같은 책 107면). 문헌을 철저히 검토하면서 포머런즈는 유럽중심적인 신화들을 깨뜨리지만, 19세기 이전 시기를 “지배하는 중심이 없는” 근본적으로 “다중심적인 세계”로 재평가하려고 한다(같은 책 4면, 273면).

서유럽이 신세계와 맺은 독특한 수탈관계, “그리고 이 관계가 낳은 신세계라는 횡재(windfall)의 이례적인 규모”(같은 책 11면)에 맞춰진 포머런즈의 촛점, 그가 ‘자본주의, 해외의 강제, 산업화’ 사이의 연계에 부여하는 중요성, 그리고 유럽(특히 영국)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맺은 독특한 관계를 핵심부-주변부의 관계들 중에서 독특한 사례로 만든, (유럽으로서는)아주 운좋은 몇몇 전지구적 국면과 결합된 ‘유럽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제도와 폭력적 국가 간 경쟁’이라는 보이는 손에 대한 그의 강조는 세계체제론에 아주 가깝게 다가간다. 실제로,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세계 정복(과 이 때문에 벌어진 ‘유럽 내부의 격렬한 군사적 경쟁의 결과’)이 유럽의 대두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포머런즈 스스로가 유럽의 지배를 받는 주변부들과, 중국이 그 주변부와 맺은 관계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차이점들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는 점이다(같은 책 255면, 267면, 289면). 포머런즈의 연구는 사회경제적 발전의 관점에서 비유럽(특히 동아시아) 세계의 활력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고 노력했으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의 연구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근대 초기’ 이전의 장기발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과 중국의 다른 정치적·경제적 궤도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해하려면 중국이 안고 있던 구조적인 지리·지정학적 구속과 한계, 그리고 엘리뜨가 내린 정책 선택, 이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비록 유럽의 영향이 가져온 충격을 시간상 매우 제한된 기간에 국한하거나 그것을 (주로) 산업혁명 때문에 일어난 군사·기술상의 비약적 발전 덕택으로 돌리는 것이 요즈음의 유행1이지만, 나는 거대한 분기의 뿌리를 13〜15세기에서 찾아볼 것이다.

 

 

1. 송조(900년경〜1280년) 중국의 사회경제 혁명

 

아시아의 무역망 규모와 교환되는 재화의 양은 전근대 시기 대부분에 걸쳐 유럽과 견주어볼 때 놀랍기 이를 데 없다는 포머런즈의 주장은 물론 옳다. 10세기부터 200톤짜리 정크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중국인의 수가 늘어났다. 송조(宋朝)에는 쌀·자기·후추·목재·광물 같은 재화들이 엄청나게 많이 바다 건너로 운송되었다.2 송나라 때 해운업에서 합작투자와 선박대여업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무역세로 얻은 중국정부의 세수가 유례없이 높은 지점에 이른 것은 바로 송나라 때였다. 그때 해운기술이 훨씬 더 개선되고 중국정부가 굵직굵직한 조선(造船) 프로그램에 착수하자 무역량은 급증했다. 늘어나는 비단무역을 제쳐두더라도 대규모로 거래되는 자기가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송나라 때 사람들은 “차츰차츰 상업 지향적 농경에 의존하거나 농업 이외의 직업에 의존하게 되었다.”3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과 통상관계를 촉진하려는 적극적인 대외무역정책이 공식화되었다.”4 그러므로 무역이 그토록 번성했다는 사실은 황실이 무역을 적극적으로 북돋웠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12세기말경 차·소금·술에 매겨진 간접세에서 나온 세금은 국세총액의 70% 가량 되었다. 이렇듯 송나라 때 중국의 주요한 부는 상업과 수공업에서 나왔다. 송나라 초기의 세수 대부분이 아직 농업에 가해진 조세에서 나온 데 비해, “북송 시대 중엽 이후 국가는 점점 더 큰 비율의 세수를 무역에서 끌어냈다.”5 남송 당국은 유목민의 침입으로 “거상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했으므로” 무역에 훨씬 더 많이 의존했다.6 그 거상들은 무역이 팽창해서 도시가 점점 더 발달하고 공업, 특히 채광·자기·제염산업에서 분업이 더 심화된 송대에 등장했다. 이 산업들은 유럽의 직물공업과 광산업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와 유사하게 발전한 듯이 보였다. 단지 규모가 훨씬 더 클 뿐이었다.7 따라서 이 시기 중국의 생활수준은 틀림없이 유럽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유목민에 의한 위협의 증대가 바로 이러한 국제무역의 급증과 연관되어 있다. 이 위협 때문에 “무역 팽창을 통해서 어떻게든 국부를 늘리려고 노력한 송의 상업중시 정책”이 생겨났다.[8. Yoshinobu Shiba, “Sung Foreign Trade: Its Scope and Organization,” M. Rossabi, ed., China Among Equal: The Middle K

  1. 포머런즈 역시 산업혁명을 세계를 변혁시킨 분수령으로 여긴다. 그러나 근대성을 산업혁명과 동일하게 보는 강박관념은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불운한 것이다. 산업혁명은 단지 서구가 1800년 이후에 더 빠르고 더 맹렬하게(궁극적으로는 핵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격차를 벌리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모즐리는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이 세계무역의 해상로를 통제한 덕분에 전지구적 세력균형이 이미 유럽에 유리하게 급격히 기울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준다(K.P. Moseley, “Caravel and Caravan,” Review 1992년 여름호 538면).
  2. 이 글에서 나는 촛점을 중국과 그외 지역 사이의 교환에 맞춘다. 따라서 자본주의체제의 창출에 국제시장의 획득과 지배가 극히 중요하다는 식으로 유럽과의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국지적이거나 지역적인 시장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상인계급의 등장을 다루려면 최고 수준의 이윤, 즉 원격지 무역망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3. Yoshinobu Shiba, “Urbanization and the Developments of Markets in the Lower Yangtze Valley,” J. Haeger, ed., Crisis and Prosperity in Sung China, Tuscon: Univ. of Arizona Press 1975, 39면.
  4. Laurence Ma, Commercial Development and Urban Change in Sung China (960~1279), Ann Arbor: Dept. of Geography, Univ. of Michigan, Michigan Geographical Publication No. 6, 1971, 33면.
  5. Yoshinobu Shiba, Commerce and Society in Sung China, Ann Arbor: Univ. of Michigan, Center for Chinese Studies 1970, 45면.
  6. Etienne Balazs, “Urban Developments,” J. Liu & P. Golas, eds., Change in Sung China: Innovation or Renovation?, Lexington, MA: DC Heath & Co 1969, 19면.
  7. 송조 중국에서 “밀과 보리의 산출량/파종량 비율이 약 10:1이었고 쌀의 경우에는 훨씬 더 양호했던 반면 중세 유럽에서 밀의 전형적인 산출량/파종량 비율이 4:1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Angus Maddison, Chinese Economic Performance in the Long Run, Paris: OECD Centre Studies 1998, 31면). 중국의 농업은 “시종일관 자립적”이었던 반면, 유럽인들은 유럽대륙에서 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식민화 과정을 거쳐 주변부를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식민화 과정은 처음에는 유럽 내부에서, 나중에는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금은이 동방으로 구조적으로 유출됨(아래의 논의를 보라)으로써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해졌다. 이로써 이율이 자주 높아졌고, 역으로 농업산출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