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유령작가의 거짓말 혹은 진실

김연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metanous@naver.com

 

 

나는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金衍洙)가 이번에는 ‘유령작가’임을 자처했다. ‘유령’과 ‘작가’의 결합. 여기에는 어떤 흔적에 대해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뉘앙스가 있다. 흔적이란 일차적으로는 김연수가 쓴 소설일 테지만, 흔적의 매개가 문자라는 점에서 조금 원론적으로 접근해보자. 우선, 플라톤이 문자의 발명을 두고 기억력의 퇴락을 염려한 것, 혹은 루쏘가 문자는 간접적 기호이며 언어는 은유에서 시작했다고 말한 인식의 계보로부터 시작해보자. 또한 고대인들이 밀랍판을 기억의 여신 므네모씨네의 선물로 간주했다는 사실 역시 쓰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 나열한 사례들에는 원본과 모상의 어렴풋한 그림자가 있다. 현존을 대리적으로 표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원본과 모상의 관계다. 즉 재현(representation)의 아포리아는 글쓰기 역시 비켜가지 않는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소설의 미학이 이 재현적 세계관을 근간으로 하는 리얼리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같은 플라톤식의 이분법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글쓰기’ 역시 플라톤 버전의 모상, 무엇인가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단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흔적’에 대한 추적담이다. 이 소설에서 ‘흔적’은 『왕오천축국전』의 해명되어야 할 문장이자, 등반일지의 마지막 문장(“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다. 화자는 계속 이 흔적의 의미를 질문한다. 그러나 흔적에 대한 추적은 계속되지만, 끝까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다. 『왕오천축국전』에서 빠진 글자가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의 답은 흔적 너머에 남겨져 있다. 다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문장은 끝날 수 있고,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역으로 말하면, 소설쓰기라는 행위 역시 이 흔적의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소설이 완성되어갈수록 “소설 속 여자친구의 삶에서 자신이 점점 지워”진다. “은밀한 존재는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문장으로는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후적으로 기술될 뿐인 흔적은 온전한 진실을 보증하지 못한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 읽으면 글쓰기는 플라톤의 탄식 이래로 하나의 모상에 불과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가능케 한 대목이었다. 이를 에피그램으로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할수록 진실과는 멀어지는 법. 즉, 씌어진 것은 거짓말이다!’

물론 우리는 원본이라 믿는 것이 곧 백퍼센트 진실이나 현존의 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일찍이 충분히 말한 바 있다(『굳빠이 이상』). 영영 닿을 수 없다는 것, 설혹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 이 불가능한 변증법을 우리는 아포리아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김연수의 작업들이 출발한 지점이었으며, 한 시대의 결절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이번 소설들 역시 출발점은 다르지 않지만 흔적에 작동하는 상상력(구상력)을 강조하는 것이 이전보다 더 나아간 지점이다. 진짜에 대한 호기심과 믿음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흔적에 대해 우리는 추적한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주석’ 작업이다. 심연에 던져놓지 않기 위해 ‘나만의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것. 이것이 회의론자가 아닌 주석가로서의 김연수를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가 역사 모티프나 소재로 관심을 옮겨가는 모습 역시 이와 관련된다.

역사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엄밀히 말해 사료(史料)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소설들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역사의 재해석이나 재구성과는 다른 작업이다. 흔한 말로 ‘작가의 역사의식’ 같은 것을 말하기도 힘들다. 확실한 것은 그가 ‘구성’된 것으로서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사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흔적(사료, 팩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는지 말하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원본으로서의 ‘삶’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삶’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원론적이고 고루한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저자의 첨언은 간명하다.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거짓된 마음의 역사」)되는 것이다.

가령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 따르면, 안중근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저격은 필연이자 우연인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이같은 기술법을 은폐하고 있다. 안중근이 아니라면 우덕순이 그 일을 했을 것이고, 안중근의 거사(巨事)는 사후적 인과에 의해 절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이같이 당대의 구조(필연)와 행위자의 우발성(우연)이 만나는 것에 대한 역사학·사회과학의 주제를 보여주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근래 인문학의 담론과 그 트렌드를 떠올린다면, 저자의 태도를 문제삼기 위해서는 다른 지면이 필요한 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이 소설에서는 이등박문도 안중근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이등박문과 안중근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 지금―여기의 인물들이 비루한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동생과 그를 돌보는 형이 서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자기 삶 속의 우연과 필연의 납득할 수 없는 (그러나 납득해야 하는) 관계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사료 역시 흔적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을 개입시키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지만, 누구도 확실성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씌어진 모든 소설은 주석 혹은 거짓말이고, 모든 소설가는 대필작가 혹은 거짓말쟁이다. 결국 가장 원론적인 주제로 돌아왔다. 시인들이 왜 ‘공화국’에서 추방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쓰기의 매개인 문자에 대한 의혹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가장 원론적인 주제에 도달한 장면이 아이러니컬하다. 결국 김연수는 완곡하게 고백한바, 거짓말에 대해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싶었던 셈이지만 이것은 ‘크레타인의 역설’(Cretan paradox)이다.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작가의 말」)가 그립다는 말 이후 또 어떤 진지한 ‘거짓말’의 세계가 펼쳐질지 다시 궁금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