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장편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등이 있음. silverpaper@chollian.net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1

 

예전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대로 누운 채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든가 베개에 깊숙이 얼굴을 묻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일은 없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액자에 오래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잠에서 깨어나면 싸이드테이블 위의 시계가 겨우 여섯시를 가리킨다. 서두르지 않아도 출근 전까지 피트니스클럽에서 새벽 운동을 마치고 커피와 쌜러드를 곁들여 간단한 아침식사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꼭 필요한 일만 하면서 살면 확실히 일과가 규칙적이 된다.

8년 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뒤 한동안은 매일 밤 폭음을 했다. 회사가 한창 몸집을 불려갈 시기여서 밤마다 약속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음날 반드시 제시간에 출근할 만큼 몸도 욕망도 성했었다. 요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건강관리를 할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술자리가 식상해서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어졌다. 서로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주고받는 시효 짧은 화제 또한 시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자들이 무조건 예뻐 보이던 때만 해도 욕망과 그것을 소비할 방향성을 갖고 있었던 듯싶다. 그 시기가 지나간 뒤 어린 여자들과 노닥거려야 하는 룸쌀롱 출입이 피곤해지기 시작하더니 소음에 예민해지고 아예 남의 목소리 자체가 싫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샤워를 한 뒤 혼자서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한두 잔 마셨다. 다음날 아침 탁자 위에서 어중간한 색깔의 물을 담고 있는 크리스탈 잔을 발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술을 따라놓은 뒤 잊어버리고 그냥 잠든 것이다. 벽시계가 10분씩 늦게 가는데도 시간을 맞추기보다는 그만큼 빼가면서 시계를 본 지 몇달째이다.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회사일 역시 마찬가지여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별로 무리할 일이 없다. 잘되든 안되든 결과 또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오면서 만난 적 있는 비슷한 누군가와 얼굴이 겹쳐지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쉬워졌다.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매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날짜와 빈칸만으로 이루어진 새 플래너 수첩을 펼쳤을 때는 내 앞에 많은 미지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몇개의 스케줄을 적어넣으면 그것은 조각조각 나뉘고 그 다음부터는 익히 아는 일상의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경륜이라고 말하든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이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필요없게 되며 따라서 현상유지 이상의 에너지가 분비되지 않는다. 어느정도 정점에 이른 사람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지 몰라도 더이상 자신의 속에서 미지와 신비를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2

 

공항은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갖가지 동선을 그으며 시간 순으로 교차하는 소음과 움직임 속에 서 있다보면, 마치 지구가 자전하듯 삶이란 정해진 궤도를 따라 굴러갈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J를 배웅하는 일조차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면 재킷과 포켓이 많은 카메라 가방, 윗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의 하얀 만년설 심벌까지 J는 평소 사무실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낯빛이 창백했고 튀어나온 눈썹뼈 밑의 두 눈에 유난히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회복기에 있는 환자처럼 입술이 까칠했다.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가락으로 흡연실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리벽 뒤에서 몇몇 사내들이 체념한 표정으로 묵묵히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운 뒤 J가 재킷 주머니에서 천천히 보딩패스와 여권을 꺼냈다. 검색대를 통과해 탑승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는데 걸음걸이는 끝내 무겁고 어색했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공항 이용료를 내고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얼마 안 가 다리가 나타났다.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나는 비상등을 켰다. 자동차들이 빠르게 옆을 지나쳐갔다. 다리 아래로는 바닷물이 교각 주변에 잔무늬를 만들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J의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이거 선배 가져가. 왜? 담배도 끊어버리고 떠나려고. J의 결연한 태도와는 상관없이 담배는 한 개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불을 붙이고 차문을 열고 나가는데 봄바람이 재빨리 연기를 흩으며 손가락 사이를 지나갔다. 그때 하늘 저 멀리로부터 내 머리 위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커다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식인상어처럼 둔중한 은색의 배와 위협적으로 번쩍이는 날개. 초월적 존재의 냉담한 위엄 같은 것조차 느껴졌다.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체불명의 날카로운 광선에라도 쏘인 듯이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바람 때문이었다. 바람은 또 재로 변한 J의 담배를 한순간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흩어버렸다.

 

점심시간이라서 사무실 안에 빈 의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의 실내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컴퓨터의 모니터들은 푸르스름한 빛을 담은 채 의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간유리 칸막이들을 지나쳐 사장실로 들어갔다.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건 뒤 여러개의 서류파일이 기다리고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신입 편집사원 연수 기안과 국제도서전 홍보물 문건. 그리고 맨 아래의 파일에는 신간의 신문광고 스크랩, 2차 광고 시안, 광고비 조견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검토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터폰을 받고 편집장이 내 방에 들어왔다. 회색 슈트 안에 무채색의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그녀는 오랜 세월 사무직으로 일해온 사람들 특유의 건조하고 소극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국장님은 잘 떠나셨어요? 응. 가족들 아무도 안 나왔죠? 합의하고 수속 다 끝냈는데 가족이 어딨어. 그럼 연수기간 끝나도 영원히 안 돌아오시는 거 아녜요? 영원히?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쉬는 것뿐이야. 휴가도 없이 10년 넘었잖아. 그건 사장님이 더한데, 이럴 땐 오너가 더 안 좋네요. 그렇게 되나?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요, 부서장들 아침회의 때 인사 다 했거든요. 점심 하고 들어오면 사장님께도 인사시켜야 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으시죠?

스케줄 표를 확인해보니 회의가 두 건에다 외부 미팅이 있었고 저녁 약속도 잡혀 있었다. 반드시 내가 참석할 필요는 없는 일들이었다. 회사는 이제 경영자의 개인적 역량과 의욕이 아니라 씨스템에 의해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거의 공격적이라 할 만큼 과감하게 회사를 경영했다. 출간 여부를 결정짓는 원고검토에서부터 작가 에이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무는 J에게 일임했다. 출판사 가운데에는 간혹 문화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수단껏 세금을 면제받아 노골적으로 땅투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베스트쎌러를 한 종이라도 내고 나면 그 뒤부터 출판에는 더이상 투자하지 않고 수익성있는 주변 사업에만 열을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부나 자치단체의 예산, 이권이 걸린 단체장 자리를 기웃거리느라 정작 책은 관심 밖인 출판사도 이따금 보아왔다. 영세한 업계 형편으로서는 그것도 일종의 생존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흐름 안에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책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J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면 J는 그것을 질적으로 성장시켰다.

처음 출발할 때 나는 언론사에 소속된 출판사업부의 경력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3년 후에는 편집장이 되었고, 다시 2년 후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회사가 단행본 출판부를 없애려고 할 때 그것을 인수해 연간 매출액 300억인 지금에 이르렀다. 해외출판 에이전시에다 해외 문화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