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윤성희 尹成姬

1973년 경기도 수원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1

 

분만실 밖에서 아버지는 담배 한갑을 다 피웠다고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한해가 저물어가는 거리 풍경을 보여주었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덟 시간째 진통중이었다. 아버지는 시계를 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새해에 처음으로 태어나는 아이이길 바란다. 그러면 모든 행운이 자기에게로 몰려올 것만 같았다. 가게는 몇달째 적자를 보고 있었다. 겨울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연탄은 몇장밖에 남지 않았다. 때마침 산부인과에서는 새해 첫아이가 이 병원에서 태어날 경우 소아과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12월 31일 11시 34분에 언니가 태어났다. 30분만 늦게 나왔으면 좋았을걸…… 아버지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뱃속에 아직 한명이 더 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시계를 보면서 조금만 빨리,라고 외쳤다. 1월 1일 0시 31분에 내가 태어났다. 30분만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걸 그랬죠? 이번에는 간호사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곧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낀 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서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D시에서 꽤 유명한 나이트클럽의 사장이었다. 할아버지의 교육철학은 오직 한가지였다. 강한 정신력! 할아버지는 한때 D시를 떠들썩하게 만든 유도선수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도, 태권도, 검도를 배웠다. 여덟달 만에 태어나 온갖 잔병치레를 하며 자라온 아버지에게 운동은 벅찼다. 운동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말더듬이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얼굴만 보면 입이 딱 붙어버리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제대로 했어. 전 이제 집을 나가겠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라고. 한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어.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낳은 두 딸을 안아보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아버지는 언니를 업고 나를 안은 채 고향으로 향했다. 집을 떠난 지 10년 만이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이트클럽의 사장이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더듬지 않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두 손녀를 양쪽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나와 언니는 동시에 똥을 쌌고 동시에 울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유난히 싫어했던 할아버지는 예전에 사귀던 술집 마담에게 선물하기 위해 사둔 아파트의 열쇠를 아버지에게 주면서 말했다. 나가 살거라.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나와 언니를 구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 매일 할아버지에게 가서 전날의 영업실적을 보고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망할 자식이라는 욕을 들었다. 배다른 동생들이 각자 딴주머니를 차는 바람에 나이트클럽의 경영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 일곱 명이나 있었다. 그중 한 삼촌은 가짜 양주를 제조해 할아버지의 나이트클럽에 팔아넘겼고, 또다른 삼촌은 질 나쁜 안주를 팔아 원가의 다섯 배도 넘는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소개하는 조건으로 커미션을 받는 삼촌도 있었다. 아버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큰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삼촌들은 그 문제에 관심조차 없었다. 제각각 어머니가 다른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큰형이었다.

우리를 키운 것은 누룽지 할머니였다. 원래는 옆집에 살던 할머니였는데, 누룽지를 너무도 좋아해서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수십억의 빚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날 할머니는 동네 친구들과 꽃구경을 갔었다. 할머니의 가방에는 손자에게 주려고 산 바나나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던 집 대신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손자에게 먹이려던 바나나를 우리에게 먹였다. 누룽지 할머니는 자주 졸았다. 밥을 먹다가도 졸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졸고,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도 졸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노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장난감은 버렸다. 나에게는 언니가, 언니에게는 내가 장난감이었다. 사람들이 누가 언니니? 하고 물으면 우리는 저요, 하고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누가 동생이니? 하고 물으면 얘요, 하고 서로 상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니가 걸으면 나는 그 뒤에 서서 언니의 걸음걸이를 흉내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언니가 내 옆에 앉아서 내가 그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이 놀이를 그림자놀이라고 불렀다. 누룽지 할머니는 우리에게 설탕을 바른 누룽지를 쥐여주면서 말했다. 헷갈려 죽겠다, 헷갈려 죽겠어.

누룽지 할머니는 우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당신의 손자 이름을 중얼거렸다. 헷갈린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더니, 결국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들이 뒤엉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할머니 앞에서는 더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실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누룽지에 설탕 대신 소금을 바르거나, 국에 간장 대신 식초를 넣었다. 할머니의 음식이 맛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밥 대신 우유를 먹었다. 하루에 1리터씩 마셨더니 키가 쑥쑥 자랐다.

거실에는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의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카펫 위를 걸을 때는 우리만의 규칙이 있었다. 언니는 붉은색을 밟으면 안되고 나는 초록색을 밟으면 안된다는 규칙이었다. 붉은색 또는 초록색을 피해 카펫을 밟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까치발을 하고 카펫을 걷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몸이 기우뚱거렸다. 놀이의 규칙을 모르던 아버지가 우리를 한의원에 데리고 가, 얘들이 똑바로 걷질 못해요, 혹시 빈혈이 있나요? 하며 묻기도 했다. 우리는 벽 가운데에 선을 긋고 양쪽에 스티커를 붙였다. 언니가 붉은색을 밟게 되면 내 쪽에 스티커를 붙였고, 내가 초록색을 밟게 되면 언니 쪽에 스티커를 붙였다. 우리가 열살이 되면 그때 더 많은 스티커를 붙인 사람이 언니가 되기로 했다. 사람들이 스티커에 대해 물어보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착한 일을 할 때마다 하나씩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어른들은 엄마도 없는데 참 잘 컸네, 하고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번은 내가 담벼락 밑에 나 있는 민들레를 밟았을 때 언니가 다가와 내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스티커 한개. 우리는 짓밟힌 민들레를 보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길을 걸을 때도 이 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민들레를 밟아 죽인 후에 웃는 우리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동심리학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무조건 사랑하세요. 사랑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번씩 우리를 꼭 껴안아주었다.

버스정류장 앞에 새로운 보도블록이 깔렸다. 하필이면 붉은색 벽돌이었다. 언니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붉은 벽돌을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두 팔을 벌리고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걷는 언니는 체조선수 같았다. 짜장면 배달하던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달려들 때도 언니는 그렇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혼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하루에 두번씩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여전히 길을 걸을 때면 초록색은 밟지 않았다. 혹시 나도 모르게 밟게 되면 그날은 집에 돌아와 언니 쪽 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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