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유폐된 내면의 행로

조경란론

 

 

서영인 徐榮硜

문학평론가, 경북대 강사. 제7회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평론으로 「미래를 꿈꾸는 서사의 지난한 역정–황석영론」 「새로운 총체성을 위한 지방과 주변의 리얼리즘」 등이 있음. sinpodo12@hanmail.net

 

 

1. 고립된 내면의 서사

 

등단 후 지금까지 조경란(趙京蘭)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에 매우 집요하게 천착해왔다. 그의 소설에서 중심인물과 주변의 관계는 극히 제한적이며 인물들은 제한된 관계 속에서 언제나 무심히 혼자 떠돈다. 이들이 홀로 보내는 일상, 혼잣생각과 내면의 파장만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와 외부 환경과의 격리, 그리고 그 세계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인물의 시점, 이것이 이른바 세상을 “12자, 8자 통유리로 들여다보고 이해하는”(「불란서 안경원」, 『불란서 안경원』, 문학동네 1997, 303면) 조경란 특유의 독법인 셈이다.‘불란서 안경원’의 통유리 안에서 ‘나’는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 가게로 들어오는 고객들을 그저 바라본다. 세계는 ‘언제나’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그 무미건조함은 변화없이 지속되고 있다.‘통유리’라는 투명한 차단막으로 자신과 외부의 경계를 분명히하고 그 안에서 꼼짝 않고 버티면서, 칩거 이전을 회고하거나 칩거 이후를 상정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조경란 소설의 집요한 내면성을 구성한다.

90년대 이후 내면서사의 흐름에 조경란 소설을 한 거점으로 놓을 수 있다면 이러한 내면 자체에 대한 탐색을 중요한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내면 이외의 것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겨둔 채 내면 자체로 곧바로 육박해들어가는 자세는 이른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말속에 전제되어 있던, 이념이나 현실의 구체성과 같은 대타항 없이 이미 당연한 경향으로 자리잡은 무심한 존재성을 은연중에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 천착은 세계와의 소통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개인들은 각자 고립된 삶을 견뎌나갈 뿐이라는 의식, 그리고 그 의식 속에 고립을 보상해줄 어떤 전통이나 공동체적 위안에 대한 향수를 더이상 남겨놓지 않은 90년대 중·후반의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모가 사실은 자신의 생모라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식빵 굽는 시간』, 문학동네 1996, 159면)는 ‘강여진’의 태도는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141면)이라는 김영하의 발언과 닮은 데가 있다.

96년 등단 이래 3권의 작품집(『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문학과지성사 2000; 『코끼리를 찾아서』, 문학과지성사 2002)과 3권의 장편(『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민음사 1999;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1), 한권의 중편(『움직임』, 작가정신 1998), 그리고 최근의 산문집(『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마음산책 2003)에 이르기까지 조경란은 시종일관 소통불능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유폐된 인물들을 그려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작가는 개인의 내면과 타인과의 소통, 세계와의 불화와 화해에 관한 일관된 보고서를, 다양한 변주와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타인과의 격리와 소통의 문제, 그 속에서 개인의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하는 문제 들은 90년대 소설을 이끌어온 중요한 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이제 일정정도의 귀착점에 도달해 있는 듯도 하다. 작가 이력 전부에 이 주제에 관한 풍부한 서사를 담아온 조경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내면서사의 한 흐름을 일별해볼 수 있다. 그러자면 우선 조경란의 소설이 제시하는 개인 내면의 느리고도 우회적인 행보를 인내심을 갖고 뒤쫓아볼 필요가 있다.

 

 

2. 변하지 않는 일상의 늪, 자폐적 내면

 

「환절기」(『불란서 안경원』)는 주변과 관계맺지 않고 홀로 고립되고 그 고립된 상태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 개인의 상황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새로 집을 지어 팔기 위해 땅만 보고 산 집에서 ‘나’는 이년째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동생과 함께 겨울을 나야 한다. 봄이 오면 집을 헐고 다시 지을 테니 겨울 동안만 잘 지내보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방의 공사현장으로 떠나버렸다. 한방을 쓴다면 미쳐버리거나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동생과 함께 겨울나기.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며 동생과 나는 이마가 터지고 피가 흐르는 불면의 밤들을 보낼 수밖에 없다. 동생을 이토록 증오하게 된 이유 같은 것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명백한 것은 이미 나는 동생과 돌이킬 수 없을 만치 심각한 불화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과 부적응, 고독 역시도 이유없는, 처음부터 이미 주어진 것일 뿐이다. 버스 안에서 만난 미친 여자, 악취로 주위가 모두 코를 틀어막고 있지만 아랑곳 않고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넣고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을 통해 “전생의 내 것이었을 듯한, 과학적이며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불가해한 느낌에 휩싸였던”(같은 책 281면) 것은 주변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그 미친 여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의 상식이나 논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신의 세계 속에만 칩거하는 자폐적 개인인 그 미친 여자야말로 바로 동생과조차도 한방에서 지낼 수 없는 ‘나’의 또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립과 자폐, 불화는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은 극복하거나 싸워나갈 것이 아니라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봄이 오면’이라고 말했던 엄마의 약속은 의미없는 기약에 불과하다. 통로가 막혀버린 자폐의 공간, 그 끔찍한 폐쇄성은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관계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이미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해서 ‘나’는 더욱 잔인하고 단호해진다.‘나’는 이국의 고향으로 보내는 친구의 편지를 분쇄기에 넣어 뭉개버리고 미친 여자가 키우는 화분에 펄펄 끓는 물을 쏟아붓는다. 겨울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꽃을 피우고 소식을 전하는 봄이란, 그 앞에서 더욱 단단히 자신을 무장해야만 견딜 수 있는 가혹한 장벽이다.

원인과 근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경란 소설이 집요하게 견지하는 내면성은 어떤 원리나 방법이라기보다 일종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경란이 고수하는 내면성은 ‘무엇을 위한’이나 ‘무엇에 의한’ 내면성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삶 그 자체이다. 원인을 탐구하지도 방향을 정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삶을 견디는 태도는, 삶이란 언제나 느닷없는 불행의 연속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식 속에서 배태된 자기방어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경란 소설 속에서 소통 불가능하고 관계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식과 자기방어적 내면의 고수는 정교하게 밀착해 있어서 새로운 출구를 위한 틈입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경란 식의 ‘원래 처음부터 존재했고 이미 고정된 내면’이 지나는 행로, 그리고 그것의 느리고도 지루한 방향성을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