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육사의 유언, 「광야」

‘죽어서도 쉬지 않으리’

 

 

도진순 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 저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주해 백범일지』 등이 있음. dodemy@hanmail.net

 

 

머리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1)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곧을 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光陰

부지런한 季節여선 지고

물이 비로소 길을 연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曠野에서 목노아 부르게하리라

 

이것은 19451217일자 『자유신문』에 처음 소개된 「광야」의 전문(이하 인용시 현대 어법에 맞추어 일부 수정)이다. 박훈산(朴薰山)에 의하면 「광야」는 이육사(李陸史)1943년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북경[베이징]으로 압송 도중 찻간에서 구상되었다”고 한다.2) 육사는 1944116일 베이징 동창후통(東廠胡同) 1호에 위치한 일제의 유치장에서 순국하였고,3) 당일 유치장 지하실에서 시신을 확인한 이병희(李秉熙)는 그때 “마분지 조각에다가 쓴” “시집”을 수습하였다고 한다.4) 박훈산과 이병희의 증언을 연결하면 「광야」는 이 옥중의 마분지 시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육사가 일제의 베이징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 이것이 「광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광야」는 육사의 대표작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비범한 기상과 빼어난 비유 등 육사 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런 만큼 이 시에 대한 연구 또한 상당히 많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예컨대 13행의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두고 ‘닭이 울었다/울지 않았다’는 논쟁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5) 무엇보다 마지막 연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이처럼 「광야」는 여전히 제대로 독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은 텍스트에 배어 있는 역사적인 요소를 충분히 감안하여 문제의 핵심적인 시구를 재해석함으로써 「광야」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육사는 1941년 늦여름 자신의 폐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스스로 그 이전을 극채화(極彩畵) 시기, 이후를 수묵화(水墨畵) 시기로 구분하였다.6) 극채화 시기 그의 시는 「청포도」(1939.8)처럼 낭만적이고 「절정」(1940.1)처럼 힘찼다. 반면 수묵화 시기 그의 시 발표는 격감하였고, 시세계는 매우 사색적으로 변하였으며, 특히 시간과의 전쟁, 즉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의 문제를 주요한 화두로 다루었다.

「광야」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사의 수묵화 시기의 ‘두가지 전선(戰線)’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하나는 극채화 시기부터 계속된 일제와의 전선인데, 이것은 일제의 검열에 대한 육사의 은유와 상징으로 나타난다. 신석초(申石艸)는 일찍이 육사가 “즐겨 은유의 상징을 사용한 것은 당시의 가혹한 관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이고, 실은 그의 작품들의 밑바닥에는 예리한 현실감각과 강한 의지가 숨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7) 삼엄한 베이징의 일제 감옥에서 항일시를 쓴다는 것은 최고의 검열과 최고의 은유가 대결하는 극한상황이었다. 또 하나의 전선은 수묵화 시기에 비로소 현저하게 나타나는 죽음과의 투쟁으로, 그의 시에는 영원을 갈망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깔려 있었다.

 

 

1. 「광야」의 공간

 

광야(曠野): wilderness, desert

시의 제목이 된 ‘광야’를 두고 만주 또는 요동 지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디에서 이런 해석이 유래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육사의 대륙적 풍모와 독립운동 경력을 상정해서, 또는 ‘曠野’라는 단어를 ‘廣野’로 혼동하여8) ‘넓은 벌판’을 연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문학에서는 일찍이 김현승(金顯承)이 “육사는 중국의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가없는 저 만주 벌판이라도 바라보면서 이 광야를 착상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 바 있고, 김윤식(金允植)은 「광야」를 요동의 넓은 벌판에 가서 크게 우는 연암(燕巖)의 ‘호곡장(好哭場)’에 비교하였으며, 정우택(鄭雨澤)은 육사의 “북방의식은 「광야」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고 규정한 바 있다.9)

광야를 만주로 비정(比定)한 것은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장세윤(張世胤)은 심송화의 「백마 타고 사라진 허형식 할아버지」를 주요 근거로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육사의 당숙으로 북만주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허형식(許享植)이라 특정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박도(朴鍍)는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했다.10)

하지만 ‘광야’라는 제목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廣野가 아니라, ‘황무지’ ‘거친 들판’이라는 뜻의 曠野이다. 「광야」 2연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 ‘차마’라는 부사는 넓은 곳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넓은 곳이라면 산맥이 ‘아예’ 범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광야’는 육사가 ‘윷판대’라는 곳에 올라서 본 고향 원촌(遠村)의 ‘앞들 벌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11) 원촌 앞들은 그리 넓은 벌판이 아니다. 퇴계종택이나 육사생가가 있는 이 일대는 그야말로 산맥들이 ‘차마’ 범하지 못한 사이로 강이 굽이쳐 흐르고, 그 강가의 자그마한 벌판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광야(曠野)는 영어로는 wilderness 혹은 desert이며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육사의 딸인 이옥비(李沃非)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육사의 유품 중에 중국어 성경책과 찬송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질투의 반군성」(1937.3)에 “창세기의 첫날밤”, 「아편」(1938.11)에 “번제(燔祭)”와 “노아의 홍수” 등, 그의 시나 수필에 성경과 관련된 구절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안동 원촌의 육사생가에서 두집 건너 이웃이 이원영(李源永) 목사(1886~1958) 댁인데, 그는 육사의 팔촌형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다섯번이나 투옥된 적이 있는 저명한 항일목사이다. 요컨대 육사는 성경의 구절들을 숙지하고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사실 시제(詩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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