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응시’의 미학, 숨은 그림을 찾아

하성란론

 

 

최강민 崔康民

문학평론가. 중앙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억압된 금기적 욕망과 쌍생아적 상상력–––신경숙론」 등이 있음. c4134@chollian.net

 

 

1. 반전도형인 ‘루빈의 술잔’과 경계선의 시선

 

하성란(河成蘭)의 소설은 수다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적막할 정도의 침묵과 여백으로 가득하다. 무표정한 목소리로 현대의 일상을 촘촘히 해부하는 그녀의 언어는 푸른 정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미세하다. 조각난 퍼즐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작가의 촘촘한 시선은 하성란표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하성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형사 콜롬보’가 떠오른다. 늘 후줄근한 바바리코트에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한 콜롬보. 그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에서 놀라운 추리력으로 사건을 반전시킨다. 하성란도 조커란 비장의 카드로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1996년 「풀」로 등단한 하성란은 창작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 1997)과 『옆집 여자』(창작과비평사 1999)로 21세기를 선도할 작가로 주목받아왔다. 윤대녕(尹大寧)이 시원성으로 회귀하는 개인적 내밀함을, 공선옥(孔善玉)이 망각되어가는 역사적 상처와 사회적 모순을 되새김질했다면 하성란은 양자를 동시에 호출한다. 그녀는 미시적 일상을 재구성하여 거시적 차원을 함께 아우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그녀가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작가와 어떤 차별성을 지닌 채 소설적 형상화에 접근했던 것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반전도형인 ‘루빈의 술잔’은 하성란의 소설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루빈의 술잔’은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더 색다르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욕망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그녀의 서사전략은 변죽을 쳐 복판이 울도록 하는 시적 ‘낯설게 하기’와 연결된다. 작가가 보기에 “깡통 따개는 중심에서 가장 먼 거리인 통조림의 가장자리를 돌지만 그것은 결국 깡통 뚜껑을 열기 위한 최선의 방법”(「루빈의 술잔」, 『루빈의 술잔』 19면)이다.

소설의 전통적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퓨전적 상상력 속에 독자의 타성화된 인식회로는 일순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일상의 현상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익숙한 것들은 낯설어지고, 낯선 것들이 익숙해지는 전복 속에 시선의 탈주가 시작된다. 독자들이 하성란의 소설에서 자주 영화적 체취를 느끼는 것도 바로 이 시선을 중심으로 서사가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성란의 소설은 ‘응시’에서 발원되어 ‘응시’로 종료되고 있는 것이다. 응시는 단순하게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세계관이자 욕망의 표현이다.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도 “시선은 기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미한다”(김인식 『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3, 110면에서 재인용)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응시의 미학을 선보이는 하성란은 대상을 바라볼 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응시의 주체’와 ‘응시의 타자’ 사이에 생성된 틈새는 상호 합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소외성을 말하는 것이자 하성란의 독특한 미학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이 틈새에 ‘루빈의 술잔’을 결합하여 대상을 낯설게 만드는 데에 적극 활용한다. 이때 작가는 일상과 비일상의, 의식과 무의식의, 실험성과 전통성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자리한다. 이 중립적 지점에서 하성란은 후기자본주의의 발호 속에 철저히 감추어진 일상의 진실을 힘겹게 찾아나선다. 따라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싶은 독자는 형사 콜롬보가 되어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 그녀는 작품 곳곳에 실마리를 놓아두고 있다.

 

 

2. 시선의 해체와 전복적 상상력

 

하성란은 3인칭 시점과 느린 호흡의 문장을 활용하여 일상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한다. 높은 곳이나 먼 곳에서 응시하는 듯한 롱숏의 장면에서 작중인물은 무미건조한 배경에 묻혀 침묵한다. 일거수 일투족을 응시하는 클로즈업의 시선에서도 작중인물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성란은 작중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선을 배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계몽적 거대담론의 몰락과 주체성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작가는 카메라, 백미러, 거울, 유리, 고층 광고탑 등의 소도구를 등장시켜 시각적 이미지에 포위당한 현대인의 왜소한 모습을 차갑게 조망한다.

18세기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일망감시체계인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모델을 제시한 적이 있다. 미셸 푸꼬(Michel Foucault)는 벤담의 모델을 이용하여 근대의 문명을 감시와 억압의 체계로 설명한다. 하성란의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바로 이 파놉티콘의 시선에 갇혀 있다. 우월한 위치에서 열등한 존재를 내려다보는 일방향성의 시선에 의해 그녀의 작중인물은 행동반경이 제한된다. 어둠속에 감춰진 비대칭적 감시의 시선은 빛에 환히 노출된 일상인을 옥죄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여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불평등성은 곧 권력의 차이와 억압의 발생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지배질서에서 일탈하려는 반오이디푸스의 탈주는 거세 위협 속에 일상에 순응하도록 채찍질당한다. 하성란의 작중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규율적 시선이 요구하는 질서를 내면화하여 재생산하도록 훈육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파놉티콘의 시선을 결코 벗어난 것이 아니다.

두 남녀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단편 「꿈의 극장」은 작가가 가진 시선의 성격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작중인물들은 자신의 주체적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 피팅모델인 여자는 날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현대문명에 맞추어 자신의 몸무게를 조절한다. 그녀의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은 적정 몸무게의 초과가 아니라 오히려 미달로 나타나 결국 회사에서 해고된다. 자유기고가인 남자는 잡지사의 청탁으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면용 안대를 끼고 장님 생활을 한다. 장님 체험의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극장’이다. 이러한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곳은 일종의 검문소인 매표소이다. 극장의 매표소에서 손님들은 여종업원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여종업원은 손님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한 시선의 교차는 감시와 억압이라는 근대적 시공간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매표소를 지나쳐 그냥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입술’로 명명된 여종업원이 어김없이 경고의 메씨지를 보내는 데에서 시선의 강제성과 권력을 확인할 수 있다.

 

유리창으로 된 매표소 위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어 있어 여종업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요금 3,000원이라고 쓰인 글자들 사이, 금과 3 사이의 조그만 틈으로 과자나 껌을 질겅거리는 입술이 얼핏얼핏 비친다. 붉은 립스틱을 입술선 밖으로 과장되게 내어 그린 그 입술은 숫자 0자 중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맨 처음 극장에 온 날 남자는 그 여종업원에게 ‘입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입술은 매표구 밖은 물론 매점 가판대까지도 쉴새없이 눈을 굴리며 관찰한다. 매표구를 지나쳐 그냥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말 대신 매표구 밖으로 반쯤 내놓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내리친다.

(「꿈의 극장」, 『루빈의 술잔』 125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스펙터클한 환영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실재 사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놀라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영화가 실재 사물을 모사했을 뿐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는 실재와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