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점검 | 의료대란과 의료개혁

 

의료다원주의 관점에서 본 의료개혁

 

 

박형욱 朴亨旭

예방의학 전문의.

 

 

1. 윤리적 인간론과 윤리적 제도론

 

의료계의 2차파업과 관련하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와 한국가톨릭병원협회는 각각 성명서를 발표했다. 두 단체는 의료계의 파업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쪽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다른 쪽은 ‘가톨릭윤리’의 이름으로. 그러나 두 개의 성명서가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다르다. 일반 시민이 인의협의 성명서를 읽으면 의사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겠지만, 한국가톨릭병원협회의 성명서를 읽으면 비윤리적 의료현실을 만들고 또 이를 방치해온 정부의 정책에 대한 성직자들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의료는 분명히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한 지점이다. 그러나 윤리적 의료가 ‘법적 강제’와 ‘윤리적 강요’로 이룩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사건에 대하여 근본적인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지기보다는 항상 윤리적 비난과 처방이 압도하는 뿌리깊은 병폐를 갖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윤리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윤리주의는 언뜻 손쉬운 해결을 가져오지만 문제의 본질을 덮어 결국 사회적 불합리를 재연하거나 또다른 불합리를 야기한다. 만일 언론과 시민단체가 의료사태에 대해 윤리적 인간론이 아니라 윤리적 제도론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또 이를 시민에게 전달했다면 윤리적 의료를 만들어나가는 데 커다란 힘이 되는 시민사회의 진지한 토론을 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의약분업과 의료(보험)체계

 

의약분업으로 드러난 파행적 의료현실의 뿌리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체계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의약분업과 의료사태에 대한 판단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체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의료체계를 이해하는 데 시장기능의 허용정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뢰머(Milton I. Roemer)는 이러한 요소를 감안해 전세계의 의료체계를 기업가형, 복지지향형, 포괄적 의료써비스형, 사회주의형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의료부문을 완전히 시장에 방임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1도 있으나 이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발독재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비합리적 정책을 법의 이름으로 강요한 법의 도구화경향이 의료부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행정법(제)을 관통하는 가장 큰 특성인 법의 도구화경향은 사실상 우리나라의 의료공급체계를 좌우하는 의료보험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김창엽(金昌燁)이 의료대란의 해법과 관련해 우리나라의 의료씨스템을 기형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의료체계가 단순한 시장형이 아님을 암시해준다.2

김창엽은 미국은 ‘시장적’ 의료씨스템, 영국은 ‘공영’ 의료씨스템, 프랑스·독일 등은 ‘중간형’ 의료씨스템인데, 우리의 의료씨스템도 외형적으로는 ‘중간형’이지만, 실제 내용은 매우 기형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같은 중간형인 일본만 해도 의료체계의 근간은 공공의료기관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민간의료기관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외형적으로는 ‘중간형’을 선택함으로써 대단히 기형적인 의료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료씨스템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최소한으로 머물러 있어, 의료기관의 사적 성격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시장형을 택할 것인지, 공영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명실상부한 중간형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의료공급자·정부 3자가 이익과 손해를 주고받는 ‘빅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석은 ‘윤리주의’에서 벗어나 객관적·과학적인 시각으로 의료사태를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지향하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물론 김창엽의 분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은 예방의학자(보건관리학자)3들의 전통적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의약분업 등 의료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의료개혁세력’4은 대체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의료체계의 왜곡과정에서 정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우리나라의 민간의료기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를 균형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분석이 현재의 불균형적이고 현실성 없는 의료개혁의 근거가 되며, 이 과정에서 의료인들에게 과도한 제도적·윤리적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른바 ‘의료개혁세력’이 현 의료체계

  1. 김동춘 「의사의 ‘권리’와 의료의 공공성」, 『작가』 2000년 가을호, 156〜57면
  2. 김창엽 「기형적 의료체제가 ‘파국’ 불렀다」, 『주간조선』 2000.8.24. 김창엽은 1999년 7월 13일 경실련 주최 ‘시민의 참여를 통한 21세기 의료개혁방안에 대한 씸포지엄’의 주제발표 「적정의료를 위한 의료정책과 행정개혁의 방향과 과제」에서도 이와 같은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은 짧지만 핵심적인 사항을 담고 있으므로 필자는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3. 의학은 일반적으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으로 구분된다. 예방의학은 기초의학의 한 분야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인간의 건강과 질병을 연구하는 분야이며, 그중 한 분야인 보건관리학은 의료보험과 같은 의료정책과 보건사업 등을 대상으로 한다.
  4. 김창엽의 견해는 현 의약분업을 주도한 김용익(金容益)의 ‘의료개혁 빅딜론’과 거의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