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이름없는 우리들의 행진

심훈 일가족 이산가족 상봉기

 

 

심재호 沈在昊

1936년 충남 당진 출생. 작가 심훈(沈熏)의 셋째아들. 동아일보사 신동아부 기자를 거쳐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 1984년 미주동포신문인 『일간뉴욕』 창간. 1989년 조국평화협회 발족, 회장 역임. jaihoshim@hanmail.net

 

 

한 방의 총소리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는 청와대에서 가까운 북악산 아래 자리잡은 경기도상업중학교였다. 학교 이름을 줄여서 ‘도상’이라 했는데 지금의 청운중학교다. 고향에 있는 송악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문을 연 서산중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온 것이었다. 전학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6월 26일인가 27일, 전교생들이 학교마당에 모였다. 어디에선가 총소리가 났고 매캐한 화약냄새가 북악산 기슭을 타고 교정으로 스며들었다. 이날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나는 삼청동 집으로 돌아왔다. 밤중에 쾅쾅 덜컹덜컹 쇳소리가 들렸는데, 서울로 쳐들어오는 북쪽 군대의 탱크 소리라고 했다. 서울역에 불이 났다고 해서 뛰어나가 삼청동 언덕 위에서 불구경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삼청동에서 도렴동교회 목사관으로 짐을 옮겼다. 당시 감리교 총무였던 삼촌(심명섭 목사)이 맡은 교회였다. 최근 지나가면서 보니 그 자리에 굉장히 큰 교회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그 근처에는 개장국집이 즐비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쪽 군대가 밤중에 개를 짖지 못하게 해서 동네 개들이 개장국 신세가 됐다고 들었다. 나도 그때 처음 개장국을 맛보았다.

얼마 뒤 우리 형제들은 피난길에 나섰는데 삼촌 내외분은 서울에 그대로 남았다. 서울공과대학에 다니던 사촌형님과 휘문고에 다니던 큰형님, 나와 같이 ‘도상’에 다니던 둘째형님 그리고 나였다. 우리는 당진에 큰집이 있었으니까 오갈데없이 전쟁에 쫓기는 비참한 피난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 때만 되면 내려가곤 했던 시골 큰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사촌 큰형님이 살림을 맡고 있었다.

전 같으면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거나, 버스로 경기도 안중을 지나 만호리까지 가서 똑딱선으로 아산만을 건너 한진나루로 가는 즐거운 귀향길이었을 것이다. 한진나루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가 우리 고향이었다. 서울에서 하룻길인데 배편 사정에 따라 도중에 하룻밤을 자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짐보따리를 껴안고 뱃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인데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송악으로 빠지면 된다. 서해대교를 받치고 있는 섬은 내가 어려서 고기를 잡던 곳이다. 행담도인데 까치네섬 혹은 뱀이 많아서 뱀섬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유원지로 둔갑하고 말았는데, 아버지(심훈)의 수필 「칠월의 바다」에 나오기도 한다.

피난길은 즐겁지 않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배를 탔는데 미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흰 보자기를 우리 머리 위에 씌웠다. 강을 건너서도 전투기를 피해 되도록 나무 밑을 골라서 걸었다. 길목마다 팔뚝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 검문을 했다. 어린 중학생이던 나는 형들 뒤만 졸랑졸랑 따라가면서도 먹을 것만 살피는 덩치 크고 미련한 형들이 잡혀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길은 멀고 날씨는 또 왜 그렇게 찌는지, 가도 가도 쳇바퀴 도는 것만 같았다.“발안까지 얼마나 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턱으로 가리키며 “한 십리쯤”이라고 대답한다. 십리 넘게 걸어가서 또 물으면 이번에는 이십리로 늘어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귀신발안”이라고 했다. 뛰기라도 할라치면 뒤따라오는 사람이 “뛰면 앞에 떨어지는 폭탄에 맞아죽는다!”면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틀을 걸어서 아산만에 면한 경기도 조암의 나루터에 닿았다. 지금은 조암나루터 바로 건너편에 그 유명한 ‘한보철강’이 들어서 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이 배를 찾았지만 가난한 어촌에다가 전쟁까지 치르고 있으니 나루터에는 변변한 배 한척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악독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각다귀(모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피를 빤다. 아무리 때리고 뭉개도 어둠속 어디서 기습을 하는지 견딜 재간이 없었다. 어른들이 용케 배를 구해와서 우리는 쫓기듯 배에 올랐다.

고향은 평온했다. 과수원을 둘러싼 밤나무동산도 여전했고, 겨울에 썰매 타던 들판 너머의 아산만 조수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종잡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동네를 감쌌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집을 떠나온 피난민들이 동네로 파고들어 갈수록 새 얼굴들이 늘어났다. 충청도 사투리 속에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가 섞여들었다. 별안간 나타난 쌕쌕이(미군전투기)가 고향하늘을 설치고 다녔다. 전쟁이 한창이라는데 전선이 어디쯤인지도 알지 못했고 고향이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기도 전화도 신문도 없이 고요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느날 아침, 남산 쪽에서 총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그러고는 매캐한 화약냄새가 밤나무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서울 교정에 번지던 그 냄새였다. 평온하고 아름답던 고향은 이 한 방의 총소리로 모든 것이 뒤집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갈가리 흩어졌고 새도 울지 않았다.

 

 

전쟁터로 나가는 형제들

 

아산만을 건너온 인민군이 큰집 사랑방에 진을 쳤다. 군인을 처음 본 나는 그들이 신기했다. 좀 떨어져서 쭈뼛쭈뼛 주위를 빙빙 돌면서 구경하다가 말을 걸어 총을 만져봐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북쪽 군대 일진이 동네를 지나간 뒤 사촌형과 큰형이 동네 청년들과 함께 의용군에 동원된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자손이 귀해 친형제나 사촌의 구분이 없이 한집에서 어울렸고, 서울 집에서도 한방에서 뒹굴며 지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가 그렇게 다그쳤어도 우리 집안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견뎌냈고 아무도 일본군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고향땅에서 형제들이 전쟁터로 간다는 것이다.

의용군으로 동원된 동네 청년들의 이마에는 머리띠가 둘러졌다. 그들은 모여 무슨 소리를 지르며 내가 맨발로 학교에 다니던 언덕길을 넘어갔다. 멀리 떠나가는 형들을 바라보던 어린 내 가슴에는 소화되지 않는 이상한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손자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할머니는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씀도 없었다. 이기거나 져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사실을 할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형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미국 군함이 인천 앞바다에 진을 쳤다. 고향 언덕에 올라가 밤새 함포 사격하는 군함들을 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남쪽 군대와 경찰이 몰려왔다. 물러나고 몰려오는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희생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중에는 동네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주인 없는 시체들을 아무렇게나 파묻은 구덩이가 길가 여기저기에 있었고 원혼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우리는 한자리에 있었지만 전선은 오르락내리락했다. 소련 탱크가 밀려들어올 때는 인공기가 올랐고 미군 장갑차가 들이닥치면 태극기가 나부꼈다.

얼마 전 그때의 공동묘지 터에 집들이 들어선 것을 보고 나는 눈을 돌렸다. 원혼들이 지금은 잠이 들었을까, 그때의 억울함을 다 잊었을까. 고향땅을 다시 밟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어쩔 수가 없었다.

9월 28일, 미군이 서울을 되찾았다는데 서울의 삼촌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를 두셨는데 큰아버지는 해방 후 6·25전쟁 전에 세상을 떠났고 셋째인 아버지는 해방 훨씬 전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할머니는 생전에 이미 두 아들을 궂겼으니 아들 하나만 남은 셈이었다. 일찍이 남편을 사별한 고모는 옆집에 살았다.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목사인 삼촌이 서울에서 철수하던 인민군에게 강제 연행돼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는 것이다. 납북인사가 된 것이다. 내가 한때 다니기도 했던 서산중학교에서 국어선생을 하던 사촌형도 휩쓸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촌형과 헤어진 사촌형수가 서산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당진의 시집으로 타달타달 걸어서 돌아왔다. 서울에서 삼촌과 생이별을 한 숙모도 시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전쟁통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고모, 이미 남편을 잃은 큰어머니, 남편과 생이별한 숙모 등 집안은 온통 과부로 붐볐다.

집안어른들은 할머니 속이기 작전에 들어갔다. 둘째아들이 급한 일로 일본에 갔는데 곧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둘째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편지를 하는데 몇달이 지나도록 왜 소식이 없느냐?”는 것이 할머니의 반응이었고 의심이었다. 손자들 셋을 전쟁터로 보내고 남은 아들 하나마저 잃어버린 할머니는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졌고 팔십이 넘었지만 정정하게 집안을 지휘했다. 제사 때면 가난한 동네 부인에게 음식을 듬뿍 싸주라 했다. 남쪽 군대나 북쪽 군대, 패잔병이나 진주군 모두 할머니한테는 똑같은 젊은이로 비쳤다. 그들이 들르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집 나간 아이들을 생각해 잘 먹여서 보내라”고 하면서 보살펴주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흩어진 식구들의 소식은 계속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구러 해가 지나갔다. 할머니 속이기 작전은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졌으며 할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아들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말 많은 동네 부인들이 가끔 들러서 “아드님이 실은 실종됐다는데요”라고 소곤소곤 고자질해도 할머니는 아예 못 들은 척했다. 그렇게 한해가 갔다.

1987년 내가 형제들을 만나러 평양에 가서 서울 삼촌의 소식을 물었을 때 북의 형들도 알 길이 없다고 했다. 형들도 둘째숙부가 납치됐는지 잘 몰랐던 것으로 보였다. 나를 안내하던 북쪽 인사는 심명섭 목사의 행방을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6·25전쟁 당시는 정국이 하도 소란스럽던 때라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이 왔다. 할머니가 숙모들과 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네 둘째숙부가 없어진 줄을 벌써부터 알고 있다. 더 속일 생각은 말아라. 속상해할 것도 없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고개만 떨구었다. 사태를 일찍부터 꿰뚫어본 할머니가 오히려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안방에 붙어 있는 골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에 놓인 관뚜껑을 열라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환갑을 맞으면 누구나 관을 짜고 그 안에 수의 등을 미리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관 속에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했는데, 그 관을 감히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방바닥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재호네 삼형제는 애비 없이 자라는 애들이다. 이건 전쟁에 나간 큰애 재건이 몫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재광이, 재호 학비로 보태 써라. 다른 아이들은 애비 에미가 있으니 알아서들 해라.”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큰형 몫은 금비녀였고 우리들 몫 역시 금붙이였다. 그러고는 당장 나를 학교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전쟁 탓으로 고향에서 2년 동안 빈둥빈둥 밭이나 매면서 놀던 나는 2년 묵은 재수생으로 예산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할머니의 유언

 

내가 예산중학교에 다닐 때도 전쟁은 계속되었는데 하루는 입대하는 선생님들을 환송하는 조회가 있었다. 그 선생님 중엔 시인인 성찬경 선생도 있었다. 당시 내 눈에는 얼마 전 의용군으로 동원되어 고향 언덕을 넘던 형들의 모습이 비쳤다. 같은 나라의 다른 군대가 아닌가.

예산중학교에는 사촌 큰형님의 아들인 큰조카(천보)와 가난고지라는 이웃동네에서 사는 작은할아버지의 장손자인 육촌동생(재우)이 같이 다녔다. 나이 많은 내가 반장이었다. 우리들 셋은 초가집 건넌방 한칸을 얻어서 자취를 했는데,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 안병태군도 한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즈음 고향 큰집은 경제적으로 거의 거덜난 상태였다. 아는 친척, 친척의 친척, 잘 모르는 친척의 친척 등 열세 세대가 우리집에 피난와 등대고 있었던 것이다. 열세 세대 식솔이 먹어대니 남아날 것이 있겠는가. 가을이면 밤을 따먹거나 과수원의 벌레먹은 과일을 골라먹었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마솥의 쇠죽 같은 호박죽 풀떼기를 퍼먹기 일쑤였다. 갯벌에 나가 나문쟁이라는 해초를 따다가 삶아먹기도 했다. 나문쟁이만 먹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동네 부인들도 눈에 띄었다. 수제비는 최상품 식사였다. 지금은 서울의 호텔에서 귀한 음식으로 나오는 호박죽과 수제비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피난시절에 물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자취를 하는 우리들이 가져가는 식량은 쌀 한톨 없는 통보리였다. 할머니가 희한한 반찬을 해주었는데, 굵은소금에 고춧가루를 섞어서 만든 소금볶음이었다. 꽁보리밥에 이 소금볶음을 슬슬 뿌리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알루미늄 양재기가 소금기에 구멍이 뻥뻥 날 정도였다.

예산중학교에서 우리 셋은 모두 우등을 차지해서 학비를 면제받게 되었다. 자랑삼아 보고했더니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