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제23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김유나 金裕娜
1992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kgn0212@naver.com
이름 없는 마음
예정대로라면 현권과의 일정은 하루로 끝나야 했다. 오전에 Y시에서 짐을 꾸려 올라온 현권을 터미널에서 픽업해 K시로 넘어간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부동산에 가서 미리 봐뒀던 매물들을 확인한 다음 괜찮은 방 하나를 계약하고 당일 입주를 위한 준비를 한다. 셋이서 집을 한바탕 청소하고, 현권이 가져온 박스들을 풀어 물건을 정리하고, 현권이 자잘한 소품들을 세팅할 동안 나와 남편은 마트로 가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과 식자재를 사서 넣어주면 할 일은 끝. 누운 채로 계획을 말했을 때 남편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래”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대단한 의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 나름 최대한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 머리를 굴려 정리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서운해졌다.
“혹시 귀찮아?”
남편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쳤다.
“아니…… 애초에 내 의견이 중요한가 싶어서.”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일방적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하고 남편은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라 이거지?”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네 마음대로 해야 내 마음도 편한 거라고,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했던 거고 좋은 계획이니만큼 그냥 따르겠다는 뜻이지 불만을 품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갖기로 했다. 일반적인 부부들이 하는 노력으로는 임신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오래전이었다. 두 사람 몫의 가벼운 삶. ‘탓’이니 ‘책임’이니 하는 것 없이 먹고 마시고 싸우고, 마음만 먹으면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돌아올 수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삶에 우리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 몇년간 ‘니들은 조심해— 우린 안전해, 우린 안전해’라는 노랫말에 ‘난임송’이라는 제목을 붙여 부르며 슬픔에 농담으로 저항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차츰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해졌다. 병원에서 배란유도주사 맞는 법을 배우던 날, 이제 방학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남편에게 마음의 짐을 하나 덜고 싶다고 말했다.
세살 터울의 남동생 현권은 Y시에 있는 취업전문학교에 등록하고 한 학기를 겨우겨우 다니다가 때려치운 뒤 연고도 없는 그곳에 눌러살며 몇년째 일을 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어느날엔 프랜차이즈 뷔페였다가, 또 조금 지나면 라이더 일을 한다고 했고, 최근엔 핸드폰 안테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뭘 하건 현권은 내게 종종 돈을 빌렸다. 월세를 못 내서, 병원을 가야 해서, 내일이 월급인데 교통비가 떨어져서 같은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나는 그때마다 추궁하지 않고 돈을 보내주었고, 현권의 이름으로 주택청약 통장을 하나 만들어 단돈 5만원이라도 매달 넣어두었다. 그렇게라도 내가 녀석을 챙기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결혼한 뒤로 자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현권을 타지에 버려둔 것 같다는 불편함을 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 자신과의 타협점이라고 찾은 것이 현권을 20분 거리의 K시로 데리고 와 전셋집을 얻어주는 것이었다. 내일 터미널에서 현권을 만나 K시의 투룸으로 토스한다. 이곳으로 온 현권을 저곳으로 보내는 사이, 남편과는 되도록 오랜 시간 함께하게 두지 않는다. 그리고 준희씨와 헤어졌는지 주시한다. 그것이 내일 하루 나의 계획이었다.
*
토요일 낮, 출구가 하나뿐인 버스터미널 앞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인파 속에서 내가 현권을 찾은 건 금방이었다. 현권은 자신이 자신임을 과시하려는 듯 쨍하디쨍한 빨간색 패딩 점퍼를 입고 터미널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머리칼은 와인색으로 물들인 데다 하얀색 면바지를 입어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야간 근무를 했다는 현권은 까칠한 얼굴을 한 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곤 차창을 내린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 담배를 지져 껐다. 현권은 내게 손을 흔들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옷에 뿌리기 시작했다. 향수인가? 쟤가 향수를 뿌릴 줄도 아는 인간이었나? 남편이 현권의 짐을 실으라며 트렁크 문을 열어주었고, 차에서 내린 나는 현권에게로 걸어갔다. 막 열린 공항 게이트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사람이 마중 나온 이에게 하는 그것처럼, 현권은 팔을 넓게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향나무 냄새 비슷한 것이 섞여 났다. 나도 현권의 등을 토닥였다. 키도 껑충하니 큰 녀석이 뼈밖에 남지 않아 꼭 점퍼로 둘러놓은 들판의 허수아비 같았다. 언제 봐도 짠한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이 차에서 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물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도구를 챙길 때까지만 해도 귀찮아서 괜한 일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소매에 때가 낀 옷을 입고 있는 현권을 보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말랐느냐고 하자 현권은 내 얼굴을 뜯어보며 으레 감정도 고저도 없는 톤으로 말했다.
“누나는 살이 많이 쪘다. 코가 볼에 파묻혔네.”
현권이 저런 식으로 하는 말은 절대로 기분이 나쁘라고 하는 말이나 장난이 아니라 그냥 보고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거였다.
“너, 짐은?”
“내가 들 수 있어.”
현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쭉한 쇼핑 봉투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집에서 짐 뺀 거 아냐?”
“맞아.”
“이게 다는 아닐 거 아냐.”
“단데?”
“여름옷이랑 겨울 외투랑 여기 다 들어 있다고? 냄비, 전자레인지, 뭐 그런 것도 없어?”
말이 빨라지자 나를 흘긋 쳐다본 현권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을 인지하고 표정을 온화하게 한 다음 천천히 다시 물었다.
“어쨌든 이게 다라는 거지?”
“아, 어. 미안 미안.”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잦아지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건 당혹스러울 때 심해지는 현권의 습관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거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현권을 자주 벌세웠다. 현권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구레나룻을 만졌다.
“아니야. 옷은 새로 사면 되지.”
일단은 그렇게 말하고 현권의 쇼핑백을 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신 당부를 했다.
“현권아, 매형 앞에서 쓸데없는 말이나 옛날이야긴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현권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나는 불안해졌다.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나, 내가 돈 보내준 거나, 특히…… 준희씨에 대한 이야긴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