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
윤리담론 점검의 후속논의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영문과 연구교수. 역서로 『도둑맞은 세계화』 『쿠바의 헤밍웨이』 『이런 사랑』 『종속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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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린 졸고 「묻혀버린 질문-‘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에 이어지는 논의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앞에 덧붙여져야 할 내용도 담고 있다. 의도가 어떠했든 「묻혀버린 질문」은 외국이론가들을 ‘제대로 읽자’는, 다분히 협소한 주장으로 비칠 소지를 안고 있었고 이 점은 해당 글에서 다루었던 필자 중 한 사람이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1 물론, 외국이론의 생산적 수용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은 마땅히 더 고민해야 할 지점이지만, 그 지적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전적으로 외국이론들을 근거로 한 논의를 대상으로, 그런 이론들을 제대로 읽었는지 점검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쓸모없는 작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생산적 수용’이 이론과의 불일치를 부득이하게 초래한다면 이론을 비판하면서 진행할 일이지 그 이론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끌어내거나 이어붙인다면 공연한 혼란만 초래하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묻혀버린 질문」에서는 특정 이론들에 대한 독해가 적절한지 여부를 살피는 데 많은 분량이 할애되면서 애초에 그 점에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단편적으로만 제시되었고 또 검토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각된 몇몇 사안을 따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글은 애초의 문제의식을 더 상세히 풀어쓴다는 면에서는 지난 글의 ‘앞’에 해당하며 쟁점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는 면에서는 ‘뒤’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득이 ‘협소한’ 독해의 문제를 또 언급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필자의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인 서동욱(徐東煜)의 「무엇이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인가-지난호 황정아의 비판에 대한 반론」(『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이 세부적 독해를 중심으로 반박을 펼치고 있으므로 다시금 해당 대목들을 들추지 않고서는 합당하게 반응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리 밝히자면 독해 문제를 둘러싼 필자의 입장은 사실 서동욱의 반론을 읽고서도 지난 글과 달라지지 않은 편이라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지루한 반복에 그칠 위험이 있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부사항에 대한 재반론은 가급적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지난 글의 문제의식을 점검하면서 해당 이론들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밝힐 기회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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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글들을 훑어보면 어느새 비평담론의 주된 관심사가 문학(혹은 미학)과 정치의 관계라는 문제로 옮겨간 인상을 받는데, 필자의 지난 글이 ‘윤리’에 관한 비평에 관심을 둔 것도 상당부분 그런 비평들이 제시하는 윤리의 ‘정치성’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윤리’라는 주제가 과거에 빈번하게 정치에 대한 회피나 억압으로 활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의문은 당연한 반응이라 할 만하다. 지금 새로이 부각되는 강력하고도 정언적인 윤리의 환기는 정치성의 포기에 대한 더욱 은밀한 댓가 혹은 보상인가, 아니면 한층 정당하고 진정성있는 정치를 향한 요청이자 진전인가. 물론 대답은 이같이 성급한 양분법에 잘 걸리지 않는 어느 지점에 있을 공산이 크지만 질문을 던지는 일만큼은 생략할 수 없는 절차로 보인다.
그럴 때 질문 자체가 막연해지지 않으려면 비평에서 개진된 윤리담론의 구체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비평들이 실질적으로 염두에 둔 윤리의 문제는 대체로 ‘타자’라는 개념으로 수렴되며, ‘타자’는 다시 한국사회의 ‘이방인’ 혹은 ‘외국인’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니 윤리 비평의 정치성을 둘러싼 의문은 실상 그런 비평이 제안하는 윤리가 현재 ‘이방인’을 통해 우리가 대면한 정치적 문제들에 더욱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길을 보여주는가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담론들이 넓게 보아 문학비평 영역의 한 자리에서 전개된 점을 차치하더라도 여기서의 ‘정치성’은 어떻든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윤리담론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층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해도 결국 지금 여기서 우리와 세계를 공유하는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이방인’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촉구하고 자극하는가, 또 설사 ‘이해 불가능’으로 귀결되더라도 더 철저히 불가능을 절감하게 만들어주는가 하는 차원에서 담론에 함축된 ‘문학성’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인식의 차원으로 다시 환원하자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지금의 문학 텍스트들이 이론과 전에 없는 자의식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음을 상기하려는 것이다. 문학뿐 아니라 문화의 여러 다른 분야를 다루는 비평들에서 이론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점은 누구라도 실감하는 사실이다. 이는 비평이 일종의 이론 과잉상태에 빠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비평이 텍스트를 특정한 이론적 틀에 비추어보는 경향과 더불어, 이론적인 틀에 비추어볼 것을 요구하는 듯한 텍스트가 많아지는 현상 또한 엄연하다. 그리고 이 현상의 이면에는 따지고 보면 철학도 아니고 특정분야의 비평도 아닌, 그러면서도 문학이나 문화 텍스트들을 자유로이 건드리는 ‘이론’이라는 영역 자체의 애매함과 느슨함이 작용하고 있다. 이같은 추세가 얼마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이론 비평을 문학적 상상력과 결부시키고 그런 상상력을 열어주는지 묻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지난 글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면, 이론의 적절한 독해 여부보다 거기서 다룬 이론 비평들이 결론적으로 제시한 ‘절대적 타자’로서의 이방인/외국인이라는 규정과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로서의 윤리에 대한 의구심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런 주장들이 과연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절대적 타자’라는 표현은 이방인이 우리의 인식체계로 포착할 수 없고 표상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며,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자국의 문화적 기준을 들이댄 몰이해를 경고하고 비판하는 것으로서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선 다음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이방인의 미학적 위치를 ‘표상 불가능함’ 자체로 확정함으로써 다른 의미의 단순화를 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다시 주체의 인식능력과 상상력의 결핍에 대한 손쉬운 핑계로 활용될 소지가 있지 않은가. 단순화의 위험은 타자가 ‘무조건적 환대’의 윤리적 요청을 제기한다는 논의에도 적용된다. 이를테면 환대라는 관계망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거나 도무지 들어올 수 없는 타자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 아닌가.
‘정치성’과 관련된 질문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무조건적 환대’의 요구가 이방인의 정치적·경제적 열악함이라는 현실을 비판한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및 노동착취의 문제와 ‘무조건적 환대’ 사이의 간극은 너무 아득해서 정치적 무의미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적 타자’ 논의들이 “이미 미세한 ‘고급화’와 ‘교화’를 거친” 타자를 말하고 있다는 지젝의 평가2나 그것들이 “동일성의 인정”이라는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회피한다는 바디우의 비판3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다소 장황하게 서술했지만 이상의 생각들이 지난 글에 깔린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굳이 이론의 정확한 독해를 중심으로 풀어나간 이유는 주된 근거로 동원된 이론들조차 그런 ‘타자의 윤리’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글이 다룬 사안들 가운데 ‘정치성’의 문제와 특히 뚜렷이 관련된 ‘보편주의/메시아주의와 법’에 관해서는 서동욱의 반론이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문제인만큼 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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