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서사 속 죽음과 루프적 시간의 리얼리즘

 

 

인아영 印雅瑛

문학평론가. 공저서로 『문학은 위험하다』, 주요 평론으로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2020년대 시에 나타난 ‘타자’와 비인간 물질의 정치생태학」 등이 있음.

itwontdo@gmail.com

 

 

1. 게임적 리얼리즘의 환생

 

이듬해인 2023년부터 깐(Cannes) 국제영화제에서 비디오게임 부문 시상식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1 영화제에서 게임 부문을 시상하는 사례가 처음은 아니지만,2 선도적인 문화산업으로서뿐 아니라 복합적인 예술창작물로서 비디오게임의 성취는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고티’(GOTY, Game of the year)라고 불리는 게임 시상식들 중 게임의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내러티브 부문을 개설한 경우는 이미 적지 않다. 그러나 주류 서사양식이 된 영화 장르에서 열리는 이 제1회 깐 게이밍 페스티벌(Cannes Gaming Festival)은 게임을 디자인, 음악, 프로그래밍의 종합 산물로서뿐 아니라 이제 하나의 서사예술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에서도 얼마 전 『게임 제너레이션』이라는 웹진이 창간되고 게임비평공모전이 열리는 등 게임을 예술비평의 대상으로서 다루는 씬이 확장되고 있다.3 더이상 서사와 문학이 등치되지 않는 시대에 서사의 장르적 영역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소비되고 있는 이야기의 주요한 형태로서 게임서사를 간과할 수 없게 된 시대에 게임서사를 경유하여 문학은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시간성의 리얼리티는 문학서사와 게임서사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여겨져왔다. ‘게임 같은 소설’은 다른 소설과 달리 근본적으로 현실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모색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오오쯔까 에이지(大塚英志)였다.4 게임은 서사 속 캐릭터의 죽음을 언제나 ‘리셋(reset)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실의 죽음을 그려낼 수 있는 문학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5 플레이어가 죽음을 세이브하고 리셋할 수 있는 한, 시각적인 화면에서 죽음이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게임은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없다. 즉, 태어난 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유한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자명한 현실은 게임상에서 아무런 의미값을 지니지 못한다. 물론 오오쯔까가 말하는 ‘게임 같은 소설’은 테이블토크 롤플레잉 게임(TRPG)의 원칙을 기초로 삼는 1990년대 일본의 캐릭터 소설에 대해 설명한다는 전제가 붙어 있고,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문학성의 주요한 척도로 삼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논박의 여지가 있다. 애초에 반박되기 쉬운 주장일 수 있지만,6 오오쯔까의 논의는 게임서사의 문학적 가능성, 혹은 게임서사를 경유한 문학서사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으로 전환하는 데 좋은 단초를 제공한다. 게임서사나 게임 기법에 기초한 서사는 정말로 죽음을 ‘리얼’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리셋 가능성이라는 요소는 리얼리즘적인 서사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서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까?

2019년 모비우스 디지털이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배급하여 2020년 수많은 상을 휩쓴 액션 어드벤처 게임 ‘아우터 와일즈’(Outer Wilds)는 현시점에서 위 질문에 가장 성실하고도 치열하게 응답하고 있는 게임일지 모른다. 초보 우주비행사인 플레이어가 수십만년 전에 멸종된 노마이족의 흔적을 찾아 우주선을 타고 태양계의 여러 행성을 탐험하는 이 게임에서도 죽음은 리셋 가능한 무엇이다. 플레이어는 초신성이 되어 폭발하는 태양에 관한 단서를 하나씩 모아 각 행성의 숨겨진 장소를 찾으면서 연쇄적인 퍼즐을 풀어야만 결말에 이를 수 있는데,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플레이어의 목숨은 무한하게 제공된다. 미세한 우주선 조종에 실패해 뜨거운 태양에 빠지거나, 순식간에 차오르는 모래에 머리끝까지 파묻히거나, 우주복 탱크에 공기가 부족해 숨이 끊어지더라도,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더라도, 플레이어는 잠에서 깨어나 모닥불 앞에서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 첫 장면으로 되돌아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유영하는 모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무한하게 리셋되는 죽음은 독특한 면이 있다. 두가지 의미에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7 첫째, 플레이어는 플레이 능력과 무관하게, 죽음에 이를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게임이 시작된 후 22분이 지나면 무조건 죽게 되어 있다. 수십만년 전 노마이족이 어마어마한 태양 폭발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태양을 인공적으로 폭발시킨 뒤, 22분 전의 과거로 돌아가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시간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22분마다 태양의 초신성 폭발을 강제로 목격하며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리셋 가능성이 특정한 단위의 시간 안에 갇힌 타임루프인 셈이다. 이를 ‘루프적 죽음’이라 부르자. 둘째, 게임의 결말에서 우주는 멸망하고 플레이어는 죽게 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모험에 투입되지만, 서사의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무한히 반복되는 태양의 초신성 폭발을 멈추고 우주의 멸망을 막으려는 방향으로 추동된다. 그러나 온갖 고생을 통과하고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알게 되는 것은 인공적인 태양 폭발이 아니더라도 우주는 본디 생명을 다해가는 시점이었다는 사실, 즉 플레이어는 단지 우주가 소멸하기 직전의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이 모든 정황을 목격했을 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남은 것은 곧

  1. “First video-game version of the Cannes Film Festival set for Fall 2023,” The Brussels Times, 2022.10.14.
  2. 대표적으로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 중 하나인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는 2003년부터 독립적인 게임 부문 시상식을 개최하고 있다.
  3.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www.gamegeneration.or.kr) 참조. 『게임 제너레이션』의 이경혁 편집장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둘러싼 전반적인 환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게임을 문화예술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그 자체로 문화로 대우하고, 다루고, 이야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만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것과 예술비평의 대상으로서 게임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층위에서 병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게임을 하는 건 10대, 지르는 건 30대… 그래서 게이머는 ‘과정’을 잃었다」, 한국일보 2022.9.24.
  4.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장이지 옮김, 현실문화 2012, 92~93면.
  5. 물론 죽었던 자들이 되살아나는 서사는 게임 장르에 국한되는 특징은 아니다. 근대적 시간관 이전의 한국 고전소설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신묘한 약물’ 또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물의 환생이 이루어지곤 한다. 예컨대 ‘바리데기’ 신화에서는 바리데기가 가지고 온 약초를 통해 죽었던 부모가 되살아나고, 「심청전」에서 물에 빠진 심청은 연꽃에 실려 돌아온다. 다만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환생의 장치가 서사의 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게임처럼 무한하게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6. 오오쯔까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반박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즈마는 오오쯔까의 논의에 기대어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과 같은 루프물이 캐릭터의 메타 이야기적인 상상력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종류의 리얼리즘적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석했다. (아즈마 히로키, 앞의 책 122~40면) 다만 아즈마의 경우 서사가 소비, 유통되는 환경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이 글은 서사의 내적인 구조에서 그 가능성을 살펴본다.
  7. 이어지는 두 문단에는 아우터 와일즈의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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