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유담 金裕潭

1983년 부산 출생.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neverend1130@hanmail.net

 

 

 

이완의 자세

 

 

1

 

만수는 크다. 키는 187센티에 몸무게는 90킬로가 넘는다. 목소리도 크다. 길에서 알은체하며 큰 소리로 부를 때면,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진다. 어려서부터 녀석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지금은 기분이 좋을 때만 누나라고 부른다. 만수는 야구를 잘한다. 아니 잘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또래 중 가장 성적이 좋은 좌완 투수였다. 메이저리거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야구 유학을 떠났던 만수는 환호성을 받으며 출루했지만 맥없이 아웃을 당한 타자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만수가 돌아왔을 때 만수 엄마는 여탕에서 목욕을 하다 말고 엉엉 서럽게 울었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몰려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 입구에 들어선 손님들은, 이 집 아들 만수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로 80센티, 세로 110센티 크기의 커다란 사진 액자 속에서 유니폼을 입은 만수는 우승기를 흔들고 있었다. 만수가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그 액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액자가 걸려 있던 위치만 확연하게 드러났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쌓인 주위 벽면과는 대비될 정도로 표백된 듯 하얗게 남은 액자의 자리는, 흩날려진 만수의 꿈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수의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같은 크기의 다른 액자가 놓였다. ‘참숯 불가마의 효능’이라는 커다란 표제 아래 불가마 사진과 그에 관련된 글귀가 진지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참숯이 아닐 시에는 1억원을 배상하겠습니다!!’라는 빨간 고딕체의 글씨로 마무리된 하단이 인상적이었다. 만수의 꿈이 뜯겨진 자리를 ‘참숯 불가마’가 보란 듯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만수와 나는 다르다. 엄마의 사물함 벽면에 붙어 있는 내 사진을 떠올렸다. 엄마는 내가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트로피를 든 채 찍은 사진과, 나에 대한 기사가 실린 무용 잡지를 코팅해 사물함에 붙여놓았다. 나는 더이상 무대에 설 수 없지만, 엄마에게 얼른 그 사진들을 떼어버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엄마는 이제 대체 어떤 희망으로 그 조그만 사물함의 문을 여닫을 수 있을까.

 

 

2

 

엄마는 시선을 끌었다. 엄마의 피부는 매끈하고, 윤기가 흐른다. 특별히 썬탠을 하지 않아도 몸 전체가 건강한 구릿빛을 띤다. 몸매는 마른 편이지만 팔과 다리, 그리고 복부에까지 잔잔한 근육들이 붙어 있다. 가슴과 엉덩이에 조금만 더 살집이 있었더라면 남미의 댄서같이 뇌쇄적인 분위기를 풍겼을 텐데. 볼륨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엄마는 충분히 섹시하다. 우리 엄마처럼 빨간색 팬티와 브래지어 세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빨간색 브래지어를 입은 엄마의 가슴골 사이에 송송히 맺혀 있는 땀방울을 볼 때면, 나는 아찔하면서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손바닥과 발바닥이 유난히 하얗다. 그 손바닥과 발바닥은 하루 종일 물을 머금은 채로 쭈글쭈글했다.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핸드크림이나 오일을 발랐지만 거칠고 볼품없는 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손과 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유라 엄마는 어쩜 그렇게 젊어 보여? 어떻게 이 나이에 이런 S라인이 나와? 군살이 하나도 없네. 목욕탕에서 엄마를 만난 중년 여자들은 모두들 엄마의 몸매와 젊음을 부러워했다. 속 썩이는 서방이 없어서 그렇지. 나처럼 살면 살이 찔 수가 없다니까. 목욕탕을 찾는 아줌마들 앞에서는 별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엄마가 지금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는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의 지하 1층 여탕에서 일한다. 이십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선녀탕이라는 조그만 공중목욕탕이었다. 전국적으로 찜질방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십년 전을 기점으로 사장은 목욕탕을 헐고 3층 건물을 지어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를 개업했다. 그리고 삼년 전 증축을 해서, 지금은 스포츠센터까지 갖춘 5층 건물의 찜질방이 되었다. 시내의 유명 찜질방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인근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고 시설이 깔끔한 편이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한자리에서 이십년째 일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이곳을 찾는 여자들도 많았다. 엄마는 만수가 태어나기 전인 선녀탕 시절부터 때밀이로 일해왔다. 지금이야 세신사니 목욕관리사니 있어 보이는 말을 쓰지만 그 시절에는 때밀이가 엄마를 가리키는 자연스러운 단어였다. 사실 요즘도 손님들은 엄마를 때밀이 아줌마나 여탕 아줌마, 혹은 유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가 때밀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무용학과 전공생 중에는 태어나서 대중탕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들도 꽤 있었다. 엄마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어머, 그래?”라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썹은 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며 깜짝 놀라기도 한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미안한 기색을 표하는 이들에게 나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때밀이의 딸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모르는 게 왜 그들이 미안해할 일인가. 내가 그동안 만나다 말았던 남자들도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대놓고 ‘뜨악’하는 속물은 차라리 귀여웠다. 짐짓 교양있는 척하면서 “나는 괜찮아. 상관 안 해”라고 말하는 녀석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집어넣어 고문한 다음, 진심을 토로하게 만들고 싶었다. 우리 엄마가 저더러 어쨌다고 자기가 괜찮다고 말하는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이게 상관할 일이라는 뜻인지 제대로 따져 묻기도 전에 그들은 나와 무관한 사이가 됐다.

 

 

3

 

엄마의 이름은 오혜자다. 한때는 그녀도 가슴에 명찰을 달고, 오혜자씨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여상을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백화점의 1층 화장품 매장에 취직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백화점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매장 직원으로 뽑지도 않았다. 명문여상 출신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용모가 단정한 사람만을 채용했다. 엄마의 경우 명문여상도 아니었을뿐더러 성적이 딱히 우수하지도 않았지만, 용모가 특출나게 단정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백화점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백화점 1층에서도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화장품 브랜드 매장을 담당했다. 내 아버지는 그 매장을 들락날락하는 본사의 영업직원이었다. 본사라는 단어에 스무살 엄마의 가슴은 묘하게 두근거렸다. 명동의 중심가에 위치한 백화점 안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중심이 되는 자리에 매일 서 있으면서 엄마는 주목받는 삶을 동경하고 갈망하게 되었다.

사실 내 아버지는 본사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전국의 화장품 매장을 돌며 재고를 조사하고, 주문서를 받는 게 그의 일이었다. 정작 엄마가 본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죽은 후였다. 지방 출장길에 고속도로에서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인한 순직을 인정받기까지는 이년이 넘게 걸렸다. 그전까지 엄마는 커다란 직육면체 모양의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동네 아줌마들의 피부 마사지와 눈썹 문신을 해주며 돈을 벌었다.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나를 포대기에 싸서 업은 채로, 엄마는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야 했다.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겨우 받은 아버지의 보상금은 엄마가 살면서 만져본 돈 중 가장 액수가 컸다. 엄마는 아버지의 부모 형제들과 인연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 앞에 ‘오혜린 피부관리숍’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피부관리실을 차렸다. 엄마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피부관리실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사지 실력이 아니라 원장의 피부였다. 엄마는 윤기 나고 반짝이는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큰 공을 들였다. 동네 아줌마들을 상대하는 피부관리실이기는 했지만, 최대한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인테리어에도 적지 않은 돈을 들였다. 엄마는 세련된 옷을 차려입고 빨간 스포츠카를 몰면서 집에서 십분 거리의 가게에 출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환하고 반짝거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사파이어 아저씨가 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엄마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아저씨의 얼굴은 특별히 관리를 받지 않아도 하얗고, 빛이 났다. 아저씨는 목소리도 좋았다.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아저씨가 내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줄 때면,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억지로 눈꺼풀을 치켜세웠다.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동화 속 세상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아저씨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내게 커다란 곰인형을 선물했다. 내 키만 한 곰인형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우물대고 있을 때 그는 한 팔로는 나를, 다른 한 팔로는 곰인형을 번쩍 들어 올려 내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나는 너무 좋은 나머지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함께 살았다. 아저씨는 생선살을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었고, 유치원 발표회 때는 맨 앞자리에서 가장 크게 박수를 쳐주었으며, 놀이동산에 함께 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시절 엄마는 항상 웃고 있었다. 나의 조그마한 재롱에도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르 웃으며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안방에서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 누워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일어나보면 신기하게도 내 방 침대였다. 아저씨가 잠든 나를 번쩍 들어 옮겨놓은 것이다. 가끔 어설프게 잠이 들었을 때면 아저씨가 숨을 죽인 채로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올리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부러 죽은 것처럼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저씨가 나를 쉽게 옮길 수 있도록, 온몸에 힘을 빼서 새털처럼 가볍게 만들고 싶었다.

엄마는 피부관리실 선반에 전시되어 있던 프랑스산 화장품을 치우고, 아저씨가 팔던 다양한 종류의 건강식품과 세제, 화장품을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이 제품들을 사들이면 더 예뻐지고, 더 젊어질 수 있다는 말에 많은 손님들이 관심을 보였다.

엄마는 다이아몬드가 되겠다고 했다. 아저씨를 먼저 다이아몬드로 만들고, 다음 차례는 엄마가 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아몬드가 뭐냐고 묻자 엄마는 얇은 잡지책의 표지를 가리켰다. 잡지의 표지에는 정수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크게 부풀리고, 짙게 화장을 한 중년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보다 훨씬 늙고 못생긴 그 여자처럼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이 다이아몬드라고, 모두가 엄마를 우러러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쳤다.

아저씨가 사라진 후 한동안 엄마는 말을 잃었다. 가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이 몰려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엄마는 아저씨와 나란히 누웠던 황토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켜고 누운 채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끔씩 방문을 열고 들어가,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엄마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조심스레 확인해보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가 걷어낸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썼다. 당시 일곱살에 불과했던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엄마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엄마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도, 불길한 기운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 같아서 꾹꾹 참았다.

엄마를 대신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것은 나였다. 엄마는 온몸에 열꽃이 잔뜩 오른 나를 업고 한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가며 울부짖었다.

“하느님, 부처님, 천주님, 누구든 저희 좀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유라까지 잘못되면 저는 죽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헛된 꿈 안 꾸고 살겠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엄마의 등에 뺨을 부비며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급성 폐렴으로 나는 한달 넘게 병원 신세를 졌다. 병실로 찾아온 아버지의 부모, 그러니까 나의 조부모는 분노와 측은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엄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고 사라졌다.

 

 

4

 

퇴원 후 나는 엄마를 따라 원래 살던 곳에서 한시간 넘게 차를 타고 경기도 외곽의 한 동네로 갔다. 엄마는 재래시장 입구에 삐죽이 솟아오른 선녀탕의 굴뚝을 가리키며 우리가 당분간, 지낼 곳이라고 당분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우리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는 아니더라도 ‘집’에서 살 줄 알았다. 여탕 탈의실 옷장에 짐을 부리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남은 것은 적지 않은 빚과 어린 딸뿐이었다. 엄마는 나의 조부모에게 빌린 돈으로 집을 구하는 대신 선녀탕의 때밀이 자리를 샀다. 이제부터는 양손에 스포츠카의 운전대가 아니라 이태리타월을 쥐어야 했다. 처음부터 엄마가 능숙하게 여자들의 때를 민 것은 아니다. 힘 조절에 서툴렀고, 손님들은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엄마는 매일 밤 나를 식어가는 온탕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내 몸에 훈기가 돌 무렵 플라스틱으로 된 파란 침대 위에 눕혔다. 엄마는 나를 눕혀놓고 프로 때밀이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등뼈가 닿은 바닥은 딱딱했고, 엄마의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버둥거릴 때마다 엄마는 물 묻은 손으로 내 몸의 곳곳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움직이지 마.”

“엄마, 나 아파.”

“이게 뭐가 아파. 가만히 있으라니까.”

여탕 안의 난방장치는 이미 꺼져 있었고, 내 몸은 금방 식었다. 때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때가 나오지 않는다며 엄마는 또 신경질을 부리며 나를 때렸다. 엄마와 나 둘밖에 없었지만 넓은 공간에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눈물을 찔끔거리면 엄마는 또다시 손바닥으로 나를 매섭게 내리쳤다.

“울지 마. 뭐 이깟 일로 울고 그래? 지금 이건 우리 모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야. 이것도 못 견디면 둘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그냥 여기서 우리 같이 죽을래?”

싸늘한 엄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깨문 채로 추위와 아픔, 그리고 수치와 모멸감을 견뎠다. 버둥거리지 말고, 울지도 말고, 몸에 힘을 뺀 채로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엄마의 요구조건을 일곱살의 내가 모두 수용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긴장한 상태로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힘주지 마! 힘 빼. 좀 참으란 말이야!”

엄마는 손에 든 때수건을 벗어던지고 다시 나를 때렸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엄마를 화나게 하는지, 엄마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몰랐다. 내가 참아야 하는 것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아프고 서러웠을 뿐이다. 이게 아니면 둘이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엄마가 독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을 때, 나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죽음보다는 그녀의 손찌검이 더 두려웠다. 비누거품이 묻은 엄마의 때수건이 사타구니 사이를 거칠게 지나칠 때,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었다. 목욕이 끝나면 내 몸 곳곳은 울긋불긋했다. 엄마가 때수건으로 민 자국과 때린 손자국이 온몸에 교차된 채 남아 있었다.

엄마가 일이 손에 꽤 익은 다음에도 밤마다 이루어지는 목욕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나면,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찾았다. 엄마의 신경이 하루 중 가장 날카로운 때였다. 결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밤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의 신경을 거슬렀다. 엄마가 나를 찾는 소리에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오다가 조심성이 없다고 맞았다. 엄마는 필요 이상으로 거품을 많이 내어 내 몸의 곳곳을 온 힘을 다해 밀었고, 거칠게 머리를 감겼다. 목욕이 끝나면 수건을 한 손으로 쥐고 휘젓듯이 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몸을 빼거나 반항하면 그때부터 소리를 지르며 때렸다.

하루 종일 여자들의 몸을 씻기느라 녹초가 된 상황에서도, 엄마는 자신의 밑바닥에 남은 마지막 힘까지 소진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울음 섞인 고함을 질렀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나도 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보내고 팔자나 고치면 속 편하지. 너 때문에 못하는 거야. 애비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에미까지 없이 그렇게 살아야겠니? 그럴 바엔 같이 죽자.”

흠씬 두들겨 맞으며 목욕을 하고 나면 쉽게 잠에 빠졌다. 나는 찐득찐득한 탈의실 바닥에 깐 전기장판 위에 온몸을 옹송그린 채 잠이 들었다. 황토장판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등은 뜨거웠지만,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마치 내 몸이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만나는 경계면처럼 느껴졌다. 매일 밤 눅눅하게 나를 에워싸는 서러운 기운의 정체를 끝내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곤 했다.

 

 

5

 

낮 시간의 목욕탕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탕에서 갓 나온 여자들의 몸에서 나오는 훈기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여탕의 공기에 나는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들의 몸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하루 종일 발가벗은 채로 밥을 먹었고, 목욕탕을 뛰어다녔고,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는 나무 평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선녀탕에서 머무른 지 몇달 되지 않아 나는 소아질염 진단을 받았다. 밤마다 밑이 가렵다며 몸을 뒤틀어대는 나를 엄마는 황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엄마는 시장에서 흰색 면 팬티를 여러장 사왔다. 엉덩이 부분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팬티였다. 엄마는 내 팬티를 주기적으로 휴대용 가스렌지에 삶았다. 나는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팬티가 가득 든 빨래솥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순간은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갈색 세정제를 뜨거운 물에 풀어놓은 대야에 나를 앉혀놓을 때였다. 하루에 두세번씩 좌욕을 시켜주라는 의사의 처방에 엄마는 여탕에 다른 손님들이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시간이 날 때면 나를 목욕탕으로 불러들여 다리를 벌린 채 대야에 앉혔다.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갈색의 물속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손님들은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아이가 왜 저러고 있느냐고 엄마에게 묻는 오지랖 넓은 여자도 종종 있었다.

“아유, 질염이라나 뭐래나. 거시기에 세균이 들어갔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좌욕이 끝나면 엄마는 샤워기를 틀어 내 아랫도리를 물로 씻어냈다. 나는 턱을 덜덜 떨며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린 채 서 있었다. 특히 내 또래의 소녀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에는 목욕탕에서 또래 여자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목욕탕에서 만난 아이들과는 스스럼없이 친해졌다. 다른 아이가 가지고 온 소꿉놀이 장난감을 물에 담그고 놀면서 까르르 웃어댔고, 번갈아가며 탕에서 잠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아주 잠깐 목욕탕에 들렀다 떠나게 마련이었고, 나는 곧 혼자가 되었다. 나는 엉덩이 부분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팬티를 입고 평상에 오도카니 앉아 만화영화를 보면서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곤 했다. 그 시절 여탕의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나였고, 채널은 늘 케이블 만화영화 방송에 고정되어 있었다.

엄마가 아닌 여자들은 대체로 내게 친절했다. 목욕이 끝난 후 바쁘게 움직이던 여자들이 탈의실 중앙을 멀뚱히 지키고 앉아 있는 나를 모른 척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만큼 내가 안쓰럽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탕에서 엄마가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듯 나는 탈의실에서 가장 많은 시선과 관심을 받는 존재였다. 목욕탕을 찾은 엄마의 손님들은 나를 속이 훤히 비치는 냉장고 앞으로 데리고 가 마시고 싶은 음료수를 골라보라고 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들은 오후 두시면 단체로 몰려와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탕 속으로 뛰어들던 유흥업소의 언니들이었다. 그녀들에게는 남다른 아름다움과 분방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팬티도 입지 않은 채로 평상에 앉아 발톱을 깎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발가락을 꼼지락댈 때마다 거무스름한 음모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언니들의 성기를 보면서 야릇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언니들은 여탕에서 씀씀이가 가장 컸다. 엄마가 권하는 비싼 마사지도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비싼 음료수를 골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다른 어른들이 몸에 나쁘다고 못 마시게 했던 커피우유나 초코우유를 흔쾌히 허락하는 언니들이 좋았다. 유통기한이 다 된 흰 우유를 몸에 좋은 거라며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목욕탕 안주인 아줌마보다 훨 나았다. 물론 주인아줌마가 내게 흰 우유를 건네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관계의 발전이기는 했다.

처음에 그녀는 우리 모녀가 목욕탕에서 기거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쩌다가 사장 아저씨와 엄마가 말이라도 섞을라치면 매서운 눈으로 엄마를 흘겨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후 칠년 동안 생기지 않던 아이가 들어서자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선녀탕에 온 뒤 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며, 나를 복덩이라고 치켜세웠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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