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이웃집 사회주의자의 초상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편서 『김남주 문학의 세계』(공편), 역서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독일 대표 시선』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머리말
정지아 소설에서 그의 부모의 생애는 등단 후 30여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첫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 복간판 필맥 2005)에서 상세히 묘사하듯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전 1948년부터 종전 무렵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부친은 두차례에 걸쳐 20년 동안, 모친도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빨치산의 딸』이 비슷한 내력을 가진 앞 세대 작가의 작품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작가가 부모의 행적에 전폭적인 공감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령 이문구의 초기 단편 「일락서산(日落西山)」(1972)에서 “세 고을(보령·서천·청양군)의 지하당을 창설하고 이끌었던 책임자”1였던 선친의 행적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묘사되던 것과 대조된다. 이런 차이는 이문구의 작품이 나오던 당시만 해도 반공 군사독재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탓일 테다. 물론 『빨치산의 딸』이 나오던 무렵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는 여전했지만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이념적 금기가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빨치산의 딸』은 작가 스스로 “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2라고 했을 만큼 사실에 충실하며, 아버지가 하산 후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시작하고 어머니 역시 산에서 체포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후 작품에서도 부모의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가령 소설집 『봄빛』(창비 2008)에 수록된 「순정」(2005)에서는 보급투쟁을 위해 고향 동네로 내려왔다가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살길을 찾은 주인공이 산에서 죽은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길 2」(2008)는 전란 중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평생을 보내는 아들의 이야기다. 이들 작품에서 전란 당시의 응어리진 기억이 작중인물의 현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과 달리, 하산 후 아버지 이야기를 다루는 최근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는 전란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 당사자들의 삶을 지탱하고 북돋는 양상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화자가 부친의 죽음을 맞아 3일상을 치르는 동안 주로 조문객을 통해 전해 듣는 아버지 생시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조문객이 수시로 바뀜에 따라 스물다섯개의 짧은 장면이 교체된다. 이런 서술방식은 『빨치산의 딸』에서처럼 아버지를 중심에 놓고 모든 사건을 배치하는 방식을 허물고 주인공의 강력한 주체성과 목적의식을 배제한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이미지는 고인과 직간접으로 얽혀 있는 다양한 조문객의 관점에서 하나씩 구축된다. 그리고 상주인 화자가 조문객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2. 전쟁 상처의 치유와 냉전시대 극복
정지아 소설의 진지한 어조에 익숙한 독자는 첫 문장부터 당혹스러울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7면) 이 전봇대 사고는 고대 철학자 탈레스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탈레스는 밤중에 별을 관찰하다가 도랑에 빠졌는데 이를 지켜본 하녀가 발밑의 현실도 못 보면서 하늘의 별을 알겠냐고 조롱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발밑의 현실을 보지 못할지언정 숭고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할 수도, 그런 비현실적 이상주의가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다. 화자는 짐짓 하녀의 입장에 수긍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오갈 데 없는 방물장수 여인을 딱한 ‘민중’으로 여겨 하룻밤 집에 재워주었다가 마늘 반접을 도둑맞은 이야기가 그렇다. 또 『새농민』을 교본 삼아 농사를 지었다가 번번이 낭패를 보았다는 ‘문자 농사’ 이야기도 아버지가 평생 추구했던 평등세상이 현실과 유리된 ‘문자’의 관념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진지 일색의 삶”은 외부 관찰자의 눈에 돈 끼호떼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화자는 일단 그런 시각을 인정하면서 외부자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 이면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 활용하는데, 아버지의 절친 박한우 선생 이야기도 그런 경우다. 박선생은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형과 두 누나는 빨치산이었다. 결국 형제자매를 산에서 잃은 박선생은 전후 군대에 말뚝을 박았고, 나중에 예편하여 교련선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런 박선생과 서로 농담처럼 ‘통일의 방해꾼’이니 ‘빨갱이’니 티격태격하면서 평생 친구로 지내왔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자가당착의 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은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47면)
박선생이 군대에 말뚝을 박은 것은 형제자매가 빨치산이었으니 후환이 두려워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복을 입고 있는 한 형제자매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했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자구책이 자신을 옭아맨 족쇄이기도 했던 이중강박(double binding)의 고뇌 속에서 박선생은 아버지를 죽은 형제자매를 대신하는 존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친구의 형제자매 몫까지 다 갚아야 하므로 두 사람의 운명적 우애는 정치적 입장 차이까지도 뛰어넘는 든든한 결속력을 갖는다. 여기서 ‘사상’이란 전후 냉전체제하에 국가가 좌우로 편을 갈라 국민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이념적 도구일 뿐이다. 그런 통치 이데올로기를 허물어뜨리는 이들의 우애는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이념의 굴레에 매이지 않는 인간다운 삶의 활기를 얻는다. ‘사상’보다 ‘사람’이 낫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우애는 국가의 폭력과 통제,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도 극복한 인간해방의 결실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박선생의 보수주의는 생존의 방편이자 자기방어를 위한 보호색 비슷한 것이므로 진성 반공주의와는 다르다. 따라서 그의 보수주의와 아버지의 사회주의는 적대적 좌우대립과는 다른 비대칭 관계이며, 그럼에도 이것을 좌우대립으로만 보는 것 역시 냉전체제가 작동시키는 고정관념이라는 점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작품의 제목이 말하는 ‘해방’은 외적인 통제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냉전시대가 심어놓은 모든 고정관념을 떨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는 까닭은 한국전쟁 이래 지금까지 우리의 삶과 사고를 짓눌러온 냉전시대의 중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선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산 후 아버지의 삶에서 진정한 해방은 빨치산 시절의 전투적 이념을 극복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구체적 생활 속